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 그 이퀄리즘은 틀렸다
페미니스트 선언은 실천이다 | 백래시Backlash로서의 여성혐오와 괄호 안의 불의 | <며느라기>, 명절 연휴엔 모두들 이 만화를 함께 읽어봅시다 | 영혼도 웃음도 남기지 않은 시사 풍자 개그맨 황현희의 퇴행 | 유아인은 어쩌다 | ‘마녀사냥’이라는 레토릭 | 명예남성과 개념녀의 문제 그리고 남성 페미니스트의 오만 | <피의 연대기>, 이토록 질기고 귀한 연대 | 아이린에 분노하는 한국 남성이란 부족 | 수지의 용기 그리고 변명 뒤에 숨은 남자들 | 그 남자들은 페미니스트 시장 후보 벽보에 왜 그렇게 분노했을까 | 지하철 페미니즘 광고는 시민의 권리다 | 탈코르셋 시대의 비슷한 듯 전혀 다른 두 작품, <여신강림>과 <화장 지워주는 남자> | 한국 남성들의 반발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은 어떻게 밀리언셀러가 됐을까 | 여자 친구 불법 촬영 인증과 20대 남성들의 상실감 타령
2. 가짜 논의와 공론장의 적들
‘지식 셀럽’과 방송의 위험한 공모 | 그건 정말 사표였을까 | 언론의 1일 1이택광에 대하여 | 페미니즘 공부는 셀프라는 말에 대해 | 슈뢰딩거의 탁현민 | 불편함의 변증법, 프로불편러가 상대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 <까칠남녀>와 정영진, 잘못된 조합 | 《디스패치》 ‘팩트주의’의 저널리즘적 맹점 | <까칠남녀> 은하선의 하차와 교육방송 EBS의 자기 부정 | 폭로의 정치학에 대하여 | 윤서인 만화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강신주, 채사장, 그리고 상식의 문제들 | 황교익의 독선과 포퓰리즘 인문학의 한계 | TV 토론 프로그램은 어떻게 가짜 논의에 오염되는가
3.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기
<개콘> ‘대통형’,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 <아빠본색>과 <인생술집>, 솔직함은 면죄부가 아니다 | 홍상수의 한심한 남자들 | 우리에게는 유바비처럼 스위트한 남자 롤 모델이 필요하다 | 퇴행하는 TV 예능 세상에서 기획자 송은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 <나의 아저씨>, 모두를 위한 지옥에도 불평등은 있다 | <안녕하세요>, 폐지가 답이다 | 소니코리아여, 플스4는 당신들 광고보다 더 위대하다 | 장애인 차별에 공모한 MBC 예능 투톱, <나 혼자 산다>와 <전지적 참견시점> | 백종원이라는 알파메일Alpha Male과 징벌 서사의 정당화 | <계룡선녀전>과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웹툰 원작 드라마에 한국 남자 패치가 붙으면 | <언더 더 씨> 논란과 애도의 윤리 | ‘과도한 PC함’이라는 허수아비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위근우
2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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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헛소리에는 딱 그만큼의 대우”가 필요하며, 사회적 공론 과정을 통해 가장 덜 폭력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비판과 규제(혐오 표현 금지, 차별금지법 제정 등)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만 안 그러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공적 영역의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없다. 권력자가 아닌 만인의 자유를 위해 법 제도가 존재해야 하며, 그 바탕이 되는 시민적 합의를 위해 민주적 의사소통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 지식인, 비평가가 사회적 분업 속에서 갖는 역할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성실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역할에 충실했던 젊은 비정규 마감 노동자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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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대중문화와 한국사회를 아우르는 ‘괄호 안의 불의’에 대한
민감하고 성실하고 단호한 싸움의 기록
촛불로부터 지금까지의 2~3년이라는 시간은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전보다 나아졌다는 뜻이 아니라, 불의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괄호 안의’ 기본 값이 사실은 힘으로 유지되는 모순투성이의 것이었고 이제는 이를 더 이상 외면하고 넘어갈 수 없는 ‘불편한’ 것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은폐된 거짓 평화의 시대는 저물고 첨예한 싸움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는 협소하게 이해된 정치라는 그릇에는 온전히 담을 수 없다. 삶의 양식과 사회의 근본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은 바로 ‘대중문화’다.
