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Name: Carmen
Prénom Carmen
1983 · Crime/Drama/Music/Romance · France
1h 25m · NC-17

The protagonist is Carmen X, a female member of a terrorist gang. She asks her uncle Jean, a washed-up film director if she can borrow his beachside house to make a film with some friends, but they are in fact planning to rob a bank. During the robbery she falls in love with a security guard. The film intercuts between Carmen's escape with the guard, her uncle's attempt to make a comeback film, and a string quartet attempting to perform Beetho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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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s Arms

Needing Window
MavericK
4.5
기술적 진보의 산물로 영화는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변화했다. 가득 찬 필름 릴은 하나의 비디오 테이프로 형태를 바꾸었고 음악 또한 LP에서 카세트 테이프로 완전히 대체 가능한 것 처럼 보인다. 대중들은 예술을 단발적으로 소모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점차 ‘가벼워지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쩌면 계속되는 발전을 통해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편의성을 추구하며 패러다임이 변모해나가는 것은 필연적으로 예비된 역사적사건 일지 모르겠다. 68혁명 보다 빠르게 역동하는 80년대의 프랑스에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 고다르는 무거움 그리고 가벼움에 관하여 영화를 통해 철학하는 면모를 보인다. 누벨바그의 기수이자, 저항의 선두였으며 스스로 새로운 사조를 개척했던 그는 세월을 견뎌 더욱 완숙해졌으며, 다시금 가벼워지기 위해 무거움에 집중한다. 고다르는 70년대에 이미 ‘만사형통’을 찍어 어떻게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애를 썼지만 새로운 거대한 흐름 앞에 좌절을 맛본 경험이 있다. (‘만사형통’이 범작인 이유는 대책없이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가벼워짐에 따라 자연스레 영화 또한 가벼워진다. 영화를 통해 혁명을 시도하던 그의 생각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 처럼 느껴진다. 중년의 장 피에르 레오가 출연한 또 다른 80년대 영화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쇄’를 비롯한 그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관객에게 유행에 종속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카르멘이라는 이름’ 또한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다. 감독 본인이 본인의 역할로 등장하며 현실의 자신을 희화화하고 희롱하는 그 순간마다 쇼트들은 네러티브 위주의 서사적 흐름에서 탈피하며 마치 액자식 구성처럼 입체적으로 구조를 창조하여 영화와 영화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그 행간에 유머를 끼워넣음으로써 영화는 우아하게 가벼워진다. 구조의 빈틈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것. 이것은 고다르가 즐겨 사용했던 편집방식인 점프컷과 소격효과같이 실행과정은 다르지만 그것들과 유사한 결과를 공유하고 있다. 낯설게 느껴지고 놀랍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가 영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순간 영화는 관객을 일깨우는 계몽의 수단이 되는 것 이다. 초기 프랑스영화들이 독일의 표현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 처럼 고다르는 영화밖의 인물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영화에서 갖추어야 할 바람직한 태도에 관하여 깊은 인상을 받았다.