사슴벌레식 문답 … 007
실버들 천만사 … 043
하늘 높이 아름답게 … 085
무구 … 115
깜빡이 … 147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 169
기억의 왈츠 … 201
해설│권희철(문학평론가)
영원회귀의 노래 … 243
각각의 계절
권여선 · Novel
276p

유려하고도 엄정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며 한국문학이 신뢰하는 이름이 된 작가 권여선이 삼 년 만에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낸다. 술과 인생이 결합할 때 터져나오는 애틋한 삶의 목소리를 담아낸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에두르지 않는 정공법으로 현실을 촘촘하게 새긴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 2020) 이후 일곱번째 소설집으로, 책으로 묶이기 전부터 호평받은 일곱 편의 작품이 봄날의 종합 선물 세트처럼 한데 모였다. 1996년에 등단해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글쓰기에 매진하며 많은 사람의 인생작으로 남은 작품들을 선보여온 권여선은 이번 소설집에서 기억, 감정, 관계의 중핵으로 파고들며 한 시절을, 한 인물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 직시의 과정을 거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결코 화사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하는 곳으로 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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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한끗이 만들어내는 차이,
한국문학의 대표 작가 권여선 신작 소설집
2021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기억의 왈츠」,
2020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실버들 천만사」,
2019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하늘 높이 아름답게」 수록
유려하고도 엄정한 문장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며 한국문학이 신뢰하는 이름이 된 작가 권여선이 삼 년 만에 신작 소설집 『각각의 계절』을 펴낸다. 술과 인생이 결합할 때 터져나오는 애틋한 삶의 목소리를 담아낸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에두르지 않는 정공법으로 현실을 촘촘하게 새긴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 2020) 이후 일곱번째 소설집으로, 책으로 묶이기 전부터 호평받은 일곱 편의 작품이 봄날의 종합 선물 세트처럼 한데 모였다. 1996년에 등단해 사반세기가 넘는 시간을 글쓰기에 매진하며 많은 사람의 인생작으로 남은 작품들을 선보여온 권여선은 이번 소설집에서 기억, 감정, 관계의 중핵으로 파고들며 한 시절을, 한 인물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그 직시의 과정을 거쳐 드러나는 삶의 모습은 결코 화사하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과정이 우리로 하여금 풍성하고 생동적인 삶을 욕망하는 곳으로 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원래 생겨먹은 데서 얼마나 많이 바뀌었을까.”
무엇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왜 기억하는가
우리가 왜 지금의 우리가 되었는지에 대한
권여선의 깊고 집요한 물음
소설집의 처음과 끝에는 ‘기억’을 주된 키워드로 하는 「사슴벌레식 문답」과 「기억의 왈츠」가 한 쌍처럼 나란히 놓여 있어 『각각의 계절』을 둥그렇게 감싸안는다. 오랫동안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아연함과 서글픔을 그려낸 「사슴벌레식 문답」은 권여선의 오랜 주제인 기억의 문제를 한 발짝 더 밀고 나간 빛나는 수작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대학 신입생들은 낯선 공간에 던져진 새끼 오리들처럼 초창기에 대학가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11쪽)하듯 ‘준희’와 ‘부영’, ‘경애’, 그리고 ‘정원’ 역시 그랬다. 대학교에 입학해 같은 하숙집에서 살게 된 이들 넷은 함께 술을 마시고 일상을 공유하며 친밀하게 지낸다. 모임의 리더 격인 시원시원한 부영과 규칙적이고 예의바른 경애, 상냥하고 조심성이 많은 정원, 그리고 술을 좋아하고 즉흥적인 소설의 화자 준희는 해가 바뀌고 거주 환경이 달라진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려 하고 서로의 생일을 결사적으로 챙긴다. 네 사람이 아름답게 그려나가던 궤적은 그러나 정원의 갑작스러운 자살과 경애의 배반으로 엉클어지고 만다. 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을 뿐이라는 사실만이 선명한 지금, 준희는 지난 세월을 엄격하고 절박하게 돌이켜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중추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사슴벌레식 문답’이다. 오래전 네 사람이 함께 떠난 여행에서 정원은 숙소에 사슴벌레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주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방충망도 있는데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오느냐고. 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윽고 이렇게 답한다.