전작 《프로불편러 일기》(2016)를 통해 세상에 무시해도 되는 불편함이란 없으며 공론장에서의 정당한 논의를 통해 사회와 문화의 진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대중문화 전문 기자, 마감 노동자 위근우가 촛불 이후의 대중문화와 한국 사회를 주제로 한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페미니즘, 공론장, 대중문화를 주로 다룬 실천적인 글들이다. 그는 지난 2년 동안 ‘강요되는 화해’, ‘괄호 안의 불의’, ‘침묵하지 않는 피해자에 대한 거부감’에 특히 맞섰다. 잘못된 것으로 판단한 것들에 대해 선명하게 입장을 제출하고, 실명 비판(또는 지지)했다. 논쟁에 뛰어들어 지금까지의 통념의 관성에서 보자면 “거슬리는” 언어를 세상에 던졌다. 이를 통해 한국 사회에서 불편함의 변증법이 작동되기를 바라며 단단한 글들을 쓰고자 노력했고, 그 중 42편을 선별해 다듬고 각각의 글마다 후기를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벌써 “과도한 PC함”에 대한 피로를 말한다. 솔직해지자. 지금 한국 사회와 대중문화가 그런 걱정을 할 정도로 민주적인가? 이전보다 조금 더 나아졌다는 핑계를 앞세우며 진정한 변화에 대한 요구에는 모르쇠하고 회피하거나, 더 나아가 사소한 기득권을 지키고자 변화를 억압하고 기존의 문제들을 묵인하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치열한 사회적 공론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잘못된 것과는 결별하려는 투쟁 없이 획기적인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 찜찜함 없이 정말로 ‘모든 사람들’이 함께 마음 편하게 웃을 수 있으려면, 더 많은 이들이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불편함을 참고 넘기지 않고 선을 긋고 싸운 민감한 젊은 마감 노동자의 기록을 독자들에게 권하는 이유다.
강요된 화해, 그 이퀄리즘은 틀렸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과격하다고 말하며 각광받았던 ‘이퀄리즘’이라는 개념(?)이 있다. 사실상 나무위키를 통해 날조된 이 개념은, 그러나 “싸우지 말고 지내요” 같은 정서에 기대어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억압과 차별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왜 싸움(Fight)을 평화(Peace)로 대체하자는 논리가 힘을 얻는가? 기울어진 기본 틀을 의심하지 않는 평화는 억압의 다른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의 ‘기본 값’을 긍정하는 힘을 가진 이들은 큰 변화에 대한 거부를 평화로 간주한다. 이미 괄호 속에 전제된 불평등과 불합리가 균열과 충돌에 민감하게 반응할 때 이를 체제 내부로 흡수하고자 한다. 힘을 가진 이들이 질서를 짜고 만들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페미나치’(확장하면 ‘강성노조’)의 프레임을 씌우고 ‘순종적인 희생자’만을 인정한다. 안티-페미니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현상은, 사실 한국사회의 여러 제반 문제들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이를 ‘도덕’과 ‘교양’의 영역에서 이해한다.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이해관계’ 문제다. 그렇기에 강요된 화해는 누군가에 대한 폭력과 같다. 페미니즘 반대자들은 젠더 이슈에 둔감한가?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젠더 권력에 대해 몸으로 체화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형태로 본능적으로 반발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는 것이다. 최근 이슈가 된 ‘20대 남성’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짐짓 그들과 자신을 분리하고 있겠지만, 긴 시간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수많은 자신의 과거 문제 발언에 대한 비판 논쟁에 고소로 대응했던 사람, 세월호 희생자 추모 소설에 성적 대상화가 명백한 표현을 쓰고도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격분했던 사람 등도 문제가 큰 것은 마찬가지다. 기본 값이 틀린 사회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잘못된 상황 자체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전략과 전술을 훈수 두는 이들에게 특히 선행되어야 할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안이한 생각은 변화를 늦추고 피해자를 양산한다. 명확한 태도와 따끔한 이야기를 피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공론장을 파괴하는 아무 말 카오스
