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1장 오스만국가의초창기
더 살펴보기 / 변방의 영웅 서사시
2장 고전 시대(1450~1550년대)
더 살펴보기 / 이베리아 유대인의 오스만 제국 이주
3장 분권화의 시대(17~18세기)
더 살펴보기 / 카드자델리 운동
4장 동방 문제의 대두
더 살펴보기 / 퀴?g 카이나르자 조약
5장 탄지마트의 국가 개조
더 살펴보기 / 탄지마트 시대의 개혁 관료
6장 압뒬하미드 시기의 무슬림 내셔널리즘
더 살펴보기 / 선교사들의 관점 헨리 해리스제섭
7장 20세기 초 청년 투르크 집권기
더 살펴보기 /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와 종교
맺음말
주석
참고 문헌
더 읽을거리
용어 사전
오스만 제국 시대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
이은정 · History/Humanities
24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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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지금 무슬림-기독교인 사이에 존재하는 적대감은 적지 않다. 이 해묵은 불편감은 21세기의 이라크 전쟁에서 ISIS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크게 악화된 것이지만, 19세기 이슬람권의 역사 전체를 통해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서 이미 쌓여 온 집단 감정 위에 쌓아 올려진 것이라 더욱 휘발성이 강하다. 무슬림과 비무슬림 신민들 모두에게 정당성을 인정받고 다양한 인구의 공존을 이루어 내는 데 상당히 성공했던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오랜 시간에 걸친 서구적 근대성의 지배에 의해 참혹하고 폭력적인 단절과 분리로 끝난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은 우리가 막연한 이슬람 공포증에서 벗어나 ‘문명의 충돌’로 이해하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갈등들을 좀 더 쉽게 극복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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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 of Contents
Description
■ 오스만 제국 안에서 무슬림-기독교인이 공존하다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는 아직도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주제이고, 모든 관련 사항을 정면으로 다루기에는 껄끄러운 주제이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성역 없이 탐구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을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매우 핵심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오스만 제국 시대뿐 아니라 그 이전의 여러 무슬림 제국들은 기독교인으로 대표되는 비무슬림들과의 공존을 실용적으로 이루어 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인구의 과반수가 기독교인이었던 발칸반도에서 기독교인 공동체에게 교회를 통한 자율을 보장해 주었다. 비록 17세기 경건주의 카드자델리 운동 당시에 종교 집단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그것이 종교 간 공존의 기본 바탕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18세기에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기독교인 엘리트의 지위가 크게 상승해, 이들은 금융과 상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제한적이지만 관직에도 올라 오스만 정부와 돈독한 협력 관계에 있었다.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자리 잡은 총대주교청의 권위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더 안정되었다.
■ 유럽 제국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기독교인 갈등을 어떻게 격화시켰는가
그러나 오스만 무슬림과 기독교인 사이에 있었던 평화 공존의 기조는 오스만 제국의 ‘긴’ 19세기(1774~1922) 동안 많은 사건이 누적되는 가운데 형성된 상호 인식과 집단 감정으로 인해 무너졌다. 유럽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입지에 섰고, 오스만 제국을 보호하고 개혁을 지지한다는 미명 아래 오스만 기독교인의 추가적인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국내적으로는 유럽의 경제적 침투가 가시화되고, 내국인 기독교인이 부를 향유했으며 선교사들도 현지 기독교인에게 기술, 교육, 경제 면에서 혜택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탄지마트 개혁 시대에 중앙 정부가 유럽 외교관의 요구에 순순히 따르는 모습은 무슬림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당시 무슬림들은 군과 관료계 외에는 좋은 직업을 얻지 못했는데 설상가상으로 크림반도, 카프카스 지역 그리고 발칸반도로부터 많은 무슬림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와 큰 고난을 겪었다. 이 가운데 무슬림들은 이슬람 제국 안에서 자신들이 2등 시민이 되어 역차별 당하고 있으며 온당한 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했으므로,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1870년대부터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격화된 상황은 크고 작은 영토 상실을 거듭하게 만들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오스만 제국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 과정은 오스만 무슬림들에게는 극단적인 공포의 연속이었다.
