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가 함께 서 있다.
그림과 그림자가 함께 앉아 있다”
여럿으로 나뉘고 하나로 겹쳐지는 언어의 흔들림
겹겹이 쌓아 올린 그림자 위로 쏟아지는 선명한 감각들
끝난다고 썼다.
여기에서는.
계속되었다고 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
―「여기에서는 이렇게 끝나는데 그는 다른 곳에서 계속되었다」 부분
문자에 물질성을 만들고 문학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인 김뉘연의 네번째 시집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619번으로 출간되었다. 출판 편집자이자 다양한 전시 및 퍼포먼스 프로젝트를 선보인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2020년에 첫 시집 『모눈 지우개』를 출간하며 시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두번째 시집인 『문서 없는 제목』에서 ‘시’와 ‘문자’가 지시하는 상황의 안팎을 오가며 시집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과정을 보여주는가 하면, 차학경의 『딕테』를 이어 쓴 프로젝트 시집 『제3작품집』에서는 ‘쓰기’라는 행위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비선형적이고 다원적인 시의 궤도를 그려내면서 “자신이 대하는 매체가 지닌 기억의 조건을 나열하고 재서술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을 재창안하며,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창작자”(최가은 평론가)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텍스트를 질료 삼아 시를 제3의 대안적 공간으로 만드는 그의 여정은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에서도 이어진다. 총 61편의 시로 묶인 이번 시집은 별도의 부로 나누지 않고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었을 때 하나의 텍스트처럼 보이도록 구성했다. 각각의 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결과물을 완성하기 위한 61가지 레이어로 층층이 쌓여 있다. 이 시집은 전작처럼 시각적 요소를 다채롭게 활용하기보다 문자 자체의 ‘나’와 ‘너’가 곧 ‘우리’가 되는 상징성에 주목한다. 비슷한 듯 다른 말들이 씌어지고, 중첩되고, 연쇄되고, 반복되며 결국 “아주 분명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인 김뉘연의 “이것”으로 가득 찬 세계. 페이지를 열면 처음 등장하는 시의 제목 「여기서는 이렇게 끝나는데 그는 다른 곳에서 계속되었다」가 암시하듯 또 하나의 예술적 실험이 문을 연다.
“너를 증명하는 문장이 너의 삶을 지지한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희구하는 오늘의 그림자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의 모든 시는 ‘오늘’의 언어로 씌어져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쉼 없이 흐르고 있는 찰나, 지금 이 순간에 이뤄지는 시인의 고뇌는 얼핏 보면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도를 궁리하다 삼십 분 남짓 보”내는 까닭은 미래로 가는 길에 조금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분명한 작금의 상황을 지나 분명한 내일로 나아가기 위해 “추측의 어미에서 도망”치고 추상적인 말, 이를테면 어떠한 “것 같다라고는 남기지 않”(「반쯤 누워 있는 사람」)으려 한다. 「부분적으로 망가진다」에서 경계하는 것 역시 “하나 비어 있”는 ‘이’로 “글자가 샌다”는 점이다. “문장이 문이 되고./글자가 글이 되고./빈 공간을 채우지 않고 있”는 것이 자꾸만 화자의 진로를 방해하고, 아직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로 가득한데 머릿속에 또다시 새로운 문장이 “등장해버”리는 상황이니 “문장 앞에서” “좀처럼 어찌할 수 없”(「단번에 나타나겠다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대상에 그림자를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그림자놀이”는 말 그대로 글자로 그림자를 출현시키기 위한 연습인데, 내용의 구성을 위해 글자를 사용하거나 글자가 내용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글자 자체나 글자가 추동하는 실재를 끊임없는 변형 상태에 두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 실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이 놀이는 형식에 대한 실험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한범, 해설 「그림자화법」에서
보이지 않는 대상에 그림자를 만들고, 기왕이면 여러 개 만들어서 실체를 분간하는 데 오차를 줄이는 일은 막연해 보이지만 이 시집의 중요한 동력이다. 시집 초반에 실린「어떤 성질의 표시」에서 ‘이 씨’는 아직 등장하지 않는 인물(혹은 대상)이지만, 화자는 “우리는 이 씨를 만날 것이다”라는 무모한 희망에 기대고, 마치 상상 속 이 씨에게 그림자를 부여하듯 “느낌”과 “기운”을 소환한다. 만날 것이라는 “느낌의 기분을 이 씨에게 보”낸 뒤, 그들은 이 씨를 만나기 위해 “성산에 대해 한참 말”(「그것에 다가간다」)한다. 이어지는 시 「소개받은 인물」에서 마침내 ‘우리’는 이 씨와 성산에서 만난다. 화자는 마주친 이가 아직 이 씨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간다. 이후 「개별적인 방문자」에서 “이 씨는 공휴일에 세 가지 시간을 심어”두었고, 마침내 “부풀어 오른 사람을 이 씨가 안는”다는 대목을 통해 ‘우리’(화자) 그리고 이 씨의 관계는 설계된 실험의 결과였음을 내비친다. 비로소 화자가 염원하는 대상과 내일은 만날 수 있으리란 희구는 선명한 “잇자국”(현실)이 된다.
