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zerkalo

Providence
Avg 3.5
Dec 24, 2023.
현실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창작은 결코 어두운 현실로부터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 회한과 죄책감으로 가득 찬 말년 노인의 복합적인 창작 속 세계와 그곳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유려하게 시각화하는 감독의 연출이 감탄스러운 한편, 결국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시 도피를 택하는 노인을 비관하는 냉정한 시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섬뜩함을 남긴다. + <프로비던스>는 구조/형식적 측면도 굉장하지만, 주제가 워낙 씁쓸해서 그런지 스토리에 대해 더 살펴보고 싶은 작품이다. 데이비드 린치와 찰리 카우프만의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이 어두운 영화의 80%가량은 초반부터 드러나듯 병들어 죽어 가는 노인 클라이브 랭엄이 쓰고 있는 소설, 즉 창작 속 내용이다. 달리 말하면 그의 망상이다. 현실의 논리적 인과 관계가 작동하지 않는 그 망상 속 세계에선, 클라이브의 상념을 지배하고 있는 여러 기억과 감정들이 혼재한 채로 인물들에게 반영되고 있다. 클라이브의 이러한 망상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끼친 현실의 사건은 바로 아내 몰리의 자살이다. 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았던 몰리는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했으며, 이를 발견한 클라이브는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죽었다는 죄책감에 빠져들어 있다. 몰리는 클라이브의 망상 속에서 같은 외모와 같은 시한부 설정의 캐릭터 헬렌으로 등장하는데, 그곳에서 헬렌이 케빈에게 자신이 클라이브에게 당한 모욕에 대해 개탄하는 장면으로 미루어 보아, 클라이브는 생전의 몰리에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클라이브는 그 사건으로 인해 아들 클로드가 자신을 경멸하고 있다고 여긴다. 클로드는 망상 속에서 무자비한 검사로 등장하며, 법정에서 케빈을 살인죄로 몰아간다. 물론 케빈은 클라이브 본인의 투영이다. 케빈이 법정에 서게 된 이유는 그가 병들고 다쳐서 죽기 직전인 한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노인의 죽음은 현실에서 몰리의 죽음에 대응한다. 클라이브는 자신의 망상 속에서 클로드를 악인으로 조각하며 죄책감을 지우려 애쓴다. 클로드가 아버지, 즉 자신을 능욕하는 말을 할 때마다 아내 소냐 등 주변인의 입을 통해 자신을 변호한다. 더 나아가 피도 눈물도 없는 클로드에게 애정이 식은 소냐의 마음이 케빈으로 향하게끔 한다. 그런 방식으로 클라이브는 자신의 죄를 묻는 클로드에 맞서 자신의 편이 한 명이라도 더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 봤자 현실의 자신을 억누르는 죄책감은 오히려 더 강해질 뿐 사라지지 않는다. 창작 속에서 실제 감정을 부정해 보지만 이는 도리어 더 선명해진다. 망상 속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군인들이 점차 조여 오듯, 불안감은 더 커져만 간다. 끝내 구석에 몰리게 된 케빈은 클로드의 총에 맞아 죽으며,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소냐는 이를 막지 못한다. 클라이브의 망상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채 그렇게 끝이 난다. 그는 현실을 견디지 못해 창작으로 도피했지만, 그곳에서 더 참담한 최후를 맞는다. 그 장면 이후 내내 어둡고 회색조였던 배경은 온데간데없고 맑은 햇살이 내리쬐는 현실이 등장한다. 그날은 클로드와 소냐, 케빈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는 클라이브의 78번째 생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망상과는 정반대로 현실의 클로드와 소냐는 아주 화목해 보이며, 클로드에게선 클라이브를 향한 증오의 감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클라이브를 탓하지 않았고 자신도 상처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 함께 식사를 하던 도중 카메라는 클라이브의 저택 주변 아름다운 숲의 풍경을 긴 패닝으로 담는다. 그곳에서 클라이브의 망상을 지배하던 암울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애써 유쾌한 모습을 보이던 클라이브는 이를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는지, 이제 그만 가 달라며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한다.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자신의 감정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는 자신의 망상과 정반대인 밝은 현실을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한다. 현실에서 벗어난 그는 다시 그의 창작 속으로, 망상 속으로 도피할 것이다. 떠나 달라고 말하기 직전 그는 아들들과 소냐에게 "너희들의 앞날을 위하여.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단다. 우리는 다 그렇게 믿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또다시 침상에 누워 고통을 계속해서 호소하며, 또 와인을 계속해서 들이마시며 지독한 망상을 이어나갈 그가 정말로 그렇게 믿었을 리 만무하다. 그 답답한 생활이 지속될 그의 저택의 명칭은 다름 아닌 영화의 제목 '프로비던스(섭리)'였음이 오프닝에 등장한 바 있다. 창작으로의 도피를 선택한 그는 그렇게 외롭고 비참한 최후라는 섭리에 스스로 갇히고 만다. 홀로 남아 저택으로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롱 쇼트로 바라보는 카메라엔 일말의 연민도 담겨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