무슬림들의 이러한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것은 그들의 정체성의 구심점이었던 이슬람에 대한 폄훼과 멸시, 희화화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유럽에서 이슬람은 만만한 조롱거리였고 그 후에도 근대성과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부분들이 과장되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은 무슬림에게 버릴 수 없는 종교적 정체성이므로 이는 이슬람권에서 내셔널리즘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 터키의 서민층에게 종교적 소속과 실천이 중요함은 물론 세속주의 지식인도 전혀 종교적 실천을 하지 않으면서도 종교적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살펴볼 때 무슬림과 기독교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 관계의 기복이 있었지만 대체로 공존하고 협력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국가 존립의 위기감과 공포 속에서 이 협력 관계가 추방, 강제 이주 그리고 학살로 파탄에 이르렀다.
역사학자 마셜 호지슨에 따르면 역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 유용하다. 특히 한국의 교양 대중은 식민 지배를 겪은 경험으로부터, 유럽의 근대성에 감탄하고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한편 유럽의 제국주의와 경제적 침탈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 오스만 무슬림의 입장과, 수백 년간의 오스만 지배에서 벗어나 유럽으로부터 도래한 근대적 비전에 입각하여 독립을 얻고 싶어 한 오스만 기독교인 집단들의 입장을 똑같이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우리는 오스만 무슬림, 오스만 기독교인, 더 나아가 유럽 열강의 외교관이나 선교사 등 당시의 역사를 살아간 집단들 중 하나에 동일시하여 한쪽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쪽의 입장을 죄악시하지 않고 전체를 바라보는 종합적인 이해를 했을 때, 왜 중동의 서구화된 무슬림 세속주의 지식인들이 종교를 독실하게 믿지 않으면서도 이슬람에 입각한 정체성을 꼭 붙들고 있는지, 왜 공화국 시대의 미국인 선교사들이 선교를 접고 교육 사업에만 집중했는지, 관련된 각 집단에게 역사의 불편한 대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기피해 왔는지 같은 여러 의문들에 깊이 있는 답이 주어질 것이다.
지금 당장 가시적으로 눈에 띄는 끔찍한 국제 테러리즘의 악행을 비난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서구적 근대성의 지배가 중동에서 얼마나 편파적이고 잔혹하게 작동해 왔는가에 대한 성찰이 깊이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이른바 ‘문명의 충돌’로 이해되고 있는 많은 갈등들이 좀 더 쉽게 극복되지는 않을까. 아민 말루프는 무슬림 과격분자들이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짓밟히고 조롱당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서, 요즘의 테러리스트를 이해하려면 이슬람의 역사 전체를 아는 것보다 식민주의의 역사를 아는 게 더 도움이 된다고 설파한다. 적어도 그런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중동 지역에 대한 섣부른 기독교 선교를 자제할 것이며, 중동의 무슬림-기독교인 관계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를 더 자극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흑백 인종 관계에 대한 것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은 무슬림-기독교인 관계에서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우리는 형제로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게 안 되면 바보로 남아 모두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본문 중에서
출간사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21세기를 맞아 창의적인 인문학 연구를 고취하고 인문학의 연구 성과를 대중과 소통하여 그 내실을 다지며 사회와 현실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시선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옛것을 거울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되살리고 변화하는 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문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심화된 교양과 고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다. 인문학 의 위기를 걱정하고 그 미래를 고민하며 시대를 헤쳐 나갈 인문학의 지혜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은 많아졌지만 정작 ‘대중인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저술들은 턱없이부족하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창의적 학술성을 지닌 인문학적 지식이 가독성과 깊이를 겸비한 저술을 통해 학계 및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이를 위해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창의적인 인문학 주제들을 발굴해 내고 인문학 스스로 대중 및 사회와의 접점을 능동적으로 찾아나가는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대중과 함께하는 인문학의 향연”이라는 취지에서 2010년 시작된 ‘서울대학교 인문강좌’의 성과를 저술로 묶어 낸 것이다. 서울대 인문강의 총서는 교양서와 학술서라는 진부한 이분법에서 벗어나 품격 있는 고급 교양서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의 소장 교수들이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문사철(文史哲)의 경계를 넘나들며 최고의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펼쳐 보이고자 한다.
