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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원작에 충실한, 감각적으로 연출된 박찬욱 감독의 드라마를 먼저 보고 봐서 인지, 드라마의 텍스트 복기 이상의 의의는 없었다. 다만, 결말의 여운은 책이 더 쓸쓸하고 진했던 것 같다. 책과 드라마의 결말이 전혀 다르게 연출되었는데, 이는 현실과 극이 중첩된 상황에서 분열된 자아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배우들이, 극이 끝난 후 어느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 서로 다른 결말을 선택했다고 보여진다. 우선 드라마의 결말은 아래와 같다. 찰리가 베커의 집을 찾아갑니다. 베커는 커피를 마시며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난 누구예요?"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베커는 찰리를 자신의 집 안으로 데려가고, 베커만 다시 나와 정원에 두고 간 커피와 커피잔을 들고 다시 들어갑니다. 문이 닫히고 드라마는 끝납니다. 이들의 대화는 매우 의연하다. 마치 극이 끝난 후 현실로 재빠르게 복귀한 배우들의 무대 아래의 모습 같다. 새롭게 시작한 인생의 시작점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혹은 찾아갈 미래를 비교적 밝고 담백하게 그려냈다. 반면 책에서는 찰리와 요제프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인도를 따라 낯선 도시 안으로 들어가며 끝난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자기 혐오를 그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일종의 심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녀는 그의 역할인 킬러와 뚜쟁이가 되고,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끼이자 창녀이자 배신자가 되었다." 그렇게 그를 노려보는 데 갑자기 내면에서 분노의 불꽃이 터지며, 그녀는 그가 빼앗아간 정체성을 되돌려 받았다. .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아무리 연기였다지만, 진실이 아니었다지만, 찰리와 요제프의 자아는 분명 이전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책에서 말한대로 거의 분열되었을 것이다. 칼릴을 사살하며 그들의 극은 끝이 났지만, 그들은 극이 시작되기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서로를 몰랐던 때로, 혹은 서로가 사랑에 빠진 그 때로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감내해야 할 고통스러운 시간을 쓸쓸한 뒷모습으로 남긴 결말이 인간의 정체성을 보다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 1. 팔레스타인_유대민족 간의 갈등과 시민의 역할  이스라엘 지역을 둘러싼 팔레스타인-유대 민족의 갈등을 다룬 이 책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둘 중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고 싶어졌습다. 저는 보통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을 하고 제 의견을 말하고 싶어지거든요.  그러나 몇 천년을 핍박받으며 유럽 대륙을 유랑해야 했던 유대민족의 역사, 유대인에게 정치적 책임과 동시에 경제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 그 질서에 대항하기 위해 테러라는 폭력적인 수단을 선택했던 팔레스타인의 중첩된 상호관계를 따져보니,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살아남아야 하겠소? 아니면 우리 모두 짐을 싸서 이 나라 저 나라로 달아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겠소? 중앙아시아나 우루과이 땅을 조금 떼어받을 수도 있겠지만 부디 이집트는 사양하리다. 그곳에서 살아봤지만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거든. 아니면 유럽과 아시아 게토로 흩어져 제2의 학살을 기다려야 하겠소?"   "그냥 저 불쌍한 아랍인들을 내버려뒀으면 할 뿐이에요."   "좋소. 그래,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겠소?"   "마을 폭격은 그만해야죠. 사람들을 땅에서 쫓아내고 불도저로 마을을 밀어버리고 고문하고"   "지도를 보면서 아랍인들이 우리를 내버려뒀으면 하는 생각은 해본적 있소?"   .   "내 나라를 유대인들에게 넘기고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동양을 서방으로 만들라는 주문을 들려 우리한테 보낸 나라죠. 가서 동양인들을 길들여라. 팔레스타인 쓰레기들을 노예로 만들라! 예, 그렇게 명령한 거에요! 이전의 식민주의자들이 지친 탓에 우리를 새로운 압제자들에게 넘긴 겁니다. 복잡한 매듭을 단칼에 자른 놈들이죠."    해결 방안은 또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 어려웠습니다. 사실 나완 상관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절박함이 떨어진 것이겠죠. 누군가의 생생한 비극의 역사를 나는 단순히 지적 허영 충족을 위한 학습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실망스럽소 찰리 갑자기 이런 식으로 일관성을 포기하다니 ...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성인의 눈과 머리로 우매한 민중이 보지 못하는 본질을 봤잖소. 그런데 갑자기 민중을 위한 사소한 희생조차 모샇겠다고 하다니. 자본주의 착취에 정신과 영혼을 예속당한 민중들을 위해 훔치고, 살해하고 뭐든지 날려보란 말이오!"   .   "입장도 없고, 행동도 싫고, 다만 자유롭고만 싶다? .. 비동맹평화주의자라. 맙소사 당신이야 말로 극우 온건파군"      우리는 사회 문제에 대해, 특히 나와 관련 없는 사회 문제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나? 한편, 나와 무관한 사안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어디까지 관음이고 어디까지가 참여일까? 혹은 판단을 유보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방관일까, 신중일까? 2. "테러(폭력)와 인간의 본성"  책 속의 인물의 선택한 해결책은 폭력과 공작이었습니다. 