(‘경멸’에서 프리츠랑 감독이 직접 출연하고 고다르는 그의 조감독으로 등장하며 직접적으로 브레히트가 옳았다 언급한다.)나는 이러한 방법론이 21세기에는 유효하지 않다 생각하지만 이곳에서 내 생각은 불필요하기에 다시 영화로 돌아가겠다. 앞서 언급했던 가벼움과 무거움에 초점을 맞추어 영화를 감상한다면 상당히 흥미롭다. 이것이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영화제목에서 파악할 수 있듯 ‘카르멘이라는 이름’에서 카르멘은 익히 알려진 유명한 문학이며 오페라이다. 감독은 문학과 오페라를 레퍼런스로 구성과 형식을 갖춘 뒤 자유자제로 가벼워지기 위한 시도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무겁고 가벼운 것 인가? 연극과 문학 그리고 음악은 영화 탄생 이전에 발생한 예술이다.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며 스스로 예술임을 증명했고 끝없이 검증받는 동안 단계적으로 현재의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3가지 예술들은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비례하여 광장히 장엄해보이며 무게감 있다. 반면에 영화가 존재한 물리적시간은 타 예술에 비해 짧아, 비교적 가볍게 느껴진다. 애초부터 가벼운 속성을 지닌 영화는 특유한 카메라의 운동성을 바탕으로 문학과 연극이 100년 동안 이뤄낸 성취를 단 시간내에 이룩하고자 했으며 그들과 동일한 지위를 얻고자 노력했다. 실로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의 연속이었다. 예를 들어 오늘날 발매되는 게임은 결코 예술은 아니지만 영화보다 더욱 가벼운 특성을 지녔다. 압도적인 그래픽과 게임성을 기반으로 고객들을 유혹하여 빠르게 소비되기를 원하고 있다. 영리하게도 게임은 화려한 시네마틱 영상을 앞세워 소비자의 주의를 끈다. 시간적으로 앞선 ‘선배’인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처럼 보인다. 성공을 위해 자신과 비슷한 가벼운 성질을 가진 영화의 이미지를 취사선택하여 십분 활용하는 것 이다. 영화 또한 선배들인 연극과 문학에 영향을 받고 그것에 기대어 기술적으로 진보했다. 영화에서 고다르는 요즘 젊은이들은 스스로 창조하는 능력이 결여되었다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저 놀고 먹는것에 열중한다고 주장한다. 50년대 후반 새로운 영화를 찍으며 하나의 사조에 중심으로 등극했지만 시간이 흘러 무거워지는 굴레는 피할 수 없었다. 여기는 80년대이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은 오직 하나 다시 가벼워져야 한다. 고다르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천재성을 발휘해 ‘카르멘이라는 이름’을 찍었다. 영화가 가벼워지기 위해 선행되야 하는 한 가지. 유머를 겻들어야 한다. 심지어 증오나 복수,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조차 일순간 번뜩이는 유머와 해학성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 마음속 걸작들을 면밀히 뜯어보면 무게와 상관없이 분명 일순간의 미소가 포함되어 있을 것 이다.)그렇게 완성된 영화는 고전으로 남게되어 역설적으로 무게감을 갖추게 되고 무거운 성질을 지니게 된다. 무거움과 가벼움은 그 자체로 가치판단의 대상이기 때문에 상호작용과 공존이 가능할 수 있는 합리적 당위성이 마련된다. 결론적으로 ‘카르멘이라는 이름’은 가벼움과 무거움이 혼재하는 걸작이다. 이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때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하여 이야기할 수 있을 것 이다. 영화의 오프닝. 카르멘은 고다르의 병문안을 왔다. 그녀는 삼촌인 고다르의 아파트를 빌려 영화를 찍겠다고 한다. 우습게도 그는 병이 다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아플 것 이라는 요상한 변명을 늘어 놓는다. 그렇게 혼자만 심각한 괴짜는 퇴원을 거부한다. 그는 자신이 등장하는 쇼트에서 모두 유머를 섞어 스스로를 희화화한다. 카르멘과 그녀의 남자친구도 유별난 인물들이다. 영화감독인 삼촌에게 영화를 찍는다 했지만 사실 은행을 털기 때문이다. 무장한 강도일당은 마치 ‘뜨거운 오후’에서 알파치노가 제대로 연기한 어설픈 은행강도를 연상시킨다. 그들의 사랑은 자동화기의 총성이 빗발치는 난장판 속에서 시작되었다.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좋을 편집과 촬영이 초반부에 줄곧 이어진다. 