명확한 근거를 가진 공론장에서의 논쟁을 통해 사회가 진보하는 것은 이상적이지만, 자주 여러 장애물에 봉착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그러한 상황을 조장하는 것은 단연 ‘지식 셀럽’과 ‘방송’ 매체다. 사실에 근거하고 치밀하게 구성된 논리보다는 예능 프로그램 등을 통해 획득한 명망을 통해 권위가 부여되고 이것이 순환되면서 어느새 근거를 알 수 없는 권력이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극적인 ‘썰’, ‘과잉’ 서사, 시도 때도 없는 ‘직관’이 등장한다. 검증 없이 계속 제기되고 순환되는 지식 상품은 어느 순간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카오스로 공론장을 전락시킨다. 가짜 뉴스보다 어쩌면 더욱 경계해야 할 ‘가짜 논의’가 태어난다. ‘차별금지법 반대를 금지하는 것이 차별이다’, ‘여성혐오 텍스트를 공부하지 않는 것은 살균된 문화 디스토피아를 부를 수도 있다’ 같은 류의, 논의의 민주적 기본 틀을 붕괴시키는 논리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이러한 논의 구조 역시 교묘하게 숨어든 ‘괄호 안의 불의’다. 그래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논박해야만 공론장을 지킬 수 있다.
그냥 넘어가지 말고, 헛소리에는 딱 그만큼의 대우를!
전작 《프로불편러 일기》의 첫 번째 글 에서부터 신간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의 마지막 글 까지 저자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린 헛소리에는 딱 그만큼의 대우”가 필요하며, 사회적 공론 과정을 통해 가장 덜 폭력적이면서도 합리적인 비판과 규제(혐오 표현 금지, 차별금지법 제정 등)를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만 안 그러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공적 영역의 문제들을 바로잡을 수 없다. 권력자가 아닌 만인의 자유를 위해 법 제도가 존재해야 하며, 그 바탕이 되는 시민적 합의를 위해 민주적 의사소통 공론장을 만드는 것이 지식인, 비평가가 사회적 분업 속에서 갖는 역할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성실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역할에 충실했던 젊은 비정규 마감 노동자의 분투기이기도 하다.



홍지아
4.0
나는 여기저기 흔들리는 사람이라 이렇게 확신을 갖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내 생각의 빈 부분을 메워주는 논리들이 많았다. 갖다가 써야지.
이혜원
5.0
악! 위근우다 ! 무슨 뜻의 제목인지 너무 알겠다 ㅋ 이하 발췌 1 증명해야 할 것은 아이린의 잘못 유무가 아니다. 질문하고 증명해야 할 건, 과연 손나은과 아이린과 수영에 분노하고, 걸스캔두애니띵이란 표현에 신경이 곤두서는 한국 남성 부족을 현대문명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 이 부족이 갖고 있는 논리체계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이들의 일관된 태도를 확인해야 한다. 즉 문재인 대통령이 82년생 김지영을 선물 받고 김정숙 여사가 읽었다는 것에는 분노 하지 않다가 수영과 아이린에게 분노하는 비일관성보단, 아이린의 독서에 대한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보이 그룹 엠블랙 출신 지오가 장애인비하 등으로 유명한 BJ 철구를 좋아하고 또 이를 존중해 달라고 하는 것에 침묵하는 비일관성 보단, 여성 아이돌이 주체적인 자기 생각을 드러낼 때마다 분노하는 일관성의 맥락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해 봐야 한다. (...) 한국 남성들이 아이린과 손나은이 잘못했다고 믿는 건 그들이 경험하고 공유해온 어떤 질서를 아이린과 손나은이 위반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걸그룹 이 성적으로 객체화 되고 상품화된 존재여야 한다는 경험적 질서다. 그들에게 걸그룹은 노출하거나 섹시댄스를 주거나 유아적인 복장을 하거나 애교 자판기 역할을 하는 존재다. 또한 꽤 오랜시간 실제로 그러했기에 한국 남성 부족은 이것을 서로 합의된 규칙으로 받아들였다. 여기에 기획사들이 일조했다는 사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한국 남성 부족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아이린은 기존의 신사협정을 위반한 것이다. (...) 기존의 믿음은 가상적인 질서다. 여기까지 인식할 수 있다면 그 동안 기획사와 자신들 간에 합의 됐다고 생각했던 규칙은 시장논리 안에서만 잠시 통용 됐을뿐 도덕적으로 타당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변화할 수 있다는 인식에도 이를 수 있다. 