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한국시를 우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시인 이수명이 새롭게 정립해본 1990년대 한국시문학사
『공습의 시대』
“1990년대 시들에는 1980년대의 거인과 2000년대의 유령들이 동시에 어른거린다!”
1994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이후 이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시세계를 펼치며 한국시문학사에 독특한 개성으로 자리하게 된 시인 이수명. 그가 새로운 책 한 권을 들고 우리 앞에 등장했다. 이번 책『공습의 시대』는 ‘1990년대 한국시문학사’라는 부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듯, 본격적이고 포괄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던 1990년대 한국시들을 처음으로 정리하고 연구해봤다는 데서 일단 큰 의의를 가진다 하겠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도 15년을 훌쩍 넘긴 시점이지만, 1990년대 시문학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우선, “현재가 과거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가 현재에 의해서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T. S. 엘리엇의 말처럼 현재의 시가 부단히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17쪽
1990년대의 한국시에 대해, 시인 이수명은 “1980년대를 벗어나느라고 1980년대적인 것을, 새로운 것을 추동하느라고 2000년대적인 것을 상상하며 이웃하였다”고 개괄한 바 있다.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시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1990년대 시의 주요한 정향을 살피고 그들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해, 이 책은 동시대에 나온 수백 권의 시집 중에서 1990년대적 새로움을 담고 있는 극히 일부의 시집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어떠한 기준에도 의존하지 않고 이전 시대의 발성이나 호흡과 다른 것을 생성시킨 시집들을 오래 들여다보며 논지를 끌어왔는데, 지금은 중견 시인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들의 첫 시집이 주요 대상이 되었다. (황인숙 시인의 경우만 두번째 시집.)
첫 시집을 대상으로 한 것은 1990년대에 첫발을 디딘 시인들의 최초의 발성 속에 새로운 시도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뤄진 시인은 김기택, 장경린, 함성호, 최정례, 김언희, 진이정, 박상순, 함기석, 강정, 황인숙, 서정학, 허연까지 총 열세 명이다.
1990년대의 시의 특징에 대해서는 몇몇 개괄이 있다. 논자들이 기술하고 있는 1990년대 시는 상당 부분 이와 같이 변화된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깊이나 높이보다는 넓이의 시대인 1990년대에 그동안 잠재적이거나 가라앉아 있었던 개인, 일상, 문명, 여성, 몸, 생태와 같은 담론들이 발견되고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에 주목한 것이다. 그들의 의견처럼 이들 문학 담론의 생성 자체가 1990년대의 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전시대와 구별되는 이러한 다양성이 1990년대의 자리를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21~22쪽
이쯤에서 제목 속의 ‘공습’이란 단어에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왜 1990년대 한국시문학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 ‘공습’이란 용어를 써야만 했을까.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 문학은 매우 거대하고 강고하였으며, 1990년대는 이 강고한 리얼리즘과 싸움을 벌인 끝에 형성된 세계다. 이후 리얼리즘 문학이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 싸움의 효과와 영향은 지금까지 감지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전 시대에 대한 공습을 감행한 것이다. 결국 1990년대를 열어젖힌 시의 힘은 홀로 있는 시들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홀로 싸우며 멀리 나아간 시들, 고립적이고 위태로워 보였지만 그것이 독자적 탐험이 되었던 1990년대의 시들. 2000년대를 사는 오늘의 시인들이 보다 자유롭고 보다 개성적이며 보다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그 시의 확산을 온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데는 앞선 시대의 ‘홀로 있는 시들’의 그 ‘있음’으로 말미암은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보자는 얘기다. 그러니 다시 읽자는 얘기다. 역사는 그렇게 쓰이는 것이고 그래야 다음 역사가 먼 미래에 또 쓰일 수 있으니 아직도 고요한 싸움을 치르는 중인 1990년대 시들과 뒤늦은 만남이라도 이렇게 가져보자는 얘기다.
1980년대의 거인들과 대결하는 작고, 보잘것없고, 더이상 세계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 어떤 역할을, 거대한 감정을 담당해야 할 의무도, 필요도, 가능성도 사라진 시대의 무용한 자아들이 출현하는 시들이어야 한다. 이것이 1990년대 시의 실질적인 출발이라 할 수 있다. -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