격렬한 키스가 끝난 뒤 카르멘과 함께 차를 타는 남자는 그녀와 함께 고다르의 아파트에 도착한다. 특이한 것은 네러티브가 진행되려고 할 때 마다 그러니까 자연스러운 흐름에 의해 인물보다 이야기에 집중하려는 순간 갑작스레 바이올린의 선율과 잔잔한 바닷가가 교차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몇몇 쇼트의 사운드를 일부러 잘못 녹음한 것 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그저 해변의 석양이 질 때 까지 혹은 음악이 끝날 때 까지 무작정 지켜볼 것만 같다. 몇 번이나 같은 이미지를 반복해 보여주기만 한다. 마치 십자수를 놓다가 일부러 가위를 덧대어 끊어버린 후 잘린 부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이어 가는듯 하다. 뻔뻔스레 정상적인 편집인 것 처럼 속이고 프레임안을 가득 메우는 자극이 연달아 발생하여 어리둥절한 미소를 짓게한다. 고다르의 초기작에서 즐겨 사용했던 관객을 향하는 인물의 시선, 인물의 대사를 통해 영화임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면 ‘카르멘이라는 이름’에선 다른 방식으로 언제나 깨어있을 것을 요구한다. 위에 언급한 느닷없는 교향악의 선율과 해변을 보여줌으로써 소격효과의 목표를 달성한다. 단지 두 개의 장면의 반복으로 고상한 유쾌함을 자아낸다. 영화는 초반부 20분안에 하고싶은 말의 절반가량을 이미 보여주었다. 감독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매끄러운 솜씨를 우아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더욱 뛰어난 쇼트와 시퀀스는 50분이후에 등장한다. 거칠게 말해 영화는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50분부터 55분30초까지 총 7개의 쇼트로 구성되었고 식당에 있는 교향악단 여자의 얼굴로 시작하여 어두운 밤의 센강을 보여주는 고다르의 나레이션으로 끝난다. 최초에 식당에서 카르멘의 남자친구 조셉과 교향악단 여자가 대화를 하고 다음 쇼트로 식당에 서있는 카르멘이 등장하는 쇼트가 나온다. 카르멘의 뒤에 게임을 하는 남자가 보인다. 나는 이 장면을 분명히 어디선가 보았다. 너무 친숙한 인물의 동선과 장소의 배치. 곧 바로 기억나지 않아 계속 과거속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가 머릿속에서 하나의 영화와 마주하게 되었다. 바로 ‘남성/여성’이다. ‘남성/여성’은 초기 고다르 영화로 젊은 장 피에르 레오가 출연한다. 그는 군대를 막 전역하여 인생의 과도기적 상태에서 격변하는 프랑스의 시대와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남자와 여자의 다른 시각으로 당시 사회상을 관찰한다. 장 피에르 레오와 프랑스 가수이며 배우인 샹탈 고야의 대사들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초반부 레오가 식당안으로 들어오고 뒤에 어떤 인물이 계속 핀볼게임을 한다. ‘카르멘이라는 이름’에서 러닝타임 51분에 등장하는 식당에 서있는 카르멘의 쇼트에 한해, 두 편의 영화는 정확히 같은 구도로 촬영되었다. 그리고 ‘카르멘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1년 후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에선 영화감독으로 등장하는 장 피에르 레오가 제작자의 아내를 자신의 영화에 캐스팅한다. 그는 누구도 풀지 못한, 차라리 스무고개같은 회화의 숨겨진 의미에 관하여 막힘없이 의견을 제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큰 흥미를 느낀다. (장 피에르 레오는 인물들에게 그림 속 진짜 인간은 몇 명인가 라는 넌센스같은 질문을 쏟아낸다. 게임을 하듯 두 인물은 예술적 탐구를 통해 유희를 즐긴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그들의 게임에 동참했다.) 앞서 예시한 3편의 영화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인물의 대사에 끼워넣은 의도적인 사운드의 중첩과 영화 속 여성의 주체성이다. 그녀들은 남성을 위한 조력자로써 도움닫기로 남아 종속되지 않으며, 능동적인 여성이 되고자 한다.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와 ‘카르멘이라는 이름’에서 카르멘과 제작자의 부인은 각자의 영화에서 진정한 주연들이다. 고다르는 진취적인 여성의 태도와 영화의 가벼움을 무기로 주어진 틀을 깨려한다. 익히 알려진 문학과 연극의 ‘카르멘’은 시대상을 반영했기에 수동적이고 위축된 여성성을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녔다. 