이한범 미술비평가는 김뉘연의 시를 ‘그림자놀이’를 넘어선 “화법 자체”로 보고, “동일한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부분으로 두며 끊임없는 상호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말하기 방식”이라고 그의 시 세계를 설파한다. 어쩌면 불분명하게 펼쳐진 오늘의 불확실함 속에서 분명한 미래의 확실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은 “완성이란 없는, 끊임없는 흔들림을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연쇄 과정에서 탄생한 무수한 그림자로 만들어낸 ‘분명한 것’은 오늘을 “보낼 수 있는 날이 되고 있”게 하고 “지나가고 있”게 하며 “이곳이 현재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우리를 일으켜 세”(「조력자에게」)울 것이다.
“알지 못하는 거리에서 이루어지려 하는 만남”
―하나가 되기 위해 무수해지는 감각과 중첩되는 언어들
“이번 시집에서 김뉘연은 계속해서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 생각한다”(해설)는 전언처럼, 화자는 타자와의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우리’라는 단어의 무게를 가늠한다. 그런데 왜 수많은 타자, 사물, 낯선 풍경 속에서 ‘너’를 알아보고 ‘우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임의 교체」에는 처음부터 “그럴듯한 결과”만 있다고 토로한다. 살다 보면 “언제든 그럴 수 있”고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 결과이지만, “어이가 없”는 상황에서 “그럴듯한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부조리 역시 삶일지도 모른다. 분명해지기 위해 수행했던 ‘오늘의 고뇌’ 이후의 모습이 불분명하고 “그럴듯”하기만 한 미래라면, 고민을 나누고 함께 걸어갈 ‘너’를 찾아내 하나가 되고자 하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커다란 여분」에 의하면 ‘우리’가 되는 법은 단순하다. 전자 노트에 붙어 있는 연필처럼 소파 위 엉덩이에 개가 “제 엉덩이를 붙”이기 위해 다가오는 것, “함께 걷던 네가 내 팔짱을 끼”는 것으로 “우리는 한 단어를 이룬다”. 물론 “우리를 시작했을 뿐” 완벽하게 서로의 그림자가 겹치지는 않은 채 “반쯤의 상태로 서로를 지속”하는 중이지만 이어지는 시들에서 그 간극을 좁히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화자는 “너의 도시”(「옮겨다 놓은 무대」)인 “방주를 그리워” 하다 다음 날 곧바로 방주에서 “하룻밤을 보”내는가 하면, “안아보”고 “만져보”고 “움직여보”다가 “하나가 여럿으로 나뉘게 되었”듯이 “여럿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고 확신한다. 곧 화자는 “걸어 나”가는 너를 “뒤따라”가 너의 “손을 잡은 채로./놓지 않는다”(「곧장 웃고」). “그림자 그림/그림 그림자”(「흔든다」)와 같이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감각하고 그림자를 통해 실체를 읽어내는 일은, 그 과정에서 자꾸만 흔들리는 ‘나’(그림)를 지지해줄 ‘너’(그림자)를 필요로 하는 작업과도 같을 것이다.
바로 다음에 놓인 「모방했던 것과 비슷하게」에서는 비로소 흐릿했던 대상이 제법 분명해지고, 화자도 ‘너’와 좀더 가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