어디로든 들어와.
그리고 가버렸다. 사슴벌레를 대변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실로 감탄했다. 너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의젓한 말투가 들리는 듯했다.(21쪽)
어디로 들어왔느냐는 물음에 어디로든 들어왔다고 대답하기. 준희와 정원은 상대의 질문을 그대로 받아서 따라 하는 이 대화의 방식을 ‘사슴벌레식 문답’이라고 이름 붙이며 ‘마법의 버튼’이라도 생긴 듯 여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준희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정원은 연극을 하길 바라는,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미래가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어떤 연극을 하고 싶은지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 없이, ‘어떤 소설이든 쓰고 싶고 어떤 연극이든 하고 싶다’고 말하면 되는 이 사슴벌레식 문답을 통해 두 사람은 어떤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산뜻하고 명료한 사슴벌레식 문답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준희의 시선 속에서 점차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바뀌어간다. 그 대답에는 당시에는 읽어내지 못한 ‘무서운 뉘앙스’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들어와, 물으면 어디로든 들어와, 대답하는 사슴벌레의 말 속에는, 들어오면 들어오는 거지, 어디로든 들어왔다, 어쩔래? 하는 식의 무서운 강요와 칼같은 차단이 숨어 있었다. 어떤 필연이든, 아무리 가슴 아픈 필연이라 할지라도 가차없이 직면하고 수용하게 만드는 잔인한 간명이 ‘든’이라는 한 글자 속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29쪽)
하지만 권여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사슴벌레식 문답에 담겨 있을 또다른 의미를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비록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다치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하더라도.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40쪽)는 소설 속 말을 빌린다면, 직시함으로써 스스로가 과녁이 되는 자리로 옮겨가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잿빛 수의의 기억을 은빛 베일의 기억으로 변환하는 기적 같은 순간을 찾아냄으로써 잊힌 시간과의 감동적인 소설적 조우에 성공했다”는 평과 함께 202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기억의 왈츠」에도 과거를 또렷이 직시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나’는 동생 부부와 교외에 있는 숲속 식당에 찾아갔다가 오래전, 그러니까 삼십여 년 전의 기억과 마주한다. 대학생이던 그 시기 “내 손에 쥔 확실한 패는 오늘밖에 없고 그 하루를 땔감 삼아 시간을 활활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211쪽)하며 살아가던 ‘나’ 앞에 ‘경서’라는 또래의 남자가 등장한다. 우연히 도서관 통로를 걸어가다가 술자리에서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구선배’가 ‘나’를 불렀고, 그 옆에 앉아 있던 경서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그날을 계기로 경서는 ‘나’에게 살갑게 대하고, 그러던 어느 가을날 ‘나’는 경서, 구선배 등과 함께 짧은 소풍으로 교외에 있는 식당에 가게 된다. 그 식당이 바로 현재의 ‘나’가 동생 부부와 함께 다녀온 그 숲속 식당이었던 것이다. 그간 ‘나’는 자신이 경서에 대해 각별한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고, 그건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애매한 연애”(209쪽)였다고, 소풍을 다녀온 뒤 서로 멀어지게 된 데에는 경서의 책임이 크다고 여겨왔지만 숲속 식당에 다녀온 지금, 삼십여 년 전의 기억은 오류와 회피의 더께를 걷어내고 ‘나’의 앞에 새롭게 떠오른다.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왜곡과 미화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권여선의 인물들은 마치 불순물을 제거하듯 자기 합리화의 욕망을 누르고 자신이 저질렀을지도 모를 실수와 과오를 천천히, 깊고 집요하게 짚어낸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친 끝에 바라보게 된 기억은 뜻밖에 인물들에게 선물처럼 다른 무언가를 쥐여준다. 「기억의 왈츠」에서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241쪽),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던 이십대를 돌아본 후 ‘나’가 그 시절 경서에게 건네받은 위안의 손짓도 함께 떠올리게 된 것처럼. 그럼으로써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같은 쪽)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리고 그건 ‘기억을 하면서 두 번 (다르게) 살고, 기억을 쓰면서 세 번 (다르게) 사는’(권여선, 특별 소책자 ‘어텐션북’에서) 일일 것이다.
