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화, 실명소설을 쓴 배경
언제부턴가 6·25전쟁을 잊혀진 전쟁이라고 한다. 6·25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살아있는데 그런 표현은 과연 적절할까. 더욱이 군인의 신분으로 6·25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 사람이 살아있는데도 말이다.
작가가 상주로 가는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두 노인은 자신들이 참전한 6·25전쟁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내고 있었다. 모처럼 이야기를 들어줄 상대를 만난 기색이어서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여든 나이인 그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이 사회에서 소수자의 위치에 처해 발언의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은 계층이었다. 그들 앞에 붙은 국가유공자라는 수식은 그들의 위치를 개선시키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 그들, 상주 외곽에서 벌어진 화령장 전투에서의 승리를 유쾌하게 증언하는 두 노인을 그 후에도 몇 차례 더 만났다. 누군가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어야만 이 사회가 공평하지 않겠냐는 게 작가의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처럼 이념의 과잉을 걱정하는 나라가 지구 위에 또 어디 있는가. 6·25전쟁 = 반공이란 등식이야말로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선입견이며 또 다른 마타도어이다. 두 노인이 고집스레 내세우는 반공을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으며, 최대한 이해하려고 노력해볼 가치가 있다.
결국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다시 되풀이될 위험이 농후한 과거의 역사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낳았던 동족끼리의 전쟁을 되새기면 미래에 대한 어떤 전망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대부분 실명으로 사용한 것도 그런 의도이다.
2. 다큐맨터리로 쓰지 못한 까닭
작가는 처음에 두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으려 하였으며, 그 형식으로 다큐멘터리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면서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의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 어려움은 개인의 자격으로 규명하기 버거운 6·25전쟁의 복잡한 양상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6·25전쟁은 사실의 방대함과 자료물량의 방대함을 요구하는 역사였다. 작가는 그 방대함을 감당할 수 없어 슬그머니 소설이란 형식으로 글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조차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3. 저격능선 전투를 중국은 어떻게 보는가
무자비한 살육의 소모전이 오성산 저격능선狙擊陵線에서 벌어졌다. 중국 군대가 한반도에 와서 싸운 그곳에서의 전투를 저들은 상감령上甘領 전투라 부른다. 저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주장한다. 제국주의와 마지막으로 싸워 이긴 전투라고. 그와는 반대로 저격능선 전투는 우리로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다.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5일까지 보병 17연대가 참전했던 저격능선 전투는 휴전회담이 타결돼가는 시점에서 다시 불붙었다. 그 전투에서 17연대로부터 전선을 인수한 9사단은 중공군에게 저격능선을 빼앗겼다. 저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저격능선과 삼각고지 전투를 묶어 상감령 대첩이라 이름 부쳤다. 그리고는 주장한다. 제국주의와 마지막으로 싸워 이긴 전투라고. 13억 중국인의 애국심을 부추기는 전투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란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