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영화가 있다. 인생의 동반자로 나는 그/그녀와
함께 산다. 영화는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이 영화들이 있어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죽도록 사랑한 영화 28편
《혼자서 본 영화》는 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최전선에 서 있는 여성학자이자 ‘영화광’인 정희진이 20년 동안 꼭꼭 쌓아 둔 영화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다. 저자가 ‘내 인생의 영화들’로 꼽는 28편의 영화가 담겼다.
정희진에게 영화는 기분 전환이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괴로움 속에서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치열한 인식 활동이다. ‘혼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 홀로 대면하여 자신만의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일이며, 나와 대화하고 관계를 맺는 일이다. 영화와 나만 있는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영화 속 인물과 만나고 그 인물을 통해 나를 발견하고, 나의 내면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혼자서 본 영화》는 ‘나에게 말 걸기’이자 ‘타인에게 말 걸기’의 기록이다.
영화를 보는 나만의 습관이 있다. 혼자 본다. 어두운 극장 안에서 메모하느라 대개는 두 번 본다. …… ‘혼자서 본 영화’는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 머리말에서
한 편의 영화가 내 안에 들어올 때
《혼자서 본 영화》에서 정희진은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으로서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입장에서, 특유의 전복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읽고 해석한다. 권력과 젠더에 관한 놀라운 감수성을 바탕에 깔고 외로움, 사랑, 상처, 고통, 구원을 이야기한다.
‘나쁜 남자’들을 거치며 삶이 망가져 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주인공에게서 저자는 ‘혐오’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발견한다. 계속 배신을 당하면서도 사람을 믿고 사랑을 하는 마츠코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을 놓치지 않는 진정으로 강인한 존재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성폭행 피해자 소녀는 지옥 같은 학교의 가해자들 사이에서 수동적 피해자 되기를 거부하고 타자가 되기를 선택함으로써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발견한다. <가족의 탄생>을 보면서 저자는 ‘정상 가족’이 아닌, 연대와 사랑으로 뭉친 대안적 가족에서 위안을 받는다. “이 영화는 나를 숨 쉬게 한다.” 정희진의 자유로운 느낌과 생각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하나의 이야기에 담긴 다양한 해석을 만나게 되고,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접하게 된다.
정희진은 영화를 보는 일을 “내 경험 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를 만나는 일로 정의한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위치를 벗어나 새로운 각도에서 이면을 바라보는 일이 필요하다. 영화는 ‘렌즈’다. 영화는 현실을 담는다. 영화는 우리 역사의, 인생의 한 부분을 잡아챈다. 위치를 바꾸어 다르게 보는 순간,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변화는 시작된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세상이 넓음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을 뜻한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 ‘머리말’에서
내용 구성
“이 영화는 나를 숨 쉬게 한다.”
- 1장 ‘사랑과 말하기 사이에서’
1장은 <가족의 탄생>부터 <디 아워스>, <피아니스트>, <하얀 궁전>, <문라이트>에 이르기까지, 정의 내리기가 불가능한 사랑의 여러 모습과, 사랑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 정치적 문제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들을 모았다. 예를 들어,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은 <피아니스트>는 스스로 성의 주체가 되려고 하는 여성의 욕망과 쾌락, 자율적 선택으로서 마조히즘을 보여준다. 정희진은 이 영화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일탈 욕망을 여성이 추구할 때 따르는 처벌을 확인한다. <디 아워스>에서는 여성을 족쇄에 묶는 배타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신화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고,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 요부’가 등장하는 <인 더 컷>에서는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과 파괴를 여성(이른바 ‘팜파탈’)의 탓으로 돌리는 남성 판타지를 뒤집는다.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은 성적 주체로, 여성은 성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유사 이래 여성은 언제나 성적 주체였다. ‘꽃뱀’의 유혹에 넘어간 남성들의 ‘억울한 호소’, ‘큰 뜻’을 이루려는 남성과 이들을 대변하는 남성 문화는 여성을 ‘남자 신세 망치는 골칫덩이’로 경멸해 왔는데, 그 혐오의 정점이 ‘창녀’였다. 이처럼 여성은 성의 피해자로서 또는 주체로서 남성의 편의에 따라 늘 양립해 왔다. - <인 더 컷>(48쪽)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문제는 필요한 관계를 얻으려면, 그 관계를 오래 이어 가려면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를 아는 것이다. …… ‘필요’가 ‘사랑’이 되려면 윤리가 필요하다. …… 사랑 이전에 윤리. 윤리는 정치학이고 사회 정의다. 윤리는 상대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 “당신의 존재,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 <하얀 궁전>(38~39쪽)
“모든 것이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한다면……”
- 2장 ‘상처가 아무는 시간’
때로 삶은 보이지 않는 모래늪이 도사린 사막처럼 느껴진다. 고통과 상처가 언제 우리의 발목을 잡아챌지 알 수 없다. 끔찍이 사랑하던 자식을 유괴범의 손에 잃거나(<밀양>), 학교 급우들에게 왕따와 성폭력을 당하는 일(<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더 힘든 시간은 사건 이후가 아닐까. 상처를 끌어안고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야 하므로. 2장에서는 <위플래쉬>,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끔찍하게 정상적인>, <밀양>까지 주로 고통과 상처를 정면으로 다루는 영화를 만난다.
