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극화 시대 대러시아 정신의 견인차,
서구 언론이 ‘푸틴의 브레인’으로 명명하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정치분석가이자 철학자인
알렉산드르 두긴의 “민족” 탐구
왜 지금 “민족”을 이야기하는가
이 책의 번역, 출판을 기획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랜 시간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라는 용어가 ‘국민’이라는 용어와 뒤바뀌어 사용되면서 각종 혼란이 야기된 데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이 독일 법학자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Nation=국민, Volk=민족”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을 그 반대로 잘못 옮긴 데서 비롯되었다. 이 오역이 125년 전 이 땅에 들어온 이래 수많은 혼란이 일어났다. 특히 1990년대 이래 신자유주의가 위력을 발휘하면서부터 민족에 대한 폄훼가 본격화됐다. 가장 끔찍한 것으로는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민족주의=가부장주의의 도식하에 매도당한 일이다. 더불어 식민지시대 독립운동사 전체가 위기에 처하게 됐다. 지구상 가장 많은 민족(190개 이상)이 가장 평화롭게 살고 있는 러시아 대륙의 민족사회학자 알렉산드르 두긴이 서구 이론들을 비교하면서 체계화한 ethnos(민족) 개념은 우리가 맞고 있는 민족의 위기를 풀어 갈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보편적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은 항상 구체적이다.”
알렉산드르 두긴은 러시아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학문적으로 처음 사용한 세르게이 시로코고로프의 민족 정의를 빌려, 민족의 기본적인 특성을 정의한다. 이에 따르면 민족 정의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민족이 특정 전통과 관습과 도덕적 관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관습과 삶의 방식 및 전통 등이 한데 어우러진 복합성으로 특정 민족의 성격이 형성되고, 따라서 개별 민족마다 서로 다른 특징을 보여 준다. ‘보편적 민족’이란 표현은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없으며, 다원성에 대해 반대할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범지구적 민족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민족은 항상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다.
누군가는 범지구적 소시움(socium)을 인위적으로 사회학적, 정치적 구조물로 말할 수는 있지만, 범지구적 민족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소시움을 범지구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겠지만, 민족은 항상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다. 도덕의 중심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중심에는 항상 특정한 가치체계의 주장이 존재한다._본문 33~34쪽
‘더 발전된’, ‘덜 발전된’ 사회는 없다
저자 두긴은 민족 분류와 개념 정의에 있어, 그 어떤 위계적인 평가도 거부한다. 특히 민족사회학에서는 인종적, 인종주의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회는 복잡하고 뒤얽힌 모습부터 단순하고 원시적인 모습까지 다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민족은 단순한 사회이다. 본질적으로 특정한 지리적 영역과 유기적으로(자연적으로) 결합되어 있고 공동의 도덕, 관습, 상징체계를 통해 하나로 묶여 있다. 두긴에 의하면 인간 사회는 우월한 사회도 열등한 사회도 없으며, 개별 사회에서 나타나는 행위나 의식 혹은 말도 그 사회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다른 사회의 시각에서는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학문의 한 분야로서 민족사회학은 생물사회학적 접근도, 더 중요하게는 인종적 접근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족사회학은 인간 현상으로서의 민족과 민족의 파생물인 사회, 즉 동물적, 물질적 구성 요소 어느 것도 지배적이거나 결정적이지 않은 ‘인간 사회’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민족사회학은 ‘하위 사회’와 ‘상위 사회’, ‘더 발전된’과 ‘덜 발전된’, ‘보다 완벽한’과 ‘덜 완벽한’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는 사회 분석을 거부한다.”_본문 141쪽
서구화가 역사의 진보는 아니다
두긴은 다양한 인간 공동체의 모습을 이해할 때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태고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여러 가지 형태의 사회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들 사회가 역사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연속적이라는 시각이다. 네이션이 과거와는 단절된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서구적 입장과는 다르다. 둘째, 역사의 보편적 발전 경로를 거부하며, 인간 사회 또한 한 가지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 사회는 역사 흐름에 따라 복잡한 사회로 변모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단순한 사회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단순한 사회로 간다고 해서 퇴보가 아니며 복잡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진보가 아니다. 두긴은 유럽과 미국의 현대 서구사회, 서구의 기술과 가치가 세계 여타의 부분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경직된 확신, 서구와 다르다는 것을 후진성, 저발전, 열등을 나타내는 것처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며, 세계 여러 나라 주요 학자들의 연구와 구체적인 역사를 들어 그와 같은 관점이 성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