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의 민간 살인사건과 과학수사
이 책은 『일성록』의 범죄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18~19세기 조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14가지 살인 사건을 선정해서 다루고 있다.
범행흔적을 없앤 지능적인 범죄와 몇 년 간 해결되지 않았던 사건들을 위주로 다뤘기 때문에, 수사관이 단서를 잡아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 왜 살인이 일어났는지를 규명하는 모습, 그것이 조선 사회의 변화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등을 흥미롭게 재구성하고 있다.
18~19세기 조선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진행된 신분간 벽이 극도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여기에 상업경제의 발달로 인한 도시화 속에서 인구의 서울집중, 술도가의 융성, 모든 것을 돈으로 생각하는 배금주의 풍토가 일어나고 있었다. 흐트러지는 유교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국가의 강압적인 정책의 시행과 이에 맞서거나 일탈하려는 대중들의 움직임이 서로 엇갈리는 지점에서 무수한 갈등이 일어났다.
그동안 조선시대 살인을 다룬 책들이 간혹 나왔지만, 정치적인 사화나 반역, 양반들간의 권력다툼의 현장을 주로 언급했고, 『조선왕조실록』이나 정약용의 『흠흠신서』 등에 소개된 자료들을 위주로 다뤄왔다. 하지만 이 책은 1760~1910년까지 국정 전반에 관한 매일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일성록日省綠』(국보 제153호)을 중심사료로 삼았다. 저자 유승희 교수는 서울시립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18~19세기 한성부의 범죄 실태와 갈등 양상-일성록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진학자다. 이 박사논문은 조선시대 범인 심문 기록을 분석한 국내 첫 논문이다.
『일성록』은 한국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료이지만, 범죄 관련 부분은 그간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 점에 착안해 『일성록』의 방대한 범죄기록을 일일이 해석하고 관련 자료와 비교해 조선후기 범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민간의 갈등양상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특히 『일성록』은 『조선왕조실록』과는 달리 조사관이 범인과 나눈 일문일답, 증인들의 진술 등이 그대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조사관의 입장만이 아니라 범인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할 수 있고, 훨씬 구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일성록』만 참고했다면 이 책에서 느껴지는 손에 잡힐 듯한 구체성이 확보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조선시대 형사기관의 근무일지 및 범죄수사기록이라 할 수 있는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과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은 물론 『추관지秋官志』 『심리록審理錄』 등의 자료를 폭넓게 조사한 바탕 위에서 책을 썼다. 가능한 한 범죄의 내용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배경, 범죄인의 의도, 범죄방법, 검험관의 검험방법 등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흉악한 범죄일수록 범인이 그 흔적을 은폐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시대 수사관들은 모든 수단과 추리를 동원해서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이고도 정밀하게 진행되는지, 범죄를 일으킨 정황이 실제 역사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아울러 범죄 뒤에 숨겨져 있는 당시의 사회적 갈등양상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짚어나가고자 했다.
범죄사건은 시대의 가장 솔직한 표정
범죄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부정적인 단면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로 삶의 실존적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범죄 연구는 인간 내면의 의식세계 뿐 아니라 구성원간의 갈등과 긴장, 그것에 대한 사회통제와 질서유지, 그 상호관계를 규명하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를 살았던 민民의 생활을 복원할 수 있다. 조심스럽게 범죄 관련 기록에 접근했던 저자가 결국 그것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고, 책을 펴내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종래에는 조선사회를 다소 큰 사건이나 구조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민란民亂이나 사화士禍를 통해 시대적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적인 접근은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그 속에서 백성들이 겪는 갈등으로 보충돼야 한다. 거시적 시각을 입증해줄 미시적 연구인 셈이다. 역사학은 과거의 사료를 평가, 검증해 역사적 사실과의 관련성을 추구하는 학문이기에 사료에 대한 해석이 당대의 실제 삶과 맺고 있는 관련성이 촘촘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무너져내릴 수 있다. 저자는 그런 확신 속에서 조선시대 범죄를 통한 ‘역사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복수, 재산다툼, 유흥문화, 어린이 유괴
이 책에 실린 14개의 사건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복수살인’이다. 주로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아내들의 복수가 많은데, 조선시대 여인들의 투철한 종부의식은 경외감을 품게 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만든 국가 차원의 유교의식의 강요가 씁쓸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겉으로는 복수살인을 표방하면서도 그 속을 살펴보면 돈을 노린 사건일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범인이 바뀐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의 모든 살인사건이 전부 이렇게 수사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신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이라 소중히 다뤄야한다는 관념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시체를 해부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범인찾기가 지연되는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직접 조사한 함봉련 옥사사건과 시골마을의 연속된 2건의 살인사건의 경우 모두 시체에 대한 과학적 검험의 결여 때문에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빠져든 경우다. 정약용은 날카로운 관찰과 합리적인 인과관계 짜맞추기, 증인들의 증언에서 허점찾기 등을 총동원해 몇 년씩 해결되지 않았던 범죄사건을 속시원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재산다툼의 와중에서 살인사건이 많이 벌어졌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조선시대에는 첩실제도가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장이 죽은 후 후손들끼리의 재산다툼이 치열했다. 그리고 적손들이 첩손보다 머릿수가 모자라거나 세력이 약하면 집단적인 힘겨루기 끝에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신분제가 흐트러지던 조선후기이다보니 이와 같은 사건이 더욱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 외에 이 책은 정부가 백성들에게 강제로 환곡을 환수하려다가 벌어진 살인사건, 아동유괴가 독버섯처럼 번졌던 시기에 일어난 어린이 상해.살인 범죄, 무덤과 음택풍수로 인한 살인사건, 음주문화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한 구타 살인사건, 과부보쌈의 유행과 그 와중에 벌어진 웃지 못할 비극 등이 다뤄져 시대의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사건 중심의 흥미로운 서술과 함께 본문의 중간 중간 당시 한성부에서 일어났던 절도범죄, 사기범죄, 문서위조범죄, 유흥 문화로 인한 범죄 등을 실제 사건을 중심으로 정리해주고 있어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습득하는 즐거움도 안겨준다.
가령 조선후기 궁중절도사건의 절반이상이 내부자 소행이라는 점, 인구의 서울유입으로 부랑자가 늘어나고 이들의 생계형 범죄가 어떤 형태로 일어났는지, 무위도식하는 조직폭력배와 정부관원들의 결탁, 이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 푸줏간과 우시장이었다는 점 등을 보여주고, 또한 정조 이후 전문 위조범들 문서위조사건과 구체적인 방법과 범죄의 동기 등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