또한 자신들이 아이린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려면 공동체적인 규범을 전제해야 하며, 그걸 전제하는 순간 걸그룹 멤버도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주체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게 당연하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즉 자신의 내부 모순을 인식하고 고쳐야 한다. 이것이 이들 부족을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다. 2 비겁하다. 그들은 더 나아가지 못한게 아니라 안전한 거리를 잰것이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 하되 인기 BJ 와 그들의 팬덤과 척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 모든 책임으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거리. 물론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 앞에서 비겁해 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안전한 거리가 남성연예인에게만 꾸준하게 허용되어 온 권력에 가깝다는 것이다. 여성 연예인은 여성이 인간이라는 것에 동의만 해도 남혐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남성 연예인은 비윤리적인 콘텐츠에 대한 동의처럼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하고도 자신은 몰랐다고만 하면 끝난다. 그들은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게 아니라 그들에게만 허용된 안온한 자리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겠다. 여성혐오적 발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BJ들의 방송을 보고 그에 대해 해명하면서도 끝끝내 그들의 폭력적 말과 행동은 잘못된 것이라고 발언하지 않는 남자들의 비겁한 침묵 때문에, 성추행 피해자에 대한 연대를 밝히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여성들이 굳이 용기까지 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지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야 마땅하지만, 이 상식적인 발언에 비난을 감수하고 용기를 내야 하는 사회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비정상적인 사회에서의 용기를 칭송하기 보다는 비정상적인 사회를 공고히 하는 요소를 경멸하고 개선해야 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남성들의 비겁함이다. 3 6.13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 시장'을 전면에 내세운 녹색당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벽보에 대해 최근 한 유명 남성 인권 변호사는 "개시건방진 사진"이라며 "나도 찢어 버리고 싶은 벽보"라고 자신의 SNS에 발언했다. 발언이 문제가 되자 사진 구도와 벽보 분위기에 대한 비평이었을뿐 후보에 대한 공격은 아니었노라 딱히 이해되지 않는 해명을 하긴 했지만, 해당 벽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사람들은 그 하나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변호사 스스로 "나도" 찢고 싶다고 말했듯, 이미 서울 곳곳에서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를 감싸는 비닐이 찢어지고 벽보가 사라지고 담뱃불로 눈 부위를 지지는 등 훼손 사례가 22건에 달하고 있다. (...) 브아걸이 시건방진 여성의 이미지로 결국 "널 내가 내가 갖겠어"라며 얼핏 역전된 듯 보이지만 사실 남성의 이성애 판타지를 만족시킨다면,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신지예는 시건방진 여성이란 신체 이미지로 남성중심적인 사회를 종식시키겠다는 메세지를 드러낸 셈이다. 이렇게 보면 그 남성 변호사의 해석은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예민하고 직관적으로 자신들의 세계에 대한 위협을 읽어냈다. 단지 반응이 옹졸했다. 신지예의 눈빛과 사진 구도로부터 계몽주의를 일궈냈던 남성 변호사와, 페미니스트들이 책 읽고 공부하라고 말해서 싫다고 징징대는 남성들이 다를게 뭔가. 그들은 신지예 후보의 벽보가 드러내는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정신 앞에서 자신들이 시대의 물결에 떠내려가야할 존재임을 직감 했을 뿐이다. 스스로 더 시건방진 후보가 되겠다고 선언한 신지예의 반응은 그래서 더 빛난다. 자신은 시건방진게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사회가 시건방진 여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벽보 이미지가 가진 파괴력을 배반하지 않는다. (...) 