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 왔는가?
우리에게 국가란 원래부터 있던 존재이다. 우리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고, 우리의 국가는 ‘주권’을 가지며, 우리의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들이다. 학창시절에 우리가 배웠던 이러한 국가의 3요소는 사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는 현대 국가의 특수한 예일 뿐이다. 폭력과 권력에 대해 지속적인 고찰을 해온 일본의 젊은 철학자인 저자는 국가의 본질을 알기 위해선 우선 그 개념과 탄생 과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국가는)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라는 베버의 정의이다. 고대국가에서부터 현재의 국민국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영역 안에서 폭력을 독점해야만 국가가 성립한다는 정의는 변하지 않는다. 국가를 포함한 정치단체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다종다양하지만, 그 목적을 위해 폭력을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국가를 다른 단체로부터 분리해내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폭력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나 단체의 폭력을 실효적으로 단속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국가란 우리가 생각하듯 주민이나 대중들의 협의에 의해 ‘설립’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대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다. 즉 홉스의 사회계약론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 계약을 지속적으로, 그리고 강제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이미 강대한 폭력을 축적한 절대자(리바이어선)가 먼저 필요하다.
국가와 폭력, 그리고 부(富)의 징수
국가는 폭력의 독점과 축적을 위해 폭력을 조직화(강대한 폭력의 행사를 위한 물적, 인적 자원의 활용)하고, 가공(폭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집단화하는 방식)하는데, 그러한 폭력을 통해 부(세금)를 징수한다. 다시 말해 국가란 독점한 폭력을 통해 부를 징수하고 그 징수된 부를 통해 더욱 강대한 폭력을 축적하는 순환운동이다. 이 운동이 국가의 성립을 떠받치고 있다. 이는 원시적인 국가의 탄생으로부터 얻은 결론이지만, 현재의 국가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본질적인 내용이다. 현재의 국민국가 형태에선 국가의 폭력이 ‘민주화’되었으며, 주민을 억압하는 데에 집중되었던 폭력이 주민의 안전을 위해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폭력과 국민의 안전이 대립하는 경우는 늘 발생하는데, 이는 폭력의 격차와 비대칭(국가와 주민 사이의)이라는 국가의 존립 기반이 본질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국가를 해체함으로써 국가의 폭력에서 해방된다는 낡은 도식을 주장하지 않는다. 어떤 체제에서든(봉건제에서부터 사회주의, 국민국가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독점하려는 일련의 운동은 존재할 것이며, 이는 형태가 다른 국가를 출현시킬 뿐이다. 따라서 저자는 국가의 폭력에 대중들이 개입해야 할 부분을 짚어낸다. 즉 “(국가가 행하는) 폭력의 가공 자체를 어떻게 ‘가공’해 나갈 것인가? 이 물음이야말로 폭력을 둘러싼 정치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줄 것이다.”(77쪽)
국가의 계보학적 고찰
전반부가 국가의 개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라면, 후반부는 국가가 변모해온 역사적 과정에 대한 고찰이다. 앞서 말한 ‘국민, 주권, 영토’라는 국가의 3요소는 역사적으로 국가가 변화할 때마다 추가된 것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던 국가의 요소가 아니었다. 근대에 들어와 확립된 이러한 요소들은 현재의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폭력을 일원화함으로써 주권을 획득하고, 국경선에 의한 영토를 획정함으로써 한 명의 군주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국가 자체의 영속적인 보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폭력을 통해 부를 수탈하는 대상이었던 대중들을 같은 국민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음으로써 내재하던 폭력을 외부로 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서로 본 적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대두된 것이 민족주의이며, 그 상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마침내 제국주의가 등장한다. 이렇게 폭력을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국가) 인종주의가 만들어진다. “이제 전쟁은 수호해야만 하는 군주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는다. 국민 전체의 생존이라는 명제 하에 수행된다. 주민 전체가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서로를 죽이도록 훈련된다. 대량학살은 사활의 문제가 된다. 실로 생명과 생존의, 신체와 인종의 경영 및 관리자로서 그렇게도 많은 정부가 그렇게도 많은 전쟁을 치르고 그렇게도 많은 인간을 죽였다.”(194쪽) 국민국가는 모든 대중들을 국가 폭력의 주체로 바꾸는(국민개병제도 등을 통해)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국가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저자는 마지막으로 이 부분을 고찰한다.
자본주의와 오늘날의 국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특징지어 지는 오늘날의 국가는 과연 어떤가. 자본주의의 팽창기라고 할 수 있는 제국주의, 냉전시대에 국가는 자본과 노동력의 원활한 흐름(들뢰즈는 이를 자본주의의 공리(公理)라고 정의했다)을 위해 적극적으로 국민들의 생활에 개입했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가정의 보호, 고용 정책, 사회 보장제도의 실시 등. 이는 사회주의 혁명이나 대공황 등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왔을 때 더욱 확대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이 영토와 국경을 넘어 움직이며 전 지구적 규모의 이윤을 추구하고, 과학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해 우수한 국내 노동력의 확보가 절실하지 않게 되면서 국가는 영토 내의 주민에 대한 보호와 생존 환경의 정비라는 역할을 점차 줄여나가고 있다. 국가는 몇몇의 엘리트에 의존하며, 대부분의 국민은 비정규직 등의 불안정 고용 노동자가 되어간다. 이렇게 국민과 국가가 괴리되면서 오히려 강조되는 것이 문화나 인종, 국가의 가치 등 민족주의적 요소들이다. 지금 펼쳐지는 월드컵 등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물론 이는 스포츠를 즐기는 국민의 태도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왜 광장은 이럴 때만 열리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가를 자본의 시녀 정도로 생각하고, 국가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국가가 해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저자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국가는 징수되는 부(富)가 생산되는 방식(경제체제)과 물리적 폭력의 행사를 떠받치는 기술(폭력의 조직화와 가공)에 의해 그 형태를 변화시켜 왔다. 국가는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것뿐이다. 따라서 “국가와 자본주의를 동시에 폐지시켜 줄 ‘만병통치약’을 구하는 일은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일종의 후퇴에 불과하다.”(230쪽) 저자는 성급한 국가해체론 같은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작은 국가’야말로 가장 억압적인 국가라고 말한다.(218쪽) 저자는 앞서 국가의 폭력에 대중들이 개입해야 할 부분을 적확하게 짚었듯이 오늘날 자본주의 하의 국가에서 국민들이 개입해야 할 부분도 정확하게 짚어낸다. 자본과 노동의 원활한 흐름, 즉 자본주의의 공리를 둘러싼 소수파(물론 이 말은 단지 숫자의 적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국가 정책에서 소외된 이들을 일컫는다)들의 투쟁이 현재 전체주의로 향하는 국가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