칼릴의 테러조직은 정당한 대응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테러가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펼치고, 마티의 공작집단도 테러 조직에 응대하기 위해 폭격과 살인, 거짓과 인신매매(찰리에게 종용한 것들)와 같은 불법은 저지릅니다.   "테러조직을 부수고 싶으십니까? 그럼 먼저 테러분자가 되어야 할 겁니다." 313    그러나 정말 폭력이 불가피한 선택지였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폭력 그 자체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말하는 작품들이 많고, 그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폭력은 그냥 인간의 본능과 부합하는 가장 손쉬운 선택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논란이 된 영화 "조커"에서 조커가 총을 손에 쥐고 나서부터 상황을 다르게 타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참고해볼 필요도 있습다.)   "폭력은 정화다. 폭력은 우리를 열등감에서 해방시켜주고 두려움을 없애주고 자존심을 회복해줘요" 213   "그에게 인간으로서 가치를 부여한 유일한 존재가 바로 총인데 도대체 장난을 칠 여지가 어디 있다고?" 323     (한편, 주요 세력이 여성이었다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테러를 선택했을까 궁금하네요.)   3. 인생의 연극성 연극은 이 소설을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장치입니다. 찰리는 현실에서 펼쳐지는 연극에 캐스팅되었지만, 그 연극이 곧 자신의 현실이 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그 극/현실이 끝났을 때 찰리는 어떤 현실로 돌아가게 되었을까를 보여주며 책은 마무리 됩니다. 3-1. 배우는 자신의 배역이 있어야 극에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인생도, 내가 계속 주인공으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스스로 배역을 만들고, 부여하고, 바꿔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과 주관은 확고하며 나는 그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굉장히 유동적이고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지 않냐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알던 내가 아니게 되는 순간이 존재 하지 않나요? 상대를 만족시키고,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나를 변화시키고, 합리화하고, 원래 그런 것 처럼 믿어버린 순간이 있지 않나요? 어쩌면 우리의 정체성은 매우 유동적이고, 자의적으로 조립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배우들이란 극적인 해결책을 찾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요! 여러분께서 그곳으로 데려가는 순간 그 아이는 다시 태어날 거외다!" 124p   "그녀는 이제 자신이 누군지조차 헷갈렸다. 아니, 처은부터 내 자신이 있기는 했던가?" 326   "요제프는 밤낮으로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녀는 밤낮으로 싸웠다. 미셸을 위해, 현재의 광기를 유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위해, 파트메를 위해, 시돈 감옥의 살마와 폭격당한 아이를 위해 투쟁하고, 내면의 혼란을 탈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아를 밖으로 몰아쳤다. 자신의 두 번쨰 자아를 그 어느 떄보다 강력하게 단속하고 그 요소들으 하나의 투쟁적 자아로 결합했다." 554      3-2. 대체 찰리는 누구를 사랑한 걸까. 요제프? 미셸? 극 속의 자기 자신의 역할? 우리가 어떤 역을 연기하는 배우나 가수에게 반했을때도 비슷한 층위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어떤 정체성을 사랑한다는 의미일까      4.  결말_그들은 과연 어떤 현실로 돌아갔을까  그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인도를 따라 낯선 도시 안으로 들어가며 책은 끝납니다. 현실과 극이 중첩된 상황에서 분열된 자아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배우들이, 극이 끝난 후 어느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돌아간 현실은 어떤 현실이었을까요? 연극이 시작되기 이전 그리스에서 사랑에 빠졌던 연인? 함께 공작을 펼쳤던 공동체? 연극과 현실속에서 분열된 자아를 서로 보듬는동반자?   "그녀가 자기 자신을 대하는 자기 혐오를 그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일종의 심적 교류가 일어났다. 그녀는 그의 역할인 킬러와 뚜쟁이가 되고, 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미끼이자 창녀이자 배신자가 되었다." 그렇게 그를 노려보는 데 갑자기 내면에서 분노의 불꽃이 터지며, 그녀는 그가 빼앗아간 정체성을 되돌려 받았다. .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한편 드라마에서는 찰리가 베커의 집을 찾아갑니다. 베커는 커피를 마시며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난 누구예요?" "질문은 한 번에 하나씩만" 베커는 찰리를 자신의 집 안으로 데려가고, 베커만 다시 나와 정원에 두고 간 커피와 커피잔을 들고 다시 들어갑니다. 문이 닫히고 드라마는 끝납니다.)  5. 각색에서의 차이/베커라는 캐릭터의 기만성/영국작가의 시선으로 본 분쟁/이 모든 게 결국 사랑때문이라고? 그렇다고 영국작가가 편의적으로 말하는 것이 정당한가? 출처: <https://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29657981&articleid=13&referrerAllArticles=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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