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놀이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지금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한 번만 있을 뿐입니다”
출구 없이 확장되는 공간이 만들어낸 현실 조정 시간
업그레이드된 미래적 시어를 설계하는 백가경의 첫번째 시집
나의 모호한 ‘시 찾기’ 과정에서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스터리함, 기이하고 으스스함 그 자체다. 그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내 것이다. 나는 이 힌트를 쥐고서 시를 찾기 위해 프릭 쇼를 열었던 오래된 서커스 천막, 이름 모를 건축가가 설계한 사형 집행소, 바퀴벌레들이 춤추는 지하의 클럽, 인간의 멸망을 기억하는 바이러스의 숙주, 아이도 노인도 거부하여 언젠간 모두의 입장을 금할 것 같은 으리으리한 펜션 등을 머릿속에서 짓고 부수고 다시 건축하여 그 안에 들어가본다. [……] 내가 초대한 기이하고 으스스한 이곳이 당신들에게 조금 재미있기를 혹은 조금 웃기기를 그것도 아니면 조금 막막하기를,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조금 살 만해지기를 (가장) 바란다.
―‘시 찾기 노트’(『시 보다 2023』, 문학과지성사, 2023, pp. 124~25) 에서
명징한 언어로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확장해나가는 백가경의 첫번째 시집 『하이퍼큐비클』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12번으로 출간되었다. 백가경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 보다 2023』에 작품이 수록되는 등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김현‧김행숙‧박준 시인, 202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이라는 평처럼, 그는 잘 짜여진 형식과 구조 위에 지극히 현실적인 현상을 자유롭게 구축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 보인다.
시집의 제목인 “하이퍼큐비클”은 정사각형의 모든 변을 시공간을 초월해 n차원으로 확장한 다포체 하이퍼큐브, 사무실 등 공간 속에 구역을 구분 짓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를 뜻하는 큐비클로 이루어진 조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실의 벽과 인간을 가두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출구 없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총 4부로 구성된 53편의 시 속에서 비극적 풍경은 미래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기존의 관습들은 본 적 없는 형태로 부서지고 재탄생하는 장면이 하나의 놀이처럼 펼쳐진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놀이로 전복시키면서 놀이의 “일원이 되지 않고 즐거워”(「관성에 젖은 사람이 반복적인 일상과 구획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포스러운 시도」)지는 익숙하고 낯선 세계,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하이퍼큐비클』 세계가 우리 곁에 도착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무엇을 할 건가요?”
―트랜스 상태의 노동자 차원에서
콘크리트와 철골구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네 면의 벽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공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
암흑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언어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옥탈」 부분
이 시집에는 생존을 위해 매일 업무 공간에 갇혀 비슷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칼라」의 주석에 “이곳에서 일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로 상태다”라는 구절은 ‘시인의 말’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이트칼라의 진화 버전인 ‘트랜스패런트칼라(TC)’는 시공간을 초월해 일하다 일과 일이 아닌 것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은 현실이 아닌 하이퍼큐브가 확장한 새로운 차원이고, TC는 멸종 위기 개체이며, 화자는 TC를 “몰카”로 관찰하고 관객에게 중계하는 중이다. 파티션에 갇혀 “오류와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는 사무직 노동자가 시 속 차원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딸칵” 하는 소리가 시 전반에 울려퍼지며 “혈중 산소가 적”어지고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때까지 개미처럼 일하는 모습은 마치 오늘날 현대인을 비유하는 듯 보이지만, 백가경의 세계에서는 재미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출구가 없는 곳에서 노동자의 양상이 변모하다 끝내 희귀한 사건이 되는 일은 「사이파이 사일런스관 애장품 가이드 투어」에도 드러난다. 이 시의 화자는 기원전 3세기 철학자인 ‘사이파이 사일런스’에 대한 전시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가이드다. 그에 따르면 사이파이는 생전 “욕조를 만들다 관을 만들고 관으로 만들던 것을 욕조로 만”들던 한 석공에 대한 연구에 탐닉했는데, 그 석공은 “‘평생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욕조와 관을 깎”다가 일명 “교차 관–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누운 채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다. 반복되는 삶 속 자유를 잃고 쓰러져가는 우리에게 탈출구는 죽음뿐이라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 속에서 이것은 전시관에서 들려주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며,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찰나의 시간 동안 지구형 행성의 ‘고대 인류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작동이 생겨 죽음 또는 낯선 차원에 이르더라도 “코드를 꽂는 정도의 시간”만큼만 “여유를 갖고 기다”리면 된다.
시집에서 말하는 노동자의 공간이 꼭 파티션으로 채워진 사무실이나 방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 라이더」는 택배 배송 기사의 작업 현장을 박스에서 기어 나온 “벌레 하나”가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결국 과로로 쓰러진 노동자가 영면하는 곳은 택배 수신처 문 앞 “박스 테이프를 떼다 만 종이 박스” 안이다. “곧 벽돌공을 그만 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티며 하루하루 벽돌을 쌓던 벽돌공은 어느 날 그것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이었다”(「벽돌공의 벽돌벽」) 는 걸 문득 깨닫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과거 전태일이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속았다는 기분 든 적 없어? 좋은 밤 보내길」)라고 외치던 비극적인 시대가 TC와 석공, 택배 기사, 벽돌공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 백가경의 시적 공간은 “복제된 현실이 눈앞에 있다는 인식은 작은 틈을 만”들고, “벌어진 틈새를 비집고 나온 무언가가 시공간을 비틀고, 닮은 모습만큼 자리를 넓”(p. 215)힌다.
“나쁜 소식은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우리가 곧 낙하한다는 것
좋은 소식은 바닥없는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
―계급 구조와 약자의 차원에서
『하이퍼큐비클』 전반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은 이처럼 개선되지 않고 점점 더 곪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에 따라 양극단으로 나눠지는 계급 구조에서 기인한다. [……] 백가경은 깊이를 잴 수 없는 겹겹의 지층을 낱낱이 살피며 시간과 공간, 차원을 넘나드는 고고학적 탐구로 인간을 발굴한다. 새삼스럽지만 낯설게, 인간이어야 하는 인간을 칸막이 밖으로 구출하는 그의 시는 닫힌 세계의 출구를 연다.
―소유정, 해설 「입체 전시 ‘하이퍼큐비클’을 위한 서문」(p. 225)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계급 구조는 노동자의 계층 상승을 어렵게 하고, 태어날 때부터 성별이 정해져 그에 따른 시스템이 고착화된 세계 속 인간은 성차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하이퍼큐비클 속 인간은 지층을 이루는 퇴적물의 유해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해설, p. 222). 백가경은 사회적 문제를 도표, 그래프, 기둥, 화살표 등에 적용해 시각화시키고 현실을 변형된 차원으로 구현하며 복잡해진 형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2022년 신당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신당역 사망 사고 관련 재발 방지 대책 아이디어 제출 양식」은 연번, 내용, 기대 효과, 비고를 정리한 4열 3행의 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마치 누군가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절차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