기억의 속수무책, 감정의 속수무책, 관계의 속수무책
우리를 단번에 무장해제시키는 권여선의 계절 소설
소설집의 제목인 ‘각각의 계절’은 「하늘 높이 아름답게」의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114쪽)라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는 일흔두 살에 병으로 죽은 ‘마리아’를 회상하는 성당 신도들의 모습을 차례로


수연
3.5
기억의 왈츠 ….. 염세적인 인간이 타인을 안중에서 지우고 고독해지길 택한 와중에도 우연이 약속을 성사하도록 기대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단 사실에 감격함 사랑은 어느 시점에 불쑥 불러도 사랑이구나 싶고
난상
4.0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pizzalikesme
4.5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 114p
귤귤
3.5
P27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정원이 직면했을 무섭고 삭막한 삼십대 후반의 상황이 짐작되어 공감도 되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모르게 되었다.
정지연
3.5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최형우
4.0
그때도 지금도 속수무책으로 흘러가는 인생들의 당연하지만 잔인한 이야기. 산소처럼 누리던 특권과 일산화탄소처럼 깔려있는 차별, 힘 들였지만 남은 게 없는 노력과 놓쳤던 모든 것들이 다가온다. (2023.07.17.) 사슴벌레식 문답 4.5/5 "(사슴벌레가)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가 없어. 어디로든......"(42쪽) 한 가지에 났다 해도 가는 곳 모르는 50년 흘러간 인생들에 관하여, 눈 뗄 수 없이 통렬하게. 실버들 천만사 4/5 사랑해서 얻은 건 자신과 어떻게든 닮은 딸이라는 것, 그 딸도 그 과정을 반복할 거라는 것. 당연하지만 잔인한 그것. "사랑해서 얻는 게 악몽이라면, 차라리 악몽을 꾸자고 반희는 생각했다. 내 딸이 꾸는 악몽을 같이 꾸자.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함께 말라 비틀어지고 질겨지고 섬뜩해지자. 뇌를 젤리화하고 마음에 전족을 하고 기형의 꿈을 꾸자."(79쪽) 하늘 높이 아름답게 4/5 가장 고귀한 사람의 모습은 현실에서 가장 누추한 자의 모습이라 했던가. 사실 그렇게 누추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라.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라며 고난의 굴곡을 각각 견뎌온 사람의 품위. 무구 3.5/5 가장 티없이 사는 사람이 티없는 그때를 더 선명히 기억하며 열렬히 그리워한다. 깜빡이 3.5/5 자기 마음대로 해야 직성 풀리는 엄마, 길도 몰라 약속도 못 오는 정신 없는 이모. 역시 길 잃은 혜영과 가기 싫다며 툴툴대는 혜진. 자매들의 운명은 세대를 넘어 반복되는가.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3.5/5 돈 많이 생겨 떵떵거릴 수 있어졌어도 어릴 적 받았던 성차별의 콤플렉스는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공기처럼 특권을 누리고 살았던 맏아들은 박사 논문을 써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왜곡된 가족의 히스테리에 제대로 역풍을 맞는다. 물론 자신은 특권인 줄 몰랐지만 대가는 혹독하다. 기억의 왈츠 4.5/5 그땐 나도 나름 힘들어서 너를 꼼꼼히 들여다봐줄 여유조차 없었다고, 이제야 혼자서 마음으로 보내보는 편지 "우주의 왈츠를 추는 날. 내 생애 한 번밖에 없었을 그날에 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나. 어머니 앞에 엎드려 울며 다시 착한 딸이 되겠다고 빌고 있었나, 끝장을 보자고 대들다 오빠에게 머리를 펀칭볼처럼 두드려 맞고 쓰러져 있었나. 세상은 그날 왜 나를 원하지 않는 장소에서 원하지 않는 짓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나."(240쪽)
상범
2.5
같은 지구, 동일한 시간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계절을 난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상반된 계절. 남극과 적도의 극한의 기후. 춘하추동의 다채로운 사계절. 각각의 계절을 나며 다가올 계절을 대비하는 사람들과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올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Liemoon
3.5