‘우리’는 상처받았음을 강조하는 대신에 저들의 폭력을 폭로해야 한다. ‘우리’의 상처가 크고 작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슈가 되면, 우리는 지배 집단과의 싸움보다 누가 더 큰 상처를 받았는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문제는 ‘그들’이 사는 메커니즘 자체이고 그들의 잘못이지 ‘우리의 약함’이 아니다. - (105~106쪽)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 대화를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피해자에게 도움까지 주겠다는 가해자의 팽창된 자아는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찌질하고 비겁하면서도 동시에 배려와 시혜의 주체가 되려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타인이 지치기를 바란다. - <끔찍하게 정상적인>(125쪽)
“말할 수 없는 것을 향해 돌진하기”
연엠
4.0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를 본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인이 될 거라고 설치고 다닐 무렵, 영화인이 될 거라고 설치고 다니던 다른 인간들 및 영화인이라고 설치고 다니던 인간들과 다 같이 피자를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왜 영화를 좋아하는지 이야기했다. 그러다 어느 프로듀서가 그런 말을 했다. 저는 현실을 잊기 위해 영화를 봤어요. 섬뜩했다. 현실이 얼마나 시궁창이었기에. 영화로 잠시 도피했다가 그 현실로 돌아오면, 그 절망감은 어쩌려고? 이 기억은 몇 년 뒤에 소환됐다. 신병교육대에서였다. 주말을 맞아 전 훈련병이 강당에서 영화를 봤다. 전투 영화였는데 어떻게든 전쟁과 연관된 영화를 보여줘야 한다는 조교들의 가상한 노력이 엿보였다. 영화는 제법 재미있었다. 문제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발생했다. "아, 영화 재미나게 보고 나왔는데 어이구 씨발, 군대네." 열을 맞춰 숙소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훈련병들은 낄낄거렸다. 나도 낄낄거렸다. 왜냐하면, 재미나게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여기는 빌어먹을 군대였으니까. 나는 잠시 동안 현실을 잊었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기분은 무지하게 엿같았다. 앞으로는 절대, 인생의 힘든 순간에는 영화를 찾지 않을 거야. 그렇게 다짐했다. 여즉 그 다짐대로 살고 있다. --- 웃기게도 내가 영화를 점점 가까이 해서, 일이 없는 한 거의 하루에 한 편씩 보며 살았던 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였다. 나는 괴로운데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던 때. 다행인 건 영화를 보면서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열심히 보고, 무사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봤자 영화니까. 살아내야 할 하루를 마주하고 살아내야 하니까. 그 무렵 써두었던 일기장에는 "공자의 사상, 모차르트의 음악,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 렘브란트의 그림, 인간이 이룩해놓은 게 허무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문장이 있다. 아주 거창한 현자 납셨다. 그 현자가 나였다. 지금은 바보다. 힘들면 영화도 못 보는 바보. 나는 그때만큼 현명하지 못하다. --- 대학시절 만난 한 친구가 "난 그 영화를 통해서 이렇게 생각하게 됐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처음엔 그 말이 웃겼다. 아니, 고작 영화로 삶의 향방을 결정한다고? 직접 겪어보고 나서 뭘 정하든가 해야지...라고. 거 참, 꼴도 보기 싫은 젊은 꼰대의 생각이란 그런 것이다. 비록 그때 나는 지금보다 현명했지만 현명한 것과 꼰대스런 것은 다른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을 바꾸는 건 그러려니 하면서, 하다못해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가도 그러면서, 영화는 왜 안 돼? 내 생각도 조금씩 변했고 그 친구를 이해하게 됐다. 그리고 그 친구가 얼마나 멋지게 살아왔는지도. 영화를 보고 생각을 고치게 됐다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영화는 사람을 더 살게 하니까. 이 이야기의 교훈은, 젊은 꼰대도 나름대로 변할 수 있으니 시간을 좀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변하는 시간 동안엔 만나면 정신 사나우니 만나지 않아도 좋다. "영화가 발명된 후로 인간의 수명은 최소한 세 배는 늘어났어. 우리가 영화에서 얻는 삶의 경험은 직접 겪는 경험보다 두 배는 많아."라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 그리고 둘>을 통해 양덕창 감독은 말했다. 현실에서 도피하는 건 덜 사는 것이다. 영화는 사람을 덜 살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 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도피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영화를 어떻게 보든 개인의 자유지만 난 그렇다. 그래봤자 영화, 그래도 영화. --- 정희진은 영화를 잘 볼 줄 안다. 