오래된 예술의 특징인 내재된 무거움으로 정적인 운동성을 표방한 체 카르멘은 유순한 여성성을 지녔어야 한다. 그러나 연극 카르멘은 전통적인 여성성을 버린 대신 여성의 관능미를 전면적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당대의 관객에게 비난을 받았고 언제나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고다르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던 사람 중 한 명 이다. 그의 영화의 색채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모든 것에 완강히 저항적이며 다채롭고 기민한 영화적 실험을 즐겼다. 이러한 시도들은 자유를 위한 금지의 해체에서 기인한다. 결국 고다르에게 있어서 ‘카르멘이라는 이름’은 문학과 연극에 포함된 무거움을 살며시 비틀어 영화라는 가벼움의 미학적 특성으로 접근하여 온전히 시네마로 옮기고 싶을 욕구가 늘상 존재했을 것 이다. 우리는 시네마를 통하여 더욱 가벼워진 카르멘과 그녀를 다루는 고다르의 태도를 기억해야 한다. 영화로 돌아가 러닝타임 51분 이후 카페시퀀스는 앞서 말했듯 ‘카르멘이라는 이름’의 축약이다. 카페에 고다르가 들어온다. 카르멘 일당 중 한 명이 그에게 악수를 건넨다. 고다르는 남자를 신경쓰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씬 17 테이크 6’ , ‘마오쩌뚱 왈 : 항상 여러 모습을 염두에둬라’ , ‘지금에는 잊혀졌지만 마오는 위대한 요리사 였다. 모든 중국인을 먹였으니.’ , ‘카르멘은 어딨어?’ 라고 말한다. 정말 소름끼치게 천재적이다.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못해 한계를 느끼고 망연자실 했다. 미약하게나마 최대한 고다르가 지녔던 태도만큼은 생각해보고 싶다. 권위의 계단에 등극하는 것은 어렵지만 내려오는 것은 꼴사납고 어렵다. 인간은 생각과 태도를 고수하고 관철하기는 쉬워도 오류를 인정하고 수정하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방점을 찍은 인물에게 주어진 무게감은 더욱 대단했을 것 이다. ‘씬 17 테이크 6’ 라고 말하면서 브레히트의 연극배우 대사가 상대 연극배우의 귀에 들리지 않는 것 처럼 카르멘 일당의 남자의 귀에도 고다르의 대사는 들리지 않고 오직 관객에게 전달된다. 따라서 교과서적인 소격효과를 느끼게 한다. ‘마오쩌뚱 왈 : 항상 여러 모습을 염두에둬라.’ 드디어 고다르의 의중을 넌지시 엿볼 수 있는 대사가 나왔다. 그는 짐을 한아름 내려놓은 것 처럼 후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것은 줄곧 길게 설명했던 무게에 관련 된 대사이다. 또한 문학과 연극에서의 카르멘에서 영화 ‘카르멘이라는 이름’으로 모습을 바꾼 것 처럼 한 때 굉장히 급진적이며 폐쇄적이기까지 했던 자기자신에게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자신에게 되뇌이는 말이다. 다분히 자기성찰적 태도를 통해 고다르는 다양한 형식과 구조에서 혹은 사적인 사고와 사상까지도 언제나 무거워지고 가벼워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듯 하다. 이러한 말들은 솔직하고 해학적이며, 자조적이다. 짧은 대사 안에는 유머까지 포함되어 있다. 완전히 가벼워지기로 작정이라도 한듯 마오쩌뚱은 위대한 요리사 였다고 재치를 늘어놓는다. 또한 후반부에 등장하는 ‘카르멘은 어딨어?’ , ‘도레미파솔라’ 같은 대사를(둘 다 프랑스언어로 들을 때 음악처럼 운율이 생긴다.)본인이 미리 언급하며 언어유희로 장난을 치고있다. 비유법이 아닌 말 그대로 고다르의 태도가 너무나 가벼워지다 보니 영화는 어느새 장난과 농담의 언저리에 맴돌며 현실과 비현실의 영역에 도달했다. 벌어진 구조의 틈에서 고다르는 조금은 무겁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깊은 속내를 드러낸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백수조차 그들이 발견한 것이 아님으로 반 고흐가 석양에서 노란색을 찾은 것 처럼 찾아봐 요즘엔 그런 태도가 필요해’라고 한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고다르는 어째서 고전으로 되돌아갔을까? 가벼워지기 위함이었다. 나는 글의 초반부에 게임을 예시를 들었다. 게임은 큰 성공을 위해 ‘선배’인 영화를 모방했다고 언급했다. 신작을 출시 할 때 시네마틱 영상을 본격적으로 내세운 게임의 태도는 일견 성공적으로 보인다. 이처럼 우리의 고다르 선생님은 젊은이들이 가져야할 바람직한 태도에 관하여 강의를 하고 있다. 고전으로 돌아가 그것의 가치를 상기하여 재발굴하라는 것 이다. 반 고흐가 원래 존재했던 태양에서 노란색을 들여다 보는 것 처럼 말이다. 