서울대인문강의위원회



박성준
5.0
191027 이슬람 내셔널리즘이라는 개념이 새로웠다. 늘 느끼는 것인데 중동사는 특히나 관점이 중요한 지역사인 것 같다. 그만큼 상당히 조심스러운 분야이기도 하다. 인상적이었던 구절 하나를 기록해두자면, '...당시의 역사를 살아간 집단들 중 하나에 완전히 자기 동일시를 하여 한쪽을 정당화하거나 다른 쪽의 입장을 죄악시하지 말아야한다. 전체를 바라보는 종합적인 이해를 했을때, ... 관련된 각 집단에게 역사의 불편한 대목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기피해왔는지 같은 여러 의문들에 대해 깊이 있는 답이 주어질 것이다.' 230519 종교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지만, 기본적으로 오스만 제국 후기사를 상세히 들여다 본다. 교양 강의처럼 매우 친절한 서술에 '더 읽을거리'가 꽤나 알찬 책이다. 이하는 기록용 단상... 이슬람은 종교를 넘어서 생활을 유지하고 세계를 인지하게 하는 일종의 총체적인 태도나 감각으로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 무슬림과 투르크 기독교인 사이의 인구 교환 : 권역의 민족 정체성이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이 실은 종파적 정체성이 다시 쓰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밀레트(Millet)라는 어휘의 의미가 '종교 공동체'에서 '민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병역의 의무와 관련해서, 말 그대로 피를 흘릴 권리를 쟁취하고자 시도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물론 비단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만 드러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근대의 문제도 재밌다. 서구에서 만들어진 그것을 지나치게 빨리 적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초기의 어그러짐이 모든 걸 망친 걸지도 모른다는 진단... 하지만 19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근대라는 현상의 성격을 서구적이라는 틀로만 해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는다.
페리클레스
4.0
3️⃣ pp.25~26 14세기의 100년 동안 오스만 국가의 기독교 지역에서의 거대한 팽창은 오스만 국가가 군사적으로 탁월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인 엘리트와 민간인을 포섭하는 데서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창업 군주 오스만 당시부터 기독교인 농민은 보호의 대상이었고 주변의 기독교인 영주들과는 우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졌다. 오스만 치하에 새로이 들어간 땅에서는 이전의 발칸 국가들에서보다 훨씬 낮은 세율이 적용되었고, 기독교인 엘리트 전사들에게는 오스만 국가의 팽창과 건설 과정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봉급 대신 수조권이 딸린 토지 (티마르)를 받은 오스만 기병들 가운데는 15세기 전반까지도 흔히 기독교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초기 오스만 집단이 많은 기독교인을 수용했다는 것은 오스만 국가 건설의 추동력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과연 이처럼 기독교도에게 수용적인 집단이 이슬람교의 성전사(gazi)로서의 정체성을 가졌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아나톨리아의 가지들이 이슬람에 대한 열정과 동시에 기독교에 대한 포용성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보며, 일부 다른 학자들은 그런 경우 '성전사'라는 것은 그저 겉으로 종교적 명분을 강화하기 위한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는 그저 약탈과 정복을 목표로 했다고 주장한다. 발칸에의 눈부신 팽창은 물론 중앙 정부의 군사적 기획 덕분이기도 하지만 발칸에 진출한 변방 무슬림 전사들의 자발적인 약탈 전쟁 수행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들은 변경에서 넓은 토지를 차지하고 많은 기독교인 노예를 잡아 팔았으며 군사적 팽창을 계속했다. 이러한 가지들의 발칸반도 정착은 대체로 수피 회관(zaviye)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음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비록 많은 싸움과 약탈이 있었지만 이들은 정복지의 기독교인과 기독교 습속을 배척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느슨한 수피즘 안으로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수피즘이 기독교적 습속을 상당 부분 용인했던 점은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쉽게 해 주었다. 