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other and the Whore
La maman et la putain
1973 · Drama/Romance · France
3h 37m

In this sexually frank French drama, the aimless young Alexandre juggles his relationships with his girlfriend, Marie, and a casual lover named Veronika. The dialogue-heavy film focuses intently on the love triangle, with Marie increasingly jealous of Alexandre's fling with Veronika. As the trio continues their unsustainable affair, the emotional stakes get higher, leading to conflict and unhappiness.
Dh
4.0
파리의 낮과 밤, 고요한 센느강 주변을 거니는 연인들 불결한 진실, 순결한 거짓의 자화상 #만남과 이별 #우울과 공허 #한영자×시네마테크KOFA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
Jay Oh
4.0
혁명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전복되지는 않은/않는 사랑이란 이름의 체계. The status quo called love remains unturned.
양기연
4.0
68 혁명 이후 자유의 기치 아래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도 거부한 채 다자연애와 섹스를 즐기면서도 도저히 정서적 안정감을 찾지 못해 끙끙 앓던 당시 프랑스 젊은이들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조명해 보인다. 영화는 극중 인물들이 진지하게 내뱉는 말들이 지지고 볶는 3시간 40분간의 연애담 안에 반복될수록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덕분에 실컷 킬킬대다 보니 3시간 40분 순삭.
사실은또
5.0
이런 걸작을 한글자막도 없이 영어 자막으로 봐야 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이런 위대한 작품에 최소한 한글자막 DVD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Withoutflatwhite
5.0
나는 과거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을 보고 매우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흘러 지금 생각해보건데, 이는 베르톨루치가 68의 복잡다단한 정치성을 로맨틱하고 관능적인 프레임으로 재단하여 벽에 걸린 그림과 같이 감상하기 좋은 이미지로 재조립한 후 공산품으로 전락시켰다고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혼란스러운 젊음이 지나치게 매끈하게 압축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씨네필의 자기도취와 지적 페티시즘, 젊고 아름다운 육체들의 연극. 고다르를 오마주한, 루브르 박물관을 뛰어가는 3인의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다. 혁명의 이미지가 아닌 혁명 이후 다수의 문화 예술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들을 어떠한 감정적 고찰도 없이 묶어내 다시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내게 그 영화는 카메라의 기만에 가까웠다. <엄마와 창녀> 같은 영화를 기다려왔다. 봉합을 포기해버린 세계를 기다려왔다. 장 으스타슈는 이미지 대신 언어로 젊음을 찢어발겼다. 물론 개봉 시기의 역사적 맥락 때문에 이것을 증언으로 받아들이기 더욱 쉬웠을 수도 있지만, 뒤라스가 말했듯 정말로 이 영화는 피를 흘리며 말하는 듯 하다. 여기서의 세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시대의 상처가 육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하나의 현상에 가깝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으며 본인 존재의 공허를 메우기 위해, 나를 위해 사용된다. 그러므로 젊음이라는 환상의 마지막 잔광이 혁명의 현장이 아닌 침대에서 내뿜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럽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하도록 내버려둔다.” 3시간 40분동안 이어지는 대사의 행렬들은 말의 한계를 체험하게 한다. 이 영화는 대사량으로 리얼리티를 확보한다기 보다는 카메라를 고정함으로써 끝끝내 말을 잃게 되는 순간을 포착해내는 방식을 택한다. 인물들은 말을 하면 할 수록 그 의미를 상실하고 부패한다. 의미를 상실할 수록 내면의 자기 혐오를 키우고 그것을 다시 말로 덮으려 하는데, 이 일련의 과정은 어떠한 해체의 과정처럼 느껴지며 모든 자기기만이 벗겨진 환상은 병리적인 잔해만을 남긴 채 악취를 풍긴다. 말은 신음이 되고 관계는 갈라지며 그 갈라진 틈에서는 오래된 피가 흘러나온다. 인물들은 스스로 도망칠 수 없는 감옥으로 행하며, 종국에 놀라운 고백을 남긴다. 베로니카의 마지막 독백 혹은 고백. 진정으로 고통이 남긴 유령을 호출하는 놀라운 순간을 목격한다. 그럼에도 인물들은 여전히 말한다. “나는 내가 구토할 때 타인이 지켜보는 것이 싫어!” 언어가 당신의 패배를 보러왔고 영화가 그 잔해를 덮는다.
케보이
4.5
장 피에르 레오마냥 카페 테라스에 앉아 프루스트 <되찾은 시간>을 읽거나, 상처받길 주저않는 여인들에게 기생하며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살기엔 우선 인생이 흑백영화가 아니란 점에서 무모한 짓이고, 두 번째로는 아무도 돈 내고 보지 않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선 그만큼 소외된 행동, 즉 비정상적인 행동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영화는 차라리 현대정치의 습관성 오랄마스터베이션을 좀 덜 변태적으로 박제함으로써 당대의 우울을 추모하고, 그것을 훨씬 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환원시켰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할 만 하다.
sendo akira
4.5
도통 깊은 감정의 공유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현대인들의 종잇장으로 연결된 듯한 끈과 기성정치와 사회제도의 환멸을 느끼며 한쪽 다리를 잃고 방황하는 유령같은 젊은이들에 패배주의와 절망감 변화를 원하며 들고 일어났지만 정작 변한것은 전혀 없었던 작금의 현실과 직접 비교하긴 그렇지만서도 당대 6.8 혁명이 남긴 생채기가 묘하게 맞물리는 듯 보이는것은 그저 왜인지 "미완의 혁명"임에도 "실패한 혁명은 혁명이 아님"이라는 참을수 없는 꼬리표를 남긴채 어느덧 시간이 흘러 창녀처럼 난도질당하고 변질되어가는 시대정신을 통탄할수 밖에 파리지앵에 사랑은 이상하다고 말하지만 공허감에 깊이가 커서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울어버리는걸 왜 주저 앉았냐고 어떻게 반문할수 있겠나? 그저 절망적임에도 한없이 응시하고 한없이 기다려줄수밖에~ 나도 그저 한낱 고뇌만 할줄아는 슬래커일뿐이니
임중경
4.5
68 이전과 이후, 시대의 단절을 이으려는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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