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런 봉투’ 통닭이 ‘치느님’이 되기까지,
우리가 온몸으로 살아온 그 시절의 풍경들
지금의 우리를 만든 ‘결정적 순간들’을 통해
새롭고도 흥미로운 현대사를 읽다
분단, 전쟁, 독재, 국가폭력, 학살…현대사는 이렇듯 크고, 무거운 이미지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책은 치킨, 피시통신, 베스트셀러 등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접하고 즐기는 ‘사소한 것들’을 통해 무겁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현대사를 쉽고 재미있게 들려준다.
‘사소한 것들의 현대사’는 여성, 엘지비티(LGBT), 탈모인 등 소수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기도 하다. 예컨대 이 책은 생리를 ‘맑고, 깨끗하게’만 그렸던 생리대 광고, ‘모든 여자는 공주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던 화장품 광고의 변화를 통해 여성 인권의 변화를 읽는다.
‘사소한 것들의 현대사’를 통해 우리의 오늘을 만든 36개의 ‘결정적 순간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롭고도 흥미로운 현대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매혹시킨
추억 속 ‘사소한 것들’
이 책은 1988년부터 축적된 <한겨레> 아카이브를 활용해, 김태권 만화가를 포함한 전문가 19명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36가지 키워드에 관해 쓴 현대사 콘텐츠를 묶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해 2020년 5월부터 2021년 3월까지 <한겨레>에 연재된 ‘시간의 극장’ 프로젝트를 수정?보완했고, 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비컷 사진을 포함한 도판 160여 장이 수록돼 있어 시각적으로도 시대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장 는 치킨, 피시통신, 봉준호와 박찬욱의 영화 등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매혹시켰던 추억 속의 ‘사소한 것들’을 통해 지금의 우리를 말한다.
이를테면 이 책은 우리가 모두 좋아하는 ‘치느님’을 통해 음식 문화의 다양성 부족을 짚는다. ‘전설의 투수’ 김태원이 차린 치킨집이 망한 일화를 통해 치킨 시장의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준 뒤 경쟁 과열의 근본 원인이 몇몇 업체의 닭고기 독점에 있음을 지적하는 식이다. 김태권 만화가는 이 때문에 몇몇 업체가 우리의 입맛을 지배하고, 미식의 기본인 맛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못한다고 꼬집는다.
피시통신을 통해서는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유니텔 등이 대중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엽기적인 그녀> 《퇴마록》 《드래곤 라자》 등 당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작품이 피시통신에서 시작됐고, 피시통신을 소재로 한 <접속>도 큰 인기를 누렸다. 특히 피시통신 동호회에서 활동을 시작한 조피디, 가리온, 버벌진트 등은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한국 사회의 대중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장 은 노무현, 김대중, 노회찬 등 정치인들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주요한 정치적 사건들의 이면을 살펴본다.
이 책은 김대중을 우리가 평소에 잘 주목하지 않던 ‘국제 정치인’이라는 측면에서 돌아본다. 빌리 브란트?지미 카터?프랑수아 미테랑 등 온 세계가 ‘김대중 살리기’에 발 벗고 나선 사실, 김대중이 “서구가 아닌 아시아에서도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신념을 품고 이를 실천하려고 했던 사실을 짚으며 ‘국제 정치인’ 김대중을 말한다.
한국전쟁처럼 거대한 사건은 전쟁에 휘말렸던 평범한 개인들의 이야기로 풀어간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 전쟁포로 중 대만으로 갔던 이들이 국민당 정부에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 “주더와 마오쩌둥을 죽이자”라는 ‘반공문신’을 새기고 살았던 일화, 전쟁포로들끼리 ‘반공’과 ‘친공’으로 편 가르기를 강요당하며 끝내는 서로 죽이기까지 했던 일화를 통해 시대의 상흔을 응시한다.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의
가려진 목소리를 듣다
3장 에서는 강남 아파트, IMF 등의 키워드와 삼성, 현대차, 에스엠 등 한국 대표 기업들의 발자취를 통해 지난 시대를 돌아본다.
과거 ‘잊을 만하면 물난리 나던 동네’였던 강남의 아파트는 교육열과 자산가치 상승에 대한 기대감, 편리한 교통 등에 힘입어 1980년대부터 가격이 치솟았다. 그러나 강남의 눈부신 성장을 위해 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인프라를 구축했고, 이는 다른 지역의 기회를 박탈한 것이라는 점에서 “강남을 살기 편한 동네로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 전체가 비용을 지불했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에스엠과 이수만’ 편은 오늘날 한류의 중심에 있는 케이팝이 수많은 의심과 편견에 맞서 싸워왔음을 보여준다. 1세대 아이돌 에이치오티는 ‘기획상품’ 논란에 시달렸고, 이들을 키운 스타 시스템이 청소년 문화를 획일화한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오늘날에는 이 시스템이 케이팝을 완성했다고 칭송받는다. 획일화의 ‘원흉’으로 비판받았던 에스엠과 이수만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케이팝은 없었다는 것이다.
4장 는 ‘성희롱’을 둘러싼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신 교수 사건, ‘관행’이란 이름으로 용인되어 온 고대 이대축제 난입 등을 다룬다. 이를 통해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들, 그동안 이름을 빼앗겼던 사람들의 가려졌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이들의 눈으로 본 현대사는 긴 싸움 끝에 마침내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난동’을 ‘성폭력’으로 정정하는 데 성공한 승리의 역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2차 가해를 낳을 수 있는 성폭력 피해자 중심의 사건 보도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정체된 역사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은 쉽게 변하지 않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싸웠던 이들이 이뤄낸 성취와 변화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엘지비티(LGBT)라는 키워드로 지난 30년을 돌아본 강나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은 ‘침묵은 곧 죽음’이라는 퀴어축제의 슬로건을 상기시키며 “시간은 진격하고 쟁취하는 자의 편”이라고 역설한다.
‘사소한 것들’이 들려주는
새로운 현대사의 세계
이렇게 이 책은 현대사가 크고 무거운 것이며, 평범한 사람들은 역사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통념을 뒤흔든다. 좀처럼 역사서술의 소재로 여겨지지 않던 치킨, 탈모 같은 ‘사소한 것들’과 여성?엘지비티(LGBT)?탈모인 등 ‘사소한 존재들’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기존의 현대사와는 다른, 새로운 현대사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현대사를 늘 어렵게만 느꼈던 사람들, 흘러간 역사가 우리의 오늘을 어떻게 바꿨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이 책을 집어 들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