오스만 제국 초기의 기독교인 포용 현상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고, 초창기 이후에도 발칸반도에서는 종종 같은 성자묘가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에게 공히 참배의 대상이 되곤 했다. 발칸반도에서 있었던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이지만 개종자의 다수가 자발적으로 개종했다는 점은 이와 같은 성공적인 통합에 힘입어서였을 것이다.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원래의 종교를 유지한 대다수의 비무슬림들도 오스만 치하에서 상당히 안정된 삶을 영위하면서 제국의 질서 안에 순응해 갔다. 5️⃣ 이베리아 유대인의 오스만 제국 이주 오스만 제국 전성기의 종교적 관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 흔히 언급되는 것이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오스만 제국이 허락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오스만 영토 안에는 비잔티움 이래 지역 내에 항상 존재해 온 요소였던 유대인들이 있었지만 이베리아 유대인들은 유대인 집단 안에서 번영하며 점점 다수를 차지하고 주도권을 잡았다. 이베리아의 유대인들이 추방과 동시에 한꺼번에 오스만 제국으로 몰려든 것은 아니고,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등 여러 중간 기착지를 경유하여 수십 년에 걸친 방랑 끝에 오스만 제국으로 가게 된 경우가 많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먼저 오스만 영토로 이민해 간 이주민들과의 편지 왕래를 통해 그곳의 상황을 전해 듣고 이주를 결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동시대의 유럽 여러 나라에 비해 오스만 제국은 확실히 유대인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 유대인들은 오스만 영토 안에서 원하는 곳에 거주하고 원하는 직업을 갖고 여행의 자유를 제약받지 않고 자기들의 종교, 교육, 사회적 관행에 대해 정부 당국이 제한을 거의 가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와 같은 자유에 더하여 오스만 제국이 성지 예루살렘에 가까웠고 1516년 시리아 지역을 맘루크 술탄국에게서 빼앗아 성지를 영유하게 된 것도 유대인들에게 오스만 제국의 권위를 드높였다. 특히 1536~1542년에 걸쳐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한 쉴레 이만 대제는 유대인들로부터 대단한 명망을 얻었고, 고전 시대의 유대인 공동체는 오스만 국가에 대해 전반적으로 감사와 충성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고전 시대 오스만 위정자들에게도 유대인들은 생산적인 도시민으로서, 그리스인이나 슬라브인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좀 더 믿을 만했기에, 발칸과 아나톨리아로 팽창하는 가운데 정복지의 도시를 재건할 때 유대인들의 비중을 높이려고 일부러 유대인들을 더 많이 이주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유대인은 오스만 전체 인구에서 1퍼센트 내외의 매우 작은 비중밖에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1470년대 이스탄불에서는 유대인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높이려는 정책에 따라 40여 개 도시로부터 사민(使民)되어 인구의 10퍼센트가 넘었고, 1492년 이후 많은 이베리아 유대인들이 오스만 영토로 들어오자 이들은 이미 개발된 수도보다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경제적으로 개발하는 데 동원되었다. 즉 새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테살로니키, 테살리아의 티르칼라, 모레아의 파트라스 등에 정착하도록 유도되었고 세금 감면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특히 모직물 공업으로 유명했던 테살로니키는 새로 이주해 들어온 유대인 인구가 과반수를 이룬 특이한 도시로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마지막으로 떨어져 나간 1912년까지도 유대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정확한 통계 수치를 제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학자들은 아마도 오스만 제국 치하에 있었던 유대인 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베리아 출신의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기술과 특수한 전문성을 가지고 와서 더욱 환영받았다. 유럽의 발달한 의학 지식을 가져온 유대인들은 의사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물론이었고, 궁정의 어의로도 자리잡았다. 