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응준, 시인으로 돌아오다
지옥에서 써서 연옥에서 추려 전장에서 띄우는 사랑의 노래들
한 편의 시를 읽고 싶었던 오랫동안의 갈증이 풀리는 이 충족!
― 김주연(문학평론가 ·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발굴된 고전의 명편처럼 군더더기가 없다.
― 김혜순(시인 ·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가 이응준의 변신은 어디까지인가. 추억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존재의 쓸쓸함과 고독의 대명사였던 그가 『국가의 사생활』을 통해 우리 시대 통일 문학을 새로 개척하더니, 올해 초 본격 로맨틱 코미디 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이 출간 즉시 드라마화(내년 3월 SBS 방영 예정)가 결정될 만큼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그런 그가 이번엔 시집을 펴냈다. 소설 『내 연애의 모든 것』이 사랑을 소설로 풀어냈다면, 시집 『애인』은 ‘연애의 모든 것’을 시로 풀어냈다. 사실 이응준은 1990년 계간 《문학과비평》 겨울호에 「깨달음은 갑자기 찾아온다」 외 9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먼저 출발했다. 2002년 두 번째 시집 『낙타와의 장거리 경주』 이후 10년 만에 세 번째 시집 『애인』을 출간하며 시인으로 돌아왔다.
세기말의 슬픈 청춘의 초상을 노래했던 이전 시집과 달리, 이번 시집에서는 사랑의 생생한 건강성에 대해 노래한다. “비바람과 천둥”, “캄캄한 동굴”, “사막과 뜨거운 지옥”을 건너온 자의 사랑을 노래한다. “살과 뼈”는 온통 “비바람에 흩어”져 버렸고, “청춘”은 “천둥과 함께 흘러”가 버렸다. 감당하기 어려운 젊음의 무게에 괴로워하던 청년의 모습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오히려 가장 순수한 소년, 영원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다. 유리창에 한 글자 한 글자 깎아 새겨 넣은 듯한 섬세하고 예리한 문체는 그대로 독자의 가슴속에 각인된다.
■ 연애하는 짐승의 무정함과 무정한 짐승의 연애가 빚어내는 기이한 변증
소설가와 영화 각본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이응준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언제나 ‘시적인 언어’가 꼽혀 왔다. 그가 바로 다름 아닌 시인이기 때문이다. 그의 또 다른 특장인 마치 영화를 보는 듯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이미지는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온 우주의 별자리들을 다 헤매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
나는 나의 죄를 닮은 밤하늘을 향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생일」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그로 하여금 그의 시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 바로 ‘그리움’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이 그를 괴롭게 하고, 그의 시를 더욱 찬란하게 만든다. 6행으로 된 단시 「연인」은 이런 의미에서 잠언에 가까운 수작이다.
괴로워 밤마다
환속하는 이여.
문득 꼬리를 만졌을 때나
짐승인 줄 깨닫게 되는
개 한 마리의 사상이여.
해일이여.
이응준 시의 화자는 직시하지 않는다. 언제나 비스듬히, 뒤늦게 바라본다. 피하고, 겁이 난다 하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다. 그는 ‘내’가 아니라, 애인과의 관계로부터 빠져나온 ‘어떤 사람’이다. 시인 김혜순의 말처럼, 그는 “그 누구의 애인이 ‘더 이상’ 아니고, 그 누구의 애인이 ‘아직은’ 아닌” 자다.
문학평론가 장은수는 발문에서 『애인』이 ‘사랑의 건강성’에 대한 시집이라 말한다. 상처가 이 시들을 만든 게 아니라, 시가 존재하려고 상처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둠이 나에게 침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둠 속으로 스며든 것이다. 그/그녀에게 열려 있지만, 나를 잃지 않고 나를 지켜 가면서, 다시 그/그녀를 끌어들여 변주한다.
이응준은 시집 뒤에 붙인 산문 「개와 예술에 관한 몽상」에서 자신이 키우는 개에 비추어 자신의 예술론을 펼쳐 보인다. 예술가란 “가슴속에 명쾌한 비극”이 있어야만 하고, “순수하고 양심적”인 존재여야 하며, 그것이 바로 “탐미주의적 예술가의 도덕”이라 말한다.
그는 산문의 말미에 “나는 내가 쓴 것들 말고는 전부 잃어버렸다.”라고 쓸쓸하게 말하지만, 그에겐 결국 그가 쓰는 것만이 전부이므로, 그는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처럼.
시집을 덮으며 떠오르는 “단 한 사람”이 있는가? “나의 너도/ 너의 나도 아닌/ 그저 오래도록 단 한 사람”이 있는가? 그가 바로 ‘사랑’이다.
어디에도 그가 없는 저녁
그녀는 자신에 관한 소식을 듣는다. 그는 지워진다.
가 버린 청춘은 이야기도 아니고 노래도 아니었기에
나의 너도
너의 나도 아닌 그는 그저 단 한 사람.
무엇으로도 그를 기념할 수 없는 저녁
그녀는 사막에서 고래의 눈동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 버린 청춘은 가혹하고 아름다움은 엄두가 나질 않아
사막에 엎드려 있는 고래의 눈동자 속에 우두커니 서서
폭풍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없지만
여기 있다. 그를 기다리는 단 한 사람.
죽음처럼 옷깃을 여미고 말없이 반문하는
그의 단 한 사람. 사막에 쓰러져 있는 고래의 눈동자 속
눈물이 되어
폭풍우를 기다리는 단 한 사람.
나의 너도
너의 나도 아닌
그저 오래도록
단 한 사람.
-「단 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