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만들어낸 장대한 드라마
십자군 전쟁
그 파노라마의 서곡이 펼쳐진다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순간들이 귀스타브 도레의 정교하고 장엄한 판화와 핵심을 파고드는 시오노 나나미 특유의 문장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철그렁거리는 갑옷들의 금속음,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와 거친 숨소리, 칼과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 군인들의 비명과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로마제국 흥망의 역사를 다룬 대작『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시오노 나나미가 또 하나의 대작이자 필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을『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시리즈의 ‘서곡’ 격에 해당하는 것이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이 책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귀스타브 도레의 섬세하면서도 장엄한 판화 작품을 중심으로 지도와 간명한 해설의 세 요소를 조화롭게 구성하여 십자군의 전 역사를 조망한다.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에는 성지 순례길에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교도에게 도움을 주는 이슬람교도를 그린 도레의 판화로부터 시작해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과 최초의 십자군으로부터 5백여 년이 지나 이슬람 세력의 서진을 막은 1571년의 레판토 해전까지, 중세에서 르네상스 초기까지의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 사이의 대결이 담겨 있다.
은자 피에르에 의해 민중 십자군이 결성되어 유럽과 소아시아를 거쳐 소멸되어가는 과정,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의해 십자군 원정이 제창되는 그 최초의 순간, 소아시아의 도시들에서 제1차 십자군과 이슬람 세력 사이에서 벌어졌던 공방전, 그리스도교도들이 이슬람 세력하에 있던 도시들을 정복한 후 벌이는 이교도에 대한 처참한 살육 장면, 성도 예루살렘을 두고 벌인 수차례의 전투들, 십자군 1세대들의 죽음과 퇴장, 성 베르나르두스에 의한 제2차 십자군의 결성과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벌어진 전투들, 살라딘의 등장과 이슬람의 반격, 이슬람측의 예루살렘 탈환, 사자심왕 리처드와 살라딘의 대결, 비잔틴제국의 쇠퇴와 멸망, 프랑스 왕 루이 9세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결국 루이 9세의 죽음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되돌아 온 7차 십자군과 비잔틴제국의 멸망과 레판토 해전까지 시오노 나나미는 500여 년 동안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만이 아니라, 기존 역사서에서 비워져 있는 전투들 사이사이의 골짜기를 희망과 절망, 이상과 욕망, 빛과 어둠이 부딪치는 생생한 장면들로 살려내 장대한 파노라마로 펼쳐놓는다.
이 모든 십자군의 역사가 『성서』, 단테의 『신곡』을 비롯하여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의 삽화를 그려 성공한 19세기의 비주얼 아티스트 귀스타브 도레의 정교한 펜끝에서 살아나고 있다. 기사들의 갑옷들이 전투를 벌이면서 내는 철그렁거리는 금속음과 뛰어 오르는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와 거친 숨소리, 그리스도교 병사들과 이슬람교 병사들의 칼과 창이 맞부딪치는 소리, 적들을 향해 달려나가는 병사들의 함성 소리와 적의 칼에 찔려 내지르는 단발마의 비명 소리, 전장에서 죽어가며 신에게 마지막 기도를 드리는 웅얼거림 등 이 모든 소리들이 서라운드 입체 음향으로 귓가에서 울리는 듯하다.
시오노 나나미가 30여 년 전, 베네치아의 고서점에서 프랑수아 미쇼의 『십자군의 역사』를 처음 발견하고 도레 삽화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그 장엄하고 정교한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펼쳐놓은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를 통해 십자군의 전 역사를 조망하게 됨과 동시에 중세와 십자군 전쟁이 그리스 로마 시대에 버금가는 상상력의 원천인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더불어 종교라는 이름으로,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원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십자군 전쟁이 단지 저 멀리 팔레스타인과 걸프 만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 고대 로마를 둘러싼 대작을 완결시킨 저자는 그 끝없는 호기심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지금 십자군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십자군 이야기’ 전 4권 시리즈의 서곡으로 쓰인 것이 이 책.
19세기 중반에 활약한 희대의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그림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아득히 멀리까지 이어진 병사들의 무리, 시체가 쌓인 전장, 잘려나간 사람들의 머리, 학살의 순간. 피비린내 나는 장면도 섬세한 선으로 치밀하게 그리면 아름답게 변한다. 디테일은 어디까지나 정교하게, 한장 한장 오래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다. _일간 겐다이(현대) 2010년 8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