그들은 젠더 이슈가 권력의 문제라는 것을 체화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대한 도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한국 남성들이 여성혐오를 유희로 즐길 자유, 불법촬영물을 즐길 자유. 일상적 성희롱을 할 자유를 지키기 위해 백래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도덕적 당위가 아닌 젠더 권력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 남성들에 대한 도덕적 설득 혹은 설복도 중요하지만, 우선 본인에게만 좋던 과거는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체념 시키는 것이 먼저다. 그들이 버티는 건, 단순히 본인들의 주장이 옳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본인들이 주장하는게 옳은 것이 될 수 있던 시대를 살아와서 다. 4 정치 철학자인 벤자민 바버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유가 "한 종류의 음식에 곁들여 나오는 양념소스를 선택하는 자유와 닮아 가고 있는 것"이라고 비꼰 바 있다. 이것은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서울의 몇 몇 지하철역에서 확인한 광고를 보면서도 든 생각이다. 저 수많은 상업광고가 특정 성에게 특정한 역할만을 강요하면서 마치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해서 소비할 수 있는 것처럼 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우스운 건 이처럼 성, 정치, 이념에 대한 특정한 방향의 메시지가 지배적인 장에서 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성, 정치,이념을 담았기에 게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서울교통공사다.(...) 김태호 사장은 지하철이 논쟁의 장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변화를 원하지 않는 기득권에겐 논쟁의 장이 필요 없다. 논쟁의 장이 필요한 건 언제나 당연하게 착취당하거나 배제당하는 이들이다. 논쟁의 장을 축소 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동이다. 저토록 여성을 배제하고 주변화하는 지하철 광고의 담론장 안에서, 지하철 페미니즘 광고는 허락받을 사안이 아닌 요구해야 마땅한 시민의 권리다. 5 하지만 이러한 웹툰 특유의 핍진성은 묘사된 현실에 대한 반성적 전유를 거치지 않을 때 자칫 세상의 통념들을 재생산하는 데 그치게 된다. 현실에 일진이 있으니 일진이 나오고, 현실에 폭력이 있으니 폭력이 나오며, 현실에 여성혐오가 있으니 여성혐오가 나온다. 많은 경우 핍진성과 재현의 윤리 사이에 반목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이것을 동시대를 반영하는 작품과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작품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창작에 있어 동시대에 대한 민감성이란, 단순히 지금 이곳의 풍경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여러 구조적 모순과 부조리까지 인식하는 능력이다. 현실을 더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라도 현실의 이면에 작동하는 구조와 권력의 메커니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리얼리티란 결국 세상을 읽는 성실성에 달렸다. 6 음모론에는 철칙이 있다. 두세명의 작당으로 가능한 음모는 실현 가능성이 제법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수십 명이 가담해야 하는 음모론은 허구의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런 저런 배우 세력과 과정을 최소화한 설명은 어떨까. 82 년생 김지영은 어떤 한국 남성들이 말하는 것처럼 편향적이고 왜곡된 사회인식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정말로 한국 여성들이 그동안 겪었던 차별과 배제를 충분히 납득 가능한 보편적인 관점과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풀어낸 소설이며 그러한 소설을 보고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공감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 구매했으며, 또한 이것이 그동안 억눌렸던 한국 여성 독자들에게 하나의 신드롬으로 발현되어 2년 만에 100만 부 판매에 이르렀노라고. 출판사나 페미니스트 같은 특정 배후 세력의 음모와 공작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그냥 시장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된 수요와 공급 곡선이 지금과 같은 숫자로 이어졌노라고. 