고다르는 그저 말뿐인 말을 하지 않고 누벨바그의 기수답게 영화를 찍어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모든 대사들이 생기있어 보이고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처럼 자유분방해 보인다. 이 카페에서 누벨바그가 다시 재현된다. 카페에서 고다르의 굳은 결심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영화 속 영화인 ‘마들렌 디트리히와 베토벤’을 찍기 위한 제작비를 마련하러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다가 전부 탕진하고 새로운 영화로 만회하려 한다. 신작을 고르는 방식에서 조차 픽션에 관한 애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의 비서에게 하소연을 시작한다. 고다르의 대사는 무수히 많이 쓰였던, 고다르가 즐겨 사용한 자본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그녀에 대해 알고있는 두 세 가지 것들’에서 파리와 여성을 동일시하여 공산품과 자본주의의 속도를 비판했던 것과 비슷하게 자신의 의견을 센강에 투영하여 같은 어조로 말한다.)이윽고 러닝타임이 55분에 도착하여 다음 쇼트가 나온다. 그렇게 고다르는 두 번째 과도기인 80년대를 맞이한다. 카페 시퀀스처럼 놀랍고 유머가 번뜩이는 쇼트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고전으로 돌아갔으며 가벼워지려 노력했기에 ‘카르멘이라는 이름’의 엔딩은 눈에 그려진다. 한 쪽이 식어버린채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카르멘은 죽음을 맞이 할 것 이다. 역시나 고다르는 문학과 연극의 동일한 결말로 내러티브를 이끌어 나간다. 후반부 그는 가치의 재발굴이라는 누벨바그의 거대한 선언으로 행해졌던 영화를 보고 만드는 즐거움을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을 때 까지 그의 영화 속에서 카르멘은 몇 번이고 계속해서 죽을 것 이다. 그렇게 될 운명을 타고났으니 말이다. ‘아메리카의 밤’ 이후 의견충돌로 인해 결별했던 고다르와 트뤼포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르멘이라는 이름’에서 온전히 느껴지는 카메라의 태도를 보았을 때 ‘피아니스트를 쏴라’를 찍은 뒤 고전의 가치를 찾아 회귀한 트뤼포의 정다운 영화들이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색하지 않았지만 일그러진 우정을 회복하고 싶어했던 숨은 속마음이 은근히 느껴진다. 아마도 고다르는 트뤼포을 그리워했을 것 이다. 누벨바그를 추억하며 영화와 친구관계도 다시한번 가볍게 개선되길 기대하며말이다.
다솜땅
4.0
영화 내내 계속되는 삶이란...질문. 은행을 털고, 그녀를 쫓아다니는 그남자의 애간장. 끝내 잡을 수 없는 여인의 마음. 베토벤 현악 4중주가 흐르는 영화 속 우아함 속에 묻혀있는 여을 향한 갈망. 그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깨끗해지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청소가 많이 나온다. ㅋ 원초적인 모습에서 패션까지 나열하는 이 영화의 묘미는... 어떤걸 특정해야할까? 결국. 잘 흐르는 연주의 흐름에서 어느순간 끊겨버리고 다시 이어나가는 음악처럼. 삶도 생각되로 되어지지 않는 부분의 흐름이 끊겨버리는 시행착오가 있지 않을까? 그들의 총질은 그렇게 허무함을 내제하고 있다. #20.10.8 (2401)
Dh
4.5
아름다운 선율 속에 구속된 시니컬한 로맨스 #내가 널 사랑하면 그게 네 끝이 될거야. #파멸의 원천 #고독
Jay Oh
3.0
카르멘을 그릇 삼은 이름과의 작별. A goodbye to names.
다비
4.0
결국 남겨진 이름만이 역사 속에 기록된다. 앞서 관람했던 <포에버 모차르트>와 연출이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레 역사를 영화에 대입하게 되었다. 개혁의 실패가 잇따랐던 시대에서 고다르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은행을 털었던 여자와 은행을 지키던 남자의 급변하는 상황(사회)에 주변은 냉소적이었다. 서로는 상대의 팔을 묶지 않으면 자신이 묶여야했고,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했다. 정반대의 위치에서, 이름(역사)을 지키기 위하려면 그래야만 했다.
kawah_ee
4.0
This may contain spoiler!!
시나문
2.0
어디까지나 고다르만의 화법.
oasisdy
3.5
"올바른 이미지는 없고 사랑하는 이미지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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