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표를 잃은 곳에서 길이 보인다. 아, 나는 이런 길 위에 있구나.”
인문학과 지식인의 자리를 되묻는 비평적 에세이
『묵묵』에는 고병권이 지난 4년 여간 발표했던 글과 신문칼럼이 수록되어 있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모아 놓고 보니, 한동안 그는 길을 잃으며 자신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있었다. ‘수유너머’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제도권을 벗어난 인문학공동체의 가능성을 실험했고, 배움의 기회를 놓친 이들에게 인문학이 지닌 효용성과 가치를 전하는 데 앞장섰던 고병권을 떠올리는 독자라면 이런 모습이 다소 낯설지도 모른다. 그는 한껏 높였던 목소리를 낮추고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걸었던가. 목적과 이유를 잃고 오래 허둥댔다”(「프롤로그」).
『묵묵』에는 왜 자신에게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보다 무엇이 변화했고 새로운 무엇을 다시 고민하게 됐는지가 더 비중 있게 서술된다. 인문학뿐 아니라 지식, 앎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됐던 것은 아닌지 회의하고 옳은 말, 분명한 목표, 책임 등에 짓눌려 또 다른 폭력을 만들어낸 적이 있음을 반성한다. 무엇보다 인문학자와 지식인이 자신이 말하고 쓴 글에 떳떳한지 묻는다. 그는 2014년에 독자를 향해 썼던 ‘옳은 말은 옳은 말일 뿐이다’라는 문장이 자신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온 경험을 적으며, 옳은 말의 범람과 한계를 비판한다(「말의 한계, 특히 ‘옳은 말’의 한계에 대하여」). 그렇다면 이것은 비단 고병권에게만 해당하는 일일까. 연일 열렸던 인문학 강연들이 어느 순간 사그라들었고, 고된 일상을 짊어진 이들에게 인문학이 희망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거듭 확인하지 않았던가. 현장인문학의 전선에 뛰어들었던 한 철학자의 자기반성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질문하게 할 것이다.
“최소한 10년 전의 나는 길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자부심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연구자공동체 속에서 비전을 보았고 현장인문학 활동에서 앎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다. 우리의 해방은 빵만이 아니라 장미를 필요로 하며, 인문학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최소한 장미 한 다발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때의 비전이 환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난 몇 년의 경험으로 깨달은 것은 희망 때문에 하는 일이 절망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희망이 희망으로만 남아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사람들은 누렇게 변색된 그 두 글자를 절망이라고 읽는다.”(5~6쪽)
“나는 앎을 통한 삶의 구원을 믿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인문학자 자신에게 그랬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사하고 인문학 자신은 앎에서 구원을 얻었는가. 그때 나는 ‘옳은 말은 그저 옳은 말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확하고 올바른 말이라고 해도 그것은 유통되는 정보 이상이 아니었다. 옳은 말들은 기어가 빠져 공회전하는 엔진처럼 헛돌았다.”(36~37쪽)
“어두운 밤길, 내 곁에는 언제나 개 한 마리가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목소리 없는 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대하여
『묵묵』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만져졌고, 말할 수 없기에 들을 수 있었던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고병권은 섣부르게 품었던 희망과 절망을 내려놓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곳에 늘 누군가가 있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게 아니었다. 언제나 그의 손을 붙들고 말 건넸는데 자신의 귀가 닫혀 있었기에 듣지 못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 책에 ‘목소리’, ‘침묵’, ‘빈자리’, ‘쓸모없다’, ‘듣다’, ‘보다’ 등의 단어와 서술어가 빈번하게 쓰이고 짧고 길었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자주 묘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장 ‘개가 짖지 않는 밤’에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만났던 여러 학생들, 그리고 기초생활수급권자, 후원하는 자와 후원받는 자, 대학과 그곳의 학생들, 성소수자, 시설 및 수용소에 강제수용된 사람들, 노동자들, (성폭행을 당한) 여성, 난민뿐 아니라 약물 실험의 대상이 된 동물과 인간에 의해 버려진 동물들까지 등장한다.
또한 책에는 세월호로, 장애인 투쟁으로 세상을 떠난 영정 속 고인에 대한 자리도 짧지 않은 분량으로 마련되어 있다(3장). 이는 고병권이 자신의 듣지 못하는 무능을 상대방의 말하지 못하는 무능으로 성급하게 바꿔치기하는 일의 위험성을 강조했던 것과 연결된다. 빈자리를 채우기보다 그곳을 그대로 둔 채 물끄러미 오랫동안 지켜보는 행위는 떠난 이가 못 다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방식일 수 있다. 고병권은 다시 한번 말한다.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그들은 말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로 덮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들의 ‘목소리 듣지 못함’을 그들의 ‘목소리 내지 못함’으로 바꾸어 버리고, 자신들 목소리를 그들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의 목소리에 덮어쓰기를 실행한다. 이것은 그들을 이중침묵에 가두는 것이다.”(52쪽)
“우리에게는 평소 잠복성 질병처럼 영혼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다가 일이 터지면 삼단논법의 대전제처럼 기능하는 인식이 있다. 대부분 근거 없는 선입견인지라 보통 때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터지면 해당 인식이 자극을 받는다. 우리의 이후 생각과 행동은 모두 거기서 도출된다. 이를테면 영혼 밑바닥에 ‘이방인은 적이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은 어떤 두려운 사건을 겪을 때 이방인들을 가둘 죽음의 수용소를 쉽게 추론해낸다. 사건의 충격파가 그 인식의 나뭇가지를 잠시 흔들기만 하면 된다.”(94~95쪽)
“지금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사라진 자리로서, 상실된 자리로서 빈자리가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는, 우리가 마련해야 하는 자리로서 빈자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기억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46쪽)
“그냥 걷자. 요란 떨지 말고.”
내 안의 영리함을 버리고 걷기 위한 고병권의 묵묵 선언
고병권은 책을 준비하는 동안 지금처럼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고, 내세울 게 없으며, 무엇을 하자고 제안하기 어려운 때가 없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렇게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순간, 그가 택한 방법은 그저 묵묵히 걷는 일이었다. 「프롤로그」에서 “그냥 걷자. 요란 떨지 말고”라고 썼던 그는「에필로그」에서도 “생이란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내는 것이다. (…) 우리는 끝을 관통하는 방식으로만 끝에 이를 것이다”라고 또 쓴다. 덧붙여 루쉰의 마지막 글이 미완인 것도 그가 ‘계속’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번 책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의심이 생기고, 자신감이 떨어진 누군가에게 나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계속 걷자고 말해주는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병권의 묵묵 선언이 본격적인 춤을 추기 위한 일종의 준비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는 4장에 수록된 글들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맹학교 노들장애인야학의 신경수, (故)김호식 학생 등 덕분에 발견하게 된 인식의 전환과 니체가 말했던 위버멘쉬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가령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손으로 만지고 작업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코끼리들과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발표한 익숙한 일상을 흔드는 작품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한 부분이 대표적이다(「불가능한 코끼리」). 그렇다면 이렇게 책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이미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운명과 춤을 추기’ 시작한 게 아닐까.
“이제 장애인에 대한 그의 규정을 다시 음미해보자. 그가 말한 ‘배낭이 없는 삶’이란 자율적이지 못한 삶, 누군가에게 예속된 채 살아야만 하는 삶, 자기 삶을 지배할 수 없는 삶, 자기 단련이 없는 삶, 타인을 돌볼 수 없는 삶, 무엇보다 주권자로서 투쟁할 수 없는 삶을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