흔히 음모론의 문제를 다룰 때 인용되는 오컴의 면도날 법칙은 다음과 같다.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그에 대한 불필요한 가정이 가장 적은 설명이 진신일 확률이 높다는 것. 그렇다면 로지스틱스 곡선이나 k값 같은 드라마틱한 가정이 없더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100만명이 공감할만큼 잘 쓴 소설이 팔릴 만해서 팔렸다는 설명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아,물론 이 설명해도 하나의 가정은 추가 되어야 한다. 82년생김지영을 악마화하고 평가절하하며 그와 관련된 모든 소식에 분노하던 남성들의 목소리가, 사실 그 크기에 비해 사회적으로도 시장에서도 그다지 영향력은 없다는 것. 7 하지만 결국 그들이 자신들의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본인 여친을 몰래 찍어 인증한다면 진정한 약자는 누구인가? 그들은 상실감을 말하지만 실제로 발견되는 것은 비뚤어지게 행사되는 남성의 젠더 권력이다.(...) 20대 남성들의 혐오정서를 밑바닥에서부터 제거하기 위해 그 정서의 기저에 깔린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기 이전에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혐오발언을 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는 사회적 합의를 이룬 적이 있나? 오히려 최근 드러난 웹하드 카르텔처럼, 사회적 합의는 커녕 사회적 묵인 속에 기득권으로의 남성들이 권력을 누려오다가, 이제야 그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대해 '상실감'을 느끼고 징징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징징거림을 이해해주기 이전에 어쨌든 그동안 아무 제재 없이 그들이 누려왔던 것이 잘못된 것이고, '그렇게 행동하면 이제는 좆 될 수 있다'는 사회적 경험을 만드는게 우선이지 않은가? 이제야 비정상의 정상화를 위한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데, 그걸 기어코 함께 가지 않겠다고 버팅기는 이들에게 ' 너의 이유는 뭐니'라고 물어 볼 필요가 있을까. 8 설민석의 스토리텔링 강연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쉽고 재밌게 습득하는 것 까진 좋다. 하지만 그의 역사의식에 대해서까지 권위를 줄 때 설민석 스토리텔링의 뼈대를 이루는 민족주의적이고 영웅 중심적인 역사관은 구시대적 국뽕을 강화할 수 있다. 철학 저술가로서 강신주가 철학대철학 같은 저술로 철학을 대중화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해당 서적의 개정증보판을 내며 진행한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고 발언하는 건 건방진 일이다. 바로 그 인간 보편이란 개념에 어떤 불의한 권력이 개입했는지 드러내고 해체하는 작업에 페미니즘의 성과가 있다는 것을 성찰하지 못하는 이가 "50년 후에는 나만 남는다"고 자신 하는 건 자의식 과잉이다. 이것은 '지식 셀럽' 본인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제대로 지식을 필터링 하는 역할을 포기하고 지식 셀럽의 발언들에 권위를 더해주는 방송의 잘못이기도 하다. 유명해지고 싶은 개인과 쉽고 빠르게 다양한 이슈에 대해 지적으로 보이면서도 재밌는 콘텐츠 유통 하고 싶은 방송이 공모를 한 셈이다.(...) 지상파 시사프로그램이 의견을 구하고 마이크를 쥐어 줄 때 그의 허술한 발언엔 지적 권위가 과잉 부여된다. 한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과 성찰이 필요한 자리조차 조커로서의 지식 셀럽이 차지하고 발언을 독점하는 것은 공론장을 퇴보 시킨다. 9 남성을 계몽시키는 것이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전략과 방법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것을 또 다시 여성들의 '의무'로 두는 것은 성 불평등 사회에 대한 남성들의 '책임'을 지워 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무지가 몰라도 되는 권력의 위계 안에서 형성된 것이라면, 그 무지는 투명한 지적 공백이 아니라 '몰라도 되는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발은 반성과 부끄러움이거나 최소한 책임감이어야 하며, 당연히 공부 역시 스스로의 몫이다. 아무리 정중한 태도라 해도, 성 불평등의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당신들의 피해를 입증해 보라고 하는 것, 당신들의 현실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와 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서 오만방자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에 대한 '공부는 셀프'라는 면박이 그렇게 무례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10 사실 젠더 간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하려던 <까칠남녀>에 필요했던 것이 기계적 성비균형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예능과 토크쇼가 남성에게 마이크를 주는 이곳에서, 진정한 균형은 진정 차별에 저항하는 것은, 여성의 목소리에 좀더 제대로 힘을 실어 주는 것을 통해 가능하지 않을까. 