열심히 보고, 성에 안 차면 몇 번 더 보고, 무사히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도 썼다. 생산성 넘치게 잘도 산다. 정희진은 '자본주의적 인간의 전형'이라고 자칭하니까 생산성이 높아도 뭐라고 지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선 안되겠다. --- '철학으로 영화보기', '경제학으로 영화보기'는 즐겁게 받아들이는 한편 '여성학으로 영화보기'는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렸다.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짚지 못하는 건 철학으로 볼 때나 경제학으로 볼 때나 여성학으로 볼 때나 모두 같은데 왜 여성학이 등장할 때만 "영화 자체에 집중하자"라는 비판이 나오는 걸까. 영화 자체에 집중해야 한다는 건 비판을 위한 도구적 언설이고, 여성학은 철학이나 경제학처럼 중요하거나 사회를 꿰뚫거나 인간(man)적이지 않다는 사고방식이 기저에 깔려 있는 거겠지.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p.97)이니까. ---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 늘 궁금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미야 나도 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가 있는 만큼 사랑이 식어갈 때도 있다는 의미겠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제도가 아주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이라는 비판도 이해하겠다. 그 기저에 가부장적 기획이 있다는 것도 이해하겠다. 사랑은 감정이다. 감정은 피할 길 없이 변화하고야 마는 거지. 그걸 억지로 묶어두면 사랑도 썩고 사람도 썩는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일 뿐일까. 힘들고 지친 가운데, 당장 쉬고 싶은 마음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힘들고 지쳤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마중하고 배웅하고 선물을 사 주는 일은 쉽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할 줄 안다. 저절로 되니까. 반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당장 쉬고 싶은 마음이 더 클 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마중하고 배웅하고 선물을 사 주는 사람도 있다.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 걸까.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감정에 따르면서도 자기 의지로 하는 사랑이, 그렇게 새로 사랑과 감정을 거듭 꽃피워내는 경우가 있다. 지금 좀 참아내고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에도 사랑하고 싶어서. 이런 사랑은 '감정적 사랑'이 아니다. '행동하는 사랑' 내지는 '살아가는 사랑' 내지는 '인생 같은 사랑' 내지는 '숭고한 사랑' 쯤으로 거창하게 표현할 수 있겠다. 그것도 감정적 사랑 만큼이나 아름답다. 어쩌면 더. 그러므로 나는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 발전이 없는 사람이거나 한 사람하고만 치열할 수 있는 불가사의한 사람"(p.68)이라며 사랑을 감정의 일쯤으로 묶어두고야 마는 심리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정희진이 답을 줬다. 정희진은 사랑을 항변하는 감정의 일로만 남겨두고, 아름답게 태어나며 반드시 저물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알고 보면 그는 사랑을 감정의 일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감정의 일로 묶어두어야만 하는 사람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어도 타인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공부나 언어)을 포기하지 못"(p.111)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능력이 부족해 페어플레이를 못하는 유형도 내 옆에 두지 않는"(p.112) 사람은 당연하게도 행동하는 사랑, 살아가는 사랑, 인생 같은 사랑, 숭고한 사랑을 선택할 유인이 없다. 당연하게도 사랑을 감정으로 이해하는 일을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건 선택일 뿐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사랑을 해야 한다. 나로선 오래 궁금했던 심리를 조금 더 이해하게 돼서 즐거울 뿐이다. --- 영화는 '정치적이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누가 뭐라 하든 이미 정치적이니까. 수전 손택의 말을 차용해 설명해 보면, 어떤 사건이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히 말해 영화로 찍을 만한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무엇이 사건인지를 결정하는 건 (넓은 의미의) 이데올로기기 때문이다. 세상만사 천지만물이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정치적이다. --- 여성학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제법 재미있게 읽을 만하다. 여기저기 여성학 외에도 생각해 볼 만한 거리를 던져주는 이야기가 많다.