이들은 스페인에 있었을 때도 세금 행정, 국제 무역, 은행업 등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추방과 지리적 확산은 이들을 더욱더 넓은 범위에서 무역과 은행업에 종사하게 만들어 큰 부를 축적하게 해 주었으며,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세금청부업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유대인들이 이 당시 가져온 기술 가운데는 (무슬림들이 고전 시대에 활용하지는 않았지만) 인쇄술도 있었고 광산 개발, 직물 제조, 무기 제조에 쓰는 신기술들도 있었다. 비록 유대인들은 중앙 권력이 제국의 질서를 보장했던 고전 시대가 지나고 나서 혼란기에는 자체적 방어 능력과 위계적 조직이 취약한 소수 집단의 한계 때문에 상대적으로 쇠락하게 되고 새로 세력을 확장한 그리스인 파나리오트 집단에게 밀려나지만, 고전 시대 오스만 제국에서 다양성의 공존과 번영을 보여 주는 명백한 예이다. 8️⃣ 카드자델리 운동 카드자델리 운동은 17세기의 각종 정치, 군사, 사회 부문에서의 위기에 흔들리던 이스탄불의 불안한 사회상을 반영하는 대중적 종교 운동이었다. 오스만 제국에 불어닥친 다양한 풍파가, 오스만 사회가 종교적 정통으로부터 탈선했기 때문이라는 전제 아래 일어난 이 운동은,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에 나타난 일련의 새로운 풍습과 관행들을 모두 불필요한 새로운 풍속(bid'at)으로 규정하고 난폭하게 거부했으며, 이 운동의 목적은 이슬람을 꾸란과 예언자의 관행(순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필요하다면 폭력도 동원하여) 정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운동의 이름은 17세기 초의 유명한 설교자 카드자데 메흐메드 에펜디(Kadizade Mehemd Elendi, 1635년 사망)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서북 아나톨리아의 발르케시르 출신으로 고향에서 종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의 스승 가운데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보수 종교학자 비르기위 메흐메드 에펜디(Birgivi Mehmed Elendi, 1573년 사망)의 제자도 있었고, 그는 비르기위의 학맥을 따라 몽골-맘루크 전쟁 시기에 살았던 가장 원칙론적인 한발리 법학파의 법학자 이븐 타이미야(libn Taymiyya, 1328년 사망)의 영향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야소피아 모스크 같은 큰 왕립 모스크에서 설교자로서 강연을 하면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당시 대표적인 수피였던 할웨티(Halvelli) 교단의 시와시 에펜디(Sivasi Efendi, 1639년 사망)와 각종 사회적, 종교적 이슈에서 논쟁에 들어갔고, 이는 당시 사회에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논쟁의 초점이 된 이슈들을 3개 범주로 나눌 수 있는데 1. 수피 사상과 실천: 음악을 동반하고 빙빙 도는 춤 등의 동작을 동반한 수피 의례들이 샤리아의 견지에서 합법적인가? 2. 신학과 예배: 기도에 곡조를 붙여 읊는 것이 옳은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부모는 불신자였는가? 범신론적으로 보이는 '모든 존재가 하나'(wahdetul-wujud)라고 주장한 유명한 수피 성인 이븐 알 아라비Ibn al-'Arabi 1240년 사망)는 불신자로 간주할 만한가? 알리의 아들 휘세인을 죽게 만든 야치드를 저주하는 것이 옳은가? 성자묘를 참배하는 것은 옳은가? 예언자 무함마드 이후에 나타난 신풍속들을 거부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가? 3. 사회 현실 문제: 커피와 담배 같은 기호품은 금지되어야 하는가? 뇌물을 받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배 후에 사람들이 서로 절하고 손에 입을 맞추는 등의 인사는 허락된 것인가? 등의 크고 작은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 대부분에 대해 카드자델리는 종교적인 원칙론에 철두철미하게 집착하는 관점을 가지고, 기존에 사회 내에 지배적이었던 통념에 반대했다. 그의 논쟁들은 당시의 가장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을 살짝 비껴서 사회 안의 덜 위험한 과녁들을 겨냥하는 것이었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하는 설교와 강연에서 주장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종전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갖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던 일반민을 고무하여, 그들을 꾸란에 설파된 권선징악(amr bil-ma'ruf wa nahy 'anu'l-munkarr) 의무를 실천하는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특히 지지자들 가운데 시장의 상인과 수공업자가 많았다는 분석이 최근에 나와 주목된다. 