당장 정용진을 비롯한 남성패널들을 정리하라는 주문은 아니다. 다만 이토록 흥미롭고 유의미한 기획 임에도 기계 성비 균형과 의견균형에 대한 강박으로 쇼 안에서 야만적인 발언이 허용되고 동등하게 다뤄지게 된 것에 대해 제작진야말로 성찰적인 중간점검과 AS가 필요해 보인다. 정영진을 통해 까칠남녀가 여성들에게 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유효한 메시지는 정치적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 지식인이라 해도 여성혐오 문제에서만큼은 철저히 보수적이거나 이중적이니 진보 남성이라고 큰 기대를 하지는 말라는 것 뿐이다. 11 죽어가는 골목상권이 있다. 백종원이 출동한다. 기본이 안 된 자영업자가 있다. 심지어 고집도 있다. 겸손히 배울 자세가 될 때까지 백종원이 해당 자영업자의 영혼까지 탈탈 털어 무력화시킨다. 출연자가 넙죽 엎드리고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솔루션이 시작된다. 이것이 <골목식당>의 일관된 패턴이다. 이 과정은 백종원이 제시하는 검증된 레시피만큼이나 실용적이다. 홍탁집 사장은 백종원의 말대로 더 창피를 당해야 봐야 정신을 차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한 지상파 예능이 누군가의 망신을 생중계하고 모두가 손가락질 할 기회를 주는 대국민사기 쇼로 진행되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골목식당은 이런 징벌적인 서사 및 쾌감에 대한 당위적 근거를 마련하는 대신, 백종원이라는 존재의 권위로 알리바이를 대처한다. (...) 고집 부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수컷은 더 강하고 훨씬 치밀한 수컷만 이길 수 있다. 백종원은 말하자면 진화한 형태의 알파메일 우두머리 수컷이다. (...) 하지만 이들의 관점에 정서적으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백종원이 권위로서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식이 이명박 스타일의 "내가 해봐서 아는데" 와 대동소이한 서사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떠올리면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골목식당에서 보여 주는 백종원의 모습은 자신의 경험에 절대적 지위를 부여하고 복종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종원의 솔루션은 컨설팅 보다는 훈육에 가깝다. 그의 권위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구현된다. 늦잠을 자고 공부를 게을리하고 게임을 하느라 바쁜 아이를 혼내는 아버지, 자식 잘 들으라고 엄하게 대하는 아버지, 그리고 모두들 아버지 말대로 하는 게 맞다고 말해 주는 그런 아버지. 전문가로서의 권위는 <골목식당>의 훈육 서사를 통해 가부장적 권위로 전환된다.(...) 미숙한 장사꾼이 성공하기 위해선 쓴소리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미숙한 장사꾼이 욕먹어도 싼 사람이라는 건 전혀 다른 개념이다. 골목식당이 징벌서사인 건 후자의 방식으로 프로그램의 갈등구조와 재미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입장에서 백종원은 필요한 설득 대신 자신의 권위로 밀어붙이는 것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골목 식당은 그런 불가피함을 설명하기 보다는 출연자들의 고집과 미숙함처럼 비호감인 부분을 강조하고 누군가 혼나고 모욕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지워 버린다. 골목식당 시청자들은 자신들과 훨씬 가까울 일반인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혼나는 기분을 느끼기보다는 백종원의 입장에서서 징벌 서사의 쾌감을 정당화한다. 가부장적 서사는 새로운 방식으로 회귀한다.(...) 이것 자체를 퇴행적이라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경험적 지혜를 존중하는 것과 추종할 만한 권위를 찾아 기대는 것, 성공을 위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과 성공하지 못한 이들은 노력하지 않았다고 구박하는 것, 미숙해서 혼날 수도 있다는 것과 미숙한 건 혼나 마땅하다는 것 사이엔 명확한 구분선이 없다.