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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철

구본철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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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Books ・ 2013

Avg 4.0

어떻게 쇼펜하우어는 중년남성의 최애 철학자가 되었는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엄마는 칸트, 아빠는 쇼펜하우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칸트의 규칙적이고 도덕적인 일화를 보자마자 경외감을 느낄정도로 도덕적인 엄마가 생각났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이고 비관적인 인간관을 보자마자 인간 종을 혐오하는 아빠가 생각났다. 최근에 아빠 차를 타고 본가에 올라가면서 당신께서 젊을 적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감명깊게 읽으셨다는 말씀을 듣고 내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이제 엄마가 순수이성비판을 읽었는지만 확인하면 된다. 공교롭게도 쇼펜하우어는 칸트를 다룬 시를 쓸 정도로 자신이 칸트철학을 잇는 적통이라 여겼다. 그는 사이비철학자 헤겔이 칸트의 철학을 왜곡했다 비판했는데,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혐오한 헤겔과 그 둘 다 칸트 철학에서 출발했음을 알려준다.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싫어한 헤겔과 그는 둘 다 칸트 철학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생처럼 사상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그의 일생을 아는 것은 - 모든 철학이 다 그렇지만- 도움이 된다. 화려한 데뷔 후 일생에 걸쳐 학문적 명성을 떨친 헤겔과 달리 고독한 삶을 지냈다. 어머니와는 절연했고 학계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헤겔리안인 마르크스가 사회학, 역사학에 큰 족적을 남긴 것처럼 헤겔은 큰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성이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역사, 자신 속의 타자를 발견하고 대립하면서 발전하는 변증법, 공동체, 절대정신, 그런 것들. 그에 반해 쇼펜하우어는 작은 주제인 인간 이해를 다룬다. 칸트가 물음표로 남겨둔 물자체를 쇼펜하우어는 의지로 파악했다. 식물이 태양을 향하는 것, 돌이 땅으로 떨어지려는 것, 동물이 생존과 종족번식 모두 단일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의지의 산물인데, 그러한 점이 인간만이 자신을 추동하는 의지라는 힘을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러한 의지는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만 욕망은 절대로 충족될 수 없다. 충족된 욕망은 다른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충족된 욕망은 권태를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고통을 낳는다. 그러므로 행복은 역설적으로 의지의 단절에 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개념에서 나아간 프로이트가 심리학을 연구한 것, 많은 문학가들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것 또한 그가 이러한 인간 이해에 많은 성취를 남겼음을 방증한다. 한 줄로 헤겔과 쇼펜하우어의 차이를 요약하자면, 헤겔은 공동체를 향한 구심력, 쇼펜하우어는 고독으로 침잠하는 원심력을 담당한 것이다. 비사교적이고 우울한 쇼펜하우어의 일생에 참으로 어울리는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철학이다. 그들의 일생을 보면 그 두 사람이 서로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다. 오랜 무명을 뒤로하고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의지철학이 인정을 얻게 된 계기는 다윈의 진화론과 공통점이 알려지면서였다. 자연선택 개념과 의지의 유사성이 드러나면서 이 어둠 속의 철학자에게도 빛이 들기 시작했다. 진화론을 포함해 많은 과학적 심리학적 연구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지하는 것은 꽤 놀라운 일이었다. 토마스 만이 그를 미래적이라 부른 것은 그 자신도 예기하지 않은 통찰이었다. ‘세계는 수많은 의지의 투쟁공간이다. (유전자 사이의 투쟁, 사회 속 인간들의 투쟁, 모든 고등 생명체에게 나타나는 집단 따돌림과 전쟁과 폭력) 인간의 고등 지성은 의지의 발명품.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를 지성을 통해 자각할 수 있다. (인간의 지능이 생존에 유리했던 이유.) 개별 개체는 단일 의지의 개별화이다. (생물학적 개체는 단일 유전코드를 따르는 유전자의 껍데기) 행복은 의지의 충족이 아니라 단념에 있다. (선진국 소득수준의 증가에 반비례하는 행복도. 상업 자본주의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신경전달물질 수용체의 민감도 감소. 행복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선천적 유쾌함.)’ 좋아하는 작가인 우엘벡은 쇼펜하우어와 콩트의 영향을 받았다. 콩트는 내가 아직 안 읽어서 모르겠고, 쇼펜하우어의 흔적이라면 다음과 같다. 합리적인 개인을 바탕으로 하는 자유주의는 기만이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는 자본적 착취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이유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개인(의지)의 투쟁공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직 나보다 위에 사람이 있을 때 평등을 외친다. 그가 본질적으로 바라는 것은 타인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다. 68혁명과 페미니즘이 요청한 성적 자유주의는 또 다른 기만이다. 합리적인 개인이 자유로운 성을 통해 인류 전체의 쾌락을 늘린다는 사상은 큰 실패였다. 왜냐하면 성적 공간에서조차 개인들은 투쟁을 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잘생김이 성적 자본, 우월의 척도가 되면서 자본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외현상이 발생한다. 그는 이를 투쟁영역의 확장이라고 표현한다. 서유럽에서 자본주의 투쟁에서 밀려난 약자들에게 복지혜택을 통해 죽지만 않게 만드는 것처럼 성적 자유주의 체제에서도 볼품없고 못생긴 개인들에게 성산업을 통해 외롭게 자위행위만을 허락하는 것이다. 성적 자유주의는 성적 의지를 자극하여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확장을 통해 인간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요지이다. 이처럼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개별적이고 심리적이고 근원적이다.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 지금 당장 피부를 느낄정도로 구체적이기도 하다. 우엘벡이 말하는 소비자본주의와 성적 자유주의가 바로 그러한 의지의 폭발이 아닌가? 어쩌면 중년남성이 쇼펜하우어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 점에 있을 것이다. 사회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나이, 인간은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등쳐먹을 준비를 하는 동물, 행복은 사회적 아웃풋보다 해석을 하는 우리 뇌의 메커니즘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살면서 피부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읇조린다. 역시 쇼펜하우어가 옳았어, 하고. 나는 차 안에서 아버지에게 이기적 유전자, 고등 동물의 집단 괴롭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역사는 진보적 발전이 아닌 투쟁영역이 모습을 바꿔간 것일 뿐이고 인간을 가장 많이 죽인 동물은 다름아닌 인간이라고. 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체의 고등지성이 자신의 의지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 쇼펜하우어의 여성혐오는 그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계기였다. 모친과 사이 안 좋아서 여성을 혐오하게 된 인간이 여동생이랑은 서로를 아끼는 사이였다는 걸 보면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좁은 세계관과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걸 깨닫는다. 쇼펜하우어 바로 그가 그러한 편견과 색안경을 버리라고 한 사람이라는 것이 우스꽝스러운 아이러니다. 말년에 자신의 책이 사교 여성계에서 큰 인기를 얻고나서 자신의 생각에서 일보 후퇴하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