이 운동은 대중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과 더불어 궁정에서도 후원을 얻었으며 1633년 이스탄불에서 큰 화재가 일어난 후 커피점과 흡연에 대한 금령이 나온 것이 이 운동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1635년 카드자데 메흐메드 에펜디가 죽은 후에도 그의 일파였던 설교자들이 샤리아의 견지에서 금지 여부에 논란이 있는 여러 행위들에 대해 그것들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했으며, 그런 행위를 하는 자들을 불신자로 낙인찍었다. 이들에 대한 궁내의 지지자들은 계속 증가하여 1650년대에는 마침내 왕실 하렘의 환관장과 술탄 모후마저도 이들의 지지자가 되었다. 이들은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의례를 거행하는 수피 수도자들뿐 아니라 일반 신도로 수피 회관에 다니는 사람들마저 불신자로 규정했고, 이들과 수피 교단의 싸움은 크게 과열되어 평신도들 사이의 폭력 사태로까지 비화했다. 그리하여 1656년 집권 후 철권 통치로 오스만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려던 대재상 쾨프퀄뤼 메흐메드가 이 운동의 주도자들을 유배 보내면서 이 운동은 소강 상태에 들었다. 그 후 1660년대에 대재상 쾨프륄뤼파즐 아흐메드와의 친분으로 등용된 카드자멜리 성향의 와니 메흐메드 에펜디가 술탄 메흐메드 4세와 왕자들의 스승으로 왕실과 엘리트의 확고한 지지를 얻은 후 카드자델리 운동은 마지막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여러 수피 습속들에 대한 금령이 반포되었고, 제2차 빈 포위의 실행의 배경으로도 작용했으나, 이는 빈 포위의 실패와 패전으로 이어져 카드자델리 운동은 이전처럼 확고한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1690년대에도 카드자델리의 영향력은 수피들과의 충돌 사건 등으로 볼 때, 여전히 일각에 존재하고 있었다. 9️⃣ p.73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프랑스 혁명에서 1차 세계대전까지의 '긴 19세기'를 논한 이래, 시대의 성격과 내용에 따라 유연하게 어떤 특정한 세기를 달력상의 한 세기보다 길거나 짧게 잡는 역사 서술이 흔히 이루어졌다. 오스만 제국사의 19세기는 특히 길게 규정될 만하다. 1774년 러시아와의 패전 조약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은 진정한 의미에서 시대 구분이 되는 분수령이고, 긴 시간에 걸쳐 국가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 개혁 정책, 개혁의 여파로 일어난 사회 갈등, 발칸 국가들의 분리 독립, 1차 세계대전, 독립 전쟁, 공화국 수립 등 거대한 사건들이 서로 연결되어 제국의 멸망(1922)까지 이어진 흐름이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긴 19세기'가 되는 것이다. 예컨대 쉬크뤼 하니올루는 오스만 제국 말기에 대한 개설서를 저술하면서 서술 범위를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국의 멸망까지로 잡았고, 터키의 역사학자 일베르 오르타일르는 명시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19세기 범위를 늘려 잡지는 않았지만 복잡하고도 고통스러운 사회 변화의 시대였던 19세기를 "제국의 가장 긴 세기"라고 불렀다. 🔟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의 여파 퀴칙 카이나르자(Küçük Kaynarca)는 현재 불가리아의 실리스트라주에 속한 카이나르자 Kaynardzha라는 마을의 터키어 지명이다. 이곳에서 1774년 7월 맺어진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은 동방 문제가 본격적으로 심화되는 계기였으므로 오스만-러시아 관계의 큰 전환점이자, 유럽과 중동 관계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구획하는 분수령이었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흑해 북안에 전략적 거점을 마련했고, (한국인에게는 강화도 조약이 생각나게도) 흑해 북안의 타타르를 '독립'시켜 크림 칸국을 가까운 장래에 합병(1783)할 포석을 미리 확보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 얻지 못했던 통상 조약을 처음으로 승인받았고, 러시아 선박은 흑해와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해협을 자유로이 항해할 권리를 얻어 지중해로 진출이 가능해졌으며, 육로로도 오스만 영토에 들어와 통상할 권리를 얻었다. 오랜 적대 관계로 이스탄불에 외교관을 주재시키지 못했었지만 이제 이스탄불에 외교관을 상주시킬 권리를 얻었고, 오스만 제국 내 어디든 원하는 곳에 영사관을 설치할 권리도 얻었다. 이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가 향상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예카테리나 2세는 이 조약에서 얻은 이권의 규모에 크게 흡족했다고 한다. 