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실천적 위치를 확인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과거의 억압적 가부장제 사회처럼 언제든 강한 우두머리 수컷에 대한 동경은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질 수 있다. 12 왜 드라마로만 오면 한국 남자 패치가 붙는 걸까.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계룡선녀전>과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이야기이다. (...) 이성애적 로맨스는 장치일 뿐, 중요한 건 이현을 포함한 각 인물들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 구도에서 옥남은 선인의 도를 지닌 굳건한 존재로서 흔들리지 않고 이현과 김금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버럭남' 이현이 옥 남에게만 자상해지는 모습에 집중한다. 얼핏 이현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실제론 까칠하지만 내 여자에게만 따뜻한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끌리는 여성이라는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가 반복될 뿐이다. (...) 결국 서사 안에서 확대되는 건 무례한 남성의 영향력이다. <일단 뜨겁게 청소하라> 원작 웹툰은 명백한 이성애 로맨스지만, 여기서 성결과 오솔은 치유적인 관계다. 오솔을 통해 예민한 성결은 조금씩 결벽증을 고쳐 나가며 오솔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각한다. 드라마에서도 오솔은 성결하게 할 말은 하는 당찬 성격으로 그려지지만 결과적으로 오솔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선결, 더 정확히는 무례하고 안하무인인 남자이자 CEO로서의 권력이다. (...) 오소리 복수를 해줄 수 있는 것도 그가 참지 않고 내리는 성격이라 가능한 일이다 고민하는 과정이 없으니 해결도 쉽다. 다시 한번 남자의 무례함은 서사에서 매력적인 미덕처럼 포장된다. (...) 예민하고 생각이 많아 매력적이다.. 남성 캐릭터가 굳이 무례하고 목소리 크고 독선적인 남성으로.. 원작의 서사구조 역시 이성애적 로맨스를 중심에 둔 흔한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에 한없이 가깝게 소급한다. 그렇다면 처음에 했던 질문에 이렇게도 답할 수 있지 않을까. 드라마에 한국 남자 패치가 붙는 것이 아니라 한국 남자 패치가 한국 드라마 패치라고.
Dongjin Kim
4.5
김연수는 "아름다운 문장을 읽으면 당신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라고 썼다. (『우리가 보낸 순간 · 시』(마음산책, 2010)에서) 이렇게도 썼다. "매일 쓴다고 해서 반드시 글을 잘 쓰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사실만은 장담할 수 있다."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마음산책, 2010)에서) 앞의 말은 이렇게도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문장을 쓰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된다, 라고. 애초 타인을 향한 공격이나 비난이 아름다울 리야 물론 없으므로, '아름답지 않은'은 '나쁜'으로 치환하는 게 낫겠다. 물론 이 말은, 글쓰기와는 달리 거의 아무런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 '덧글 쓰기'를 통해 아무런 검열과 비판 의식도 없이 타인을 험담하거나 모욕하는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는 쪽이면서도 나는 늘 나보다 예민하고 사려 깊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운다. 위근우 기자는 그런 깨우침을 주는 필자 중 한 명이다. 이후에 다룰 목차들에 대하여, 프롤로그에서부터 이미 어떤 단단함과 치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설어진
4.0
1부 그 이퀄리즘은 틀렸다 너 무 명쾌하고 날카로워요 쵝 오
더블에이
4.5
역지사지는 생득적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오는게 아니고 머리로 고뇌하고 생각하고 공부해야하는 것이다.
무식쟁이
4.0
역시 실망시키지않는 주제들,문장들. 다른게 아니라 틀린거라고 예민한게 아니라 당당한 이의제기라고 좀 더 크게 말할 수 있게 되기를.
홍안
4.0
몇 년 간 화두에 올랐던 이슈들을 명확한 관점을 가지고 '적확한' 언어로 지적한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핵심만을 추려 언급하기에 빼어난 가독성은 덤이다. 그를 저급한 말로 매도하려는 세력에 휘말리지 않고 위근우 기자가 계속해서 약자의 편에 서 주었으면 한다.
Audrey1203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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