jukii
4.0
여성의 지위는 같은 시대, 같은 계급의 남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에 비하면, 우리 엄마 세대에 비하면, 무슬림, 이슬람 국가에 비하면' 등등
Laurent
5.0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_<문 라이트> ‘마지막 장면’ 중에서. 특정인의 사적인 경험이 보편적 이론이 되는 것, 그것이 권력의 효과일 것이다. 개개인의 경험은 모두 사회적 권력 관계를 통해 구조화된 것이다. 개인들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그리고 그 해석을 통해 다른 주체가 된다. 각기 다른 경험은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한국/여성의 경험은 ‘특수한 경험’이고 서구/남성의 경험은 ‘보편적 이론’이 된다. 특수한 것은 보편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했다, 정신분석학을 여성 문제에 적용했다”는 식의 언설을 싫어한다. 마르크스주의를 한국에 적용했다면 그것은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특정 지역, 특정 시기, 특정한 성의 경험일 뿐이다. 서구 페미니즘이 한국에 적용될 때도 마찬가지다. _<디 아워스> ‘부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중에서. 모든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며 아이를 낳은 모든 여성이 헌신과 희생(이것은 책임과 다르다)을 당연하게 수용하지 않듯, 모든 여성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젠더 극우주의자들이 우글거리는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검열과, 그 검열을 남자들의 기대 이상으로 초과 달성하려는 검열이 과잉 내면화된 이 땅의 여자들은 남자가 원하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자기 경험은 말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궤도를 이탈한 여자에게 어떠한 추방과 사회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나혜석처럼 살고 싶지만 나혜석처럼 죽고 싶은 여자는 없는 것이다. _<피아니스트> ‘마조히즘을 욕망하는 여자?’ 중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간주되므로, 남성과의 사랑은 성 역할이자 생존 수단이 된다. 디 그레이엄의 책 제목대로, 여성은 살아남기 위해 사랑(《Lovingto Survive》)한다. 이와는 달리 남성에게 사랑은 자신의 주체성을 실현하는 수단이자 승부를 거는 게임이다. 남자의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여성에 대한 정복과 권력의 은유가 있다. 남성들이 연애 중인 동료에게 흔히 묻는 ‘어디까지 갔냐’라는 질문은, 여성과의 삽입 섹스가 관계의 종착역이며, 성교를 관계의 기준으로 삼는 남성의 권력이 이미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성애화되었음을 보여준다. _<질투는 나의 힘> ‘질투라는 자발적 고통’ 중에서.
최대한 🎬
3.0
감상이 아닌 비판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흐릿하다 젠더 감성에 갇혀서 영화를 보는 시선의 한계
kindred spirit
4.5
마지막 장인 '젠더, 텍스트, 컨텍스트' 를 읽으며 별 한개 추가했당.. 여성학 담론은 물론이고 사회 여러 층위의 소수자성을 바라 보는 시각이 탁월하다. 설명은 부족하고 저자의 생각이 너무 많이 나열돼 있어서 불친절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걸 감수할만큼 탁월한 함축의 나열임. 정희진의 다른 저서를 더 읽어볼 것이다.
리차드파커
3.5
영화 후기이자 페미니즘/평화학 이야기. 정희진의 문장은 늘 지적 탐구심을 부추기고 마음을 떨리게 한다.
박소희
4.0
정희진의 글은 늘 삶의 어두운 부분을 들춰내는데도 위로로 다가온다.
소정
3.0
아름다운 영화는 끝난 세상을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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