이 조약에 대한 가장 큰 논란은 이 조약이 러시아에게 오스만 제국의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보호하고 대표할 권리를 주었는가의 문제였다. 흔히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으로부터 그러한 권리를 러시아가 얻어 냈다고 하는 서술이 여전히 개설서와 외교 관련 서적에서 나타난다. 요제프 함머 푸르크슈탈이나 니콜라에 요르 가 같은 유명한 역사학자들도 그렇게 보았는데, 조약 당시 오스트리아의 주 이스탄불 대사였던 프란츠 투구트(Franz Thugut)의 보고서에 의거하여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의 교묘한 외교술에 속아 어리석게 그런 권리를 내주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의 미국인 오스만 사학자 로데릭 데이비슨이 조약문의 공통 원본인 이탈리아어 버전을 분석한 것에 따르면 러시아가 정교회를 보호하고 대표할 권리를 얻었다는 일반적 통념은 당시의 실제 조약 내용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한다. 먼저 조약문 7조에서는 기독교와 교회들을 보호하는 주체가 러시아 정부가 아닌 '오스만 정부'라고 명시되어 있고, 이스탄불에 건립될 어느 교회 하나와 부속 인원들을 대표할 권리를 러시아 공사에게 주며 그의 청원들을 호의적으로 듣겠다고 약속했다. 조약문 14조를 보면, 그 교회에 대한 자세한 사항이 나온다. 이스탄불의 외국인 구역인 갈라타의 베이올루라는 곳에 일반인에게 개방된 '루소-그레카'(즉, '러시아 그리스식') 교회를 하나 지어 러시아 공사의 보호 아래 두며 어떠한 박해도 없도록 하겠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교회가 오스만 제국내에 흔히 있던 동방 정교회였다면 단지 그리스인을 의미하는 '룸'의 교회라고 할 것이었겠지만 특별히 '러시아 그리스식'이라고 한 것은 새로 확대된 통상과 이동의 자유를 가지고 오스만 제국 영내로 들어온 러시아인 상인과 순례자들을 위한 러시아 정교의 교회를 의미하며 그 교회를 러시아 공사가 보호할 권리를 얻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조약문에 의해 주어진 것은 그리스어를 쓰지 않고 교회 슬라브어를 쓰는 러시아 교회를 하나 새로 짓고 그것을 보호할 권리인데, 이로부터 어떻게 오스만 제국 영내의 정교회 신도들을 보호할 일반적 권리가 주어졌 다는 해석이 나올 수 있었을까. 우선 조약문 자체에서는 제16조에서 오스만 제국의 가신국이었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러시아가 대표할 권리를 가진다고 한 내용도 조약을 확대 해석하는 빌미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러시아 측의 의도적 왜곡이었던 것 같다. 데이비슨에 따르면 비록 퀴춰 카이나르자 조약 체결 당시에는 러시아가 이권들의 획득으로 만족했던 것 같지만 1년도 되지 않은 1775년 상반기에 이미 대내 선전의 일환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오스만 제국의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억압과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게 되었다."라고 했고, 1775년 러시아인들이 조약문의 프랑스어 공식 번역본을 만들었을 때 '러시아 그리스식' 교회는 '그리스' 교회로 슬쩍 바뀌었음을 보면, 일찍부터 조약 해석을 왜곡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어 조약문이 유럽 외교가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러시아 측 외교관과 정치가들의 반복된 선전이 1853년 성지 관할 논쟁에서 정점을 찍으면서, 유럽의 각국 정부와 학계에서는 그들의 주장에 근거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퀴췩 카이나르자 조약으로 이어진 긴 교섭 과정 중에 이미 오스트리아 대사 투구트가 러시아의 오스만 정교회 기독교인들을 보호할 권리를 요구하려고 하는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약 체결 후 얼마 안 되어 내용이 아직 공표되지 않았을 때 러시아가 그런 권리를 확보했을 것으로 짐작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썼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유명한 역사학자 알베르 소렐의 <18세기의 동방 문제>(1878)에서 확정된 사실로 서술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러시아의 그런 요구에 오스만 측은 절대 동의할 수 없었고 조약 문건상 오스만 측이 러시아에 그런 권한을 넘겨준 적이 없는데도 유럽인들이 이러한 왜곡된 인식을 오래도록 할 수 있었음은 오스만 제국의 외교적 노력의 산물인 조약 문서가 어이없이 왜곡되어 버리기 쉬웠던 유럽 중심적 국제 관계의 불공평함을 매우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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