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우주의 시간 속에는 이 세상 헛되고 헛된 일 없다는 것을
아침마다 돌아오는 햇볕이 부연하고 있지 않는가”
모든 사라지는 존재에게 전하는 묵묵하고도 결연한 위로
생의 끝, 허무의 바닥에서도 끊임없이 자라나는 이야기
“그러고 보니 안녕, 하는 작별은 첫 만남의 인사였네”
허무를 향한 깊은 응시가 길어낸 굳은 깨달음과 의지
박승민 시인은 죽음의 문제에 유독 관심이 깊다. 시인에게 죽음은 단지 인간의 문제가 아니다. 만물은 짧은 순간만을 존재하다가 사라지며 좌절과 실패는 필멸하는 존재들의 숙명이다. 시인의 노래는 그 허무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라짐은 무(無)의 시간 속으로 소멸하여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의 사슬로 이어져 다시 태어난다. 전작 시집에서 이미 “끝은 끝으로 이어진 세계의 연속”이며 “존재는 늘 새로운 형식으로 우주의 일부로 다시 드러난다”(「끝은 끝으로 이어진」)는 통찰을 보여주었듯,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죽음은 단지 삶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깨달음을 되새긴다. 시인에게 죽음이란 “이 우주를 영영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과 합쳐지는” 것이면서 “새로운 형태가 되는”(「하여간, 어디에선가」) 것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시인의 인식은 더욱 깊고 견고해졌다.
“인간의 눈을 포기할 때
세계는 얼마나 광활한가
위험보다는 위대함에 가까운가”
시인은 예민한 시선으로 물질문명의 폐해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주시한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사물의 눈으로 “자연이라는 순환의 고리에 뚫린 커다란 허방”과 “구(球) 안에 갇힌 세상”(추천사)의 살풍경을 직시하면서 “이 산의 심장과 저 산의 식도를 뚫어 직선 터널을 놓고부터”(「길」) 발생된 생태계의 변화를 이미 감지해낸다. “맨드라미 씨 같은 날벌레들”과 “까마귀만 한 붉은 나방들”(「어느 마을을 지나는데」)이 출몰하고, “강물과 산자락은 생산 라인으로 끌려 들어”(「새로운 신(神)」)가고, 돼지와 닭과 오리와 소를 떼로 파묻었던 자리에는 급기야 “인간들이 묻히기 시작”(「매장」)한다. 시인은 “인간이 전기톱을 끌 때”(「소멸의 집」)만이 비로소 폐허화된 땅에 “새순을 일으키는 따스운 봄의 홍조”(「틀니」)가 생기롭게 흘러들 것임을 예고한다.
“자꾸 오작동하는 몸”으로 “가망 없는 생”을 살아가다보면 문득 “살고 있다는 생각도 살았다는 기억도 희미”(「이동하는, 끝없는」)해진다. 더 나은 세상을 이루고자 한때 혁명을 꿈꾸었으나 “혁명은 이제 책 속에나 있고”, 절망과 고통의 세월을 버텨나갈 “견딜힘이 달리니” “이젠 남들처럼 살아보면 안 될까”(「입춘」)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은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밥그릇 속에 네명의 죽음을 꿰매버린” “자본의 강철 같은 맨얼굴”(「만이천오백칠십팔일」)도 똑똑히 기억해둔다. 그런가 하면 “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하며 “아우슈비츠가 또다른 아우슈비츠”(「아우슈비츠」)를 만드는 아이러니와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는 자본주의의 폭력을 증언하고, 전쟁과 기후 위기와 기아 등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재앙의 현장을 기록해나가며 고통을 함께하고자 한다.
슬픔과 원망의 바다를 건너
끝내 돌아올 아침으로 향하는 굳건한 발걸음
“해는 요즘도 아침에 뜨겠죠?”(「항복연립」)라는 물음은 더이상 해를 볼 수 없는 현실을 사는 이가 던지는 무기력한 탄식처럼 들린다. 실제로 그것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슬픈 기형”(「구절, 초가 하루에도 몇 번씩」)의 삶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이가 던지는 낮은 비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물음에는 한줌의 믿음 역시 남아 있다. 당장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어디선가는 해 뜨는 아침이 반복되고 있을 것이란 굳건한 믿음이다. 죽음마저도 생을 완전한 허무에 가둘 수 없듯 “먼 우주의 시간 속에는 이 세상 헛되고 헛된 일 없다는”(「헛됨이 오만년이라면」) 깨달음을 손에 쥐고 시인은 허망한 세상을 통과한다. 그렇게 “난폭한 광야”를 지나 “슬픔과 원망의 바다”를 건너 마침내는 “오래된 지혜의 이삭들”(「헛됨이 오만년이라면」)이 희망의 빛으로 반짝이는 상생과 조화의 숲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숲 그늘 아래서 시인은 견실한 시정신을 벼리어 ‘좋은 시’를 넘어서서 이 시대에 ‘필요한 시’를 꾸준히 써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