일전에 읽은 <하늘 높이 아름답게>를 제외하고 <사슴벌레식 문답> <무구> <기억의 왈츠> <깜빡이> 순으로 좋았다. 하루 동안 함께 여행하는 모녀의 이야기를 다룬 <실버들 천만사>는 두 사람의 관계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져 이입이 어려웠고,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의 경우 하이퍼리얼리즘적 요소를 살려 조금 더 현대적으로 그렸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옛스럽다는 인상이 가장 강한 단편이었다.) 엄마와 이모를 지켜보는 두 자매의 이야기 <깜빡이>에는 이모를 대하는 엄마의 태도가 한순간 차갑게 식어버리는 지점이 서늘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서늘함 안에서 자매는 대충 취하다 말지 않을 것, ‘윤서방‘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유일한 보호자가 되어주자 거꾸로 다짐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기억의 왈츠>의 경우 전반적인 서사보다는 특정 문장이 마음에 꽂혔는데 예컨대 이런 문장이다. ”그건 아마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어두운 정념과 그럼에도 불구하도 스물네 살의 삶이 품을 수밖에 없던 경쾌한 반짝임 사이에서 빚어진 어떤 비틀림 같은 것.“(p.218) “”내가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처구니 없는 걸 요구해서 상대를 끝내 시험에 들게 해 그걸 얻어내고 말겠다는, 결국 이겨먹고 말겠다는 그 악착한 마음은 어디서 왔을까.”(p.232) 유난히도 뜨겁게 못난 그 시절, 돌이키고 싶지 않은 그 시절을 꾸역꾸역 반추한 끝에 화자가 맞닥뜨린 것이 후회나 죄스러운 마음, 성장했다는 감각이 아니라 좋았다. 애써 따스이 봉합하는 것이 아닌, 이제야 긴 도망이 끝났다 자각하는 점이 좋았다. ‘지나쳐왔다’가 아닌 ‘지나고 있다‘의 선언이니까. 이어지는 삶의 포착이니까. <무구>는 특히 이 부분이 좋았다. “하지만 소미는 가끔 가벼운 흥분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만약 현수가 찾아온다면? 그래서 약속한 대로 땅값의 반을 내겠다고 한다면? 그러니 자기에게 땅의 반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그러면 자신은 선뜻 그렇게 할 것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소미는 마음속으로 발끈했다. 그러려면 그때 너는 빈말로라도 손해의 반을 책임지겠다고 했어야 했어. 내 곁애서 나와 함께 두려움을 이겨냈어야 했어. 그런데 그러기는커녕 비열하게 도망쳤지. 전적으로 나한테 손해를 덮어씌워놓고,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불안과 고독 속에 남겨놓고 넌 잠적해버렸지.”(p.144) 가장 거대한 현실, 재물로 지독하게 얽매인 와중에도 그토록 바랐던 것이 우리가 이 불안과 두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다는 점이 이 소설을 진한 사랑-서사로 만든다. 네가 원망스러운 것은 네가 나를 이용해, 나에게 사기를 쳤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없는 시간 속에서 나 홀로 시간을 보내야 했던 것 때문이라고. 여전히 나는 네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서사에 어울리는 참 악착같은 고백이다. <사슴벌레식 문답>은 구성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세월과 불가해를 타고 흐르는, 보다 더 미시적인 부분에 천착한 이야기였으면 좋았을 테다. (작중에 언급되는 ’사슴벌레식 문답‘이 조사 하나 더 붙이는, 아주 간단한 비틀기를 이용한 플롯이었기 때문에 그러하다.) 사람은, ’든‘의 변화는 사상이나 신념 같은 거창한 것 없이도 찾아드니까. 그럼에도 ’사슴벌레식 문답‘이라는 하나의 요소만으로도 이 소설을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든 살아” “너는 왜 연극이 하고 싶어.” “나는 왜든 연극이 하고 싶어.“(p.21~22) ‘든’은 가장 강력한 긍정이자 대꾸하지 않겠다는 차가운 방어이자 막막한 절망이다. 단 한 글자에서 이 모든 것을 길어올리는 작가,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나. * 작가의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소설집이었다. 담담 초연해진 듯해 조금은 슬펐고, 개인적으로 아직은 감정적으로 널뛰는 이야기에 마음이 동하는구나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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