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rei Rublev
Андрей Рублёв
1966 · Biography/Drama/History · USSR
3h 25m · NC-17



An expansive Russian drama, this film focuses on the life of revered religious icon painter Andrei Rublev. Drifting from place to place in a tumultuous era, the peace-seeking monk eventually gains a reputation for his art. But after Rublev witnesses a brutal battle and unintentionally becomes involved, he takes a vow of silence and spends time away from his work. As he begins to ease his troubled soul, he takes steps towards becoming a painter once again.
정환
5.0
“개개인의 소명(calling)에 대한 응답에 오로지 침묵과 흑백만이 담겨있다면 그 속엔 주저앉아 버린 자의 눈물로 가득 차겠지만, 내가 걸어오면서 느낀 모든 번뇌와 고통마저 소명의 일부임을 깨닫는다면 결심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채워주겠지. 우리는 모든 고난과 다채로운 색의 아름다움 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다.” “you’ll be casting balls and i’ll be painting icons” 종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소년과 이콘을 그리기로 결심한 남자의 소명은, 각 개인이 이 단어를 품고 있는 의미부터가 다르다. 소년이 가지고 있는 소명은 사실 강제성 임무에 더 가깝다. 반면, 류블료프가 가지고 있는 소명은 개인의 지향점이다. 그런 그에겐 개인의 지향점에 가까운 두 가지 소명이 있는데, 종교인과 예술인이다. 우리는 소명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그 출발이 어디서부터 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명이 그저 내가 지켜야 하는 어느 가치관이 되었건, 혹은 인류 전체를 위한 막중한 책임이 되었든 간에 좌우지간 우린 이 소명을 품으며 살아간다. 정말 원어의 의미 그대로 누군가의 부름을 들은 후, 혹은 스스로의 결심으로부터 태어난 소명을 품게 된 순간에는 항상 이 소명과 정반대의 지점에서부터 속죄여 오는 속삭임에 우린 흔들린다. 소명을 향해 묵묵히 걸어오던 사람이건, 뜻하지 않던 길과 투쟁하고 있던 사람이건, 아무리 걸어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 같은 지향점이나 혹은 당황과 함께 엄청난 불안과 부담을 껴안고 싸워야 함에 힘겨워 주저앉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우리. 부끄러움에 말문이 막혀버린 순간과 힘없이 흘리고 있는 눈물만이 소명에 대한 나의 응답인 건가. 하지만, 소명은 뭐랄까. 부름에 의한 스스로의 깨달음보다는 내가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며 거쳐온 수많은 성지들과 나도 모르게 걸어온 수많은 길들마저 의미를 부여하고픈 지점에서 파생된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가 살아온 삶 전체는 하나의 순례가 된다면, 소명의 응답은 하나의 올곧은 결과가 아닌 우리가 주저앉아 흘린 눈물과 흑백마저, 이 고난과 고민마저 소명의 일부가 아닐까. 어찌 되었건 우린 이 다채로운 색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 색의 아름다움을 인지하지 못한 채 오로지 흑백의 시선으로 살아간다면 오히려 흑과 백 이 둘 중에서 시작된 우리의 고민은 더욱 아프게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소명이 마음속에 피어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 과정 속에서 오직 나의 굳건했던 믿음과 당당했던 포부들이 섞인 그 시작점과 그에 반하는 옳은 결과만이 전부라면, 우리가 그 과정 속에 느끼는 아픔, 인내, 웃음과 눈물 모두 무슨 의미가 있냐는 뜻이다. 우린 이렇게 많은 색들 속에서 살아가는데 말이다. 영화가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 같아도 그것이 당최 무엇인지 잘 모를 때, 굳이 알려 하지 않아도 영화의 말미에 다다르면 그것이 실은 무엇이 되었던, 우린 뭔가를 깨닫고야 만다. 우리가 풀이에 성공했다기보단, 이 영화가 뭔가를 깨닫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모두가 다른 시선을 지니듯, 세상은, 아니 우리는 개인마다 해석을 필요로 하긴 하는데 이런 의향 자체야말로 우리가 세상을 너무도 어렵게 만드는 듯하다. 괜스레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혹은,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에 답을 찾기 위한 욕망이 되었건 말이다. 우리가 미지한 무언가와 맞닿드릴 때, 신비와 진실을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해석보다는 잘 알지도 못할지언정 내가 걸어온 길들을 떠올리며 나만의 의미를 덧붙이는 것이 더 시원하지 않을까. 사실은 이 영화를 비롯해 우리가 살면서 보는 모든 화면에 담긴 것들은 성화되지 않은 은유라기보단, 화면 그대로의 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문자, 그림 그대로의 진실로 나에게 강한 감정의 여지를 주었다. 알면 알수록 보이는 것도 많을 테고, 보이는 게 많을수록 알게 되는 것도 많겠지만, 굳이 예술인이 아니어도 종교인이 아니어도 살면서 가진 개개인의 소명 속에서 허우적거렸던 사람이라면, 무언가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를 진실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우리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길 속에서 가끔 너무나 자유롭게 결속된다. 수많은 길들 사이에서 헤맨다는 말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이끌려온 순간들까지도 모든 길들인지라, 그냥 본인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모르게 걸어왔거나, 흘러왔거나, 지나쳐왔다는 말들이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더 정확히 표현해주는 말인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길을 걸어옴에 있어서 자유롭지만, 우리가 하나의 소명과 하나의 결과만을 바라며 살아간다면 그 행위 자체가 우리를 가두는 것과는 다름이 없다. 하지만, 길을 걸어간다는 것. 이 과정 자체가 일종의 순례라고 한다면, 우리가 흘렸던 모든 눈물들은 더 이상 실패의 증거가 아니게 된다. 힘듦과 부끄러움의 눈물의 순간이 훗날 자랑스러운 나의 성지가 될 때까지 우린 계속 소명 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찾으려 걸어야만 한다. 개개인의 소명(calling)에 대한 응답에 오로지 침묵과 흑백만이 담겨있다면 그 속엔 주저앉아 버린 자의 눈물로 가득 차겠지만, 내가 걸어오면서 느낀 모든 번뇌와 고통마저 소명의 일부임을 깨닫는다면 마침내 결심의 목소리가 내 마음을 채워주겠지. 우린 알아야만 한다. 실은 우리 모두 이 모든 고난과 다채로운 색의 아름다움 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STONE
5.0
신이 부재한 세상에서 인간을 바라보며 신앙심을 일깨우다.
조종인
4.5
예술은 부정적 사고에 의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검은색을 이해하는 데 흰색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 사고의 모호하고 겸허한 과정은 위대한 작품을 이해 하는 데 필수적이다. '아무 목적 없이' 일하거나 창조하는 것, 진흙으로 조각하는 것, 자신의 창조에 미래가 없음을 아는 것, 자기 작품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건축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의식하는 것, 그것 이 바로 부조리한 사유를 통해 얻어지는 쉽지 않은 지혜이다.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열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조리한 창조자 앞에 펼쳐진 길이다. 그는 허무에 자기 색깔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 신화> 中)
coenjung
4.5
아 역시 타르코프스키는 이번에도 지루하군아 하면서 보다가..마지막에는 박수를 치게 만드는 예술성 <서울아트시네마>
Cinephile
5.0
성화 속에 기거하기만 하던 신이 아닌, 가장 낮은 곳에서 고뇌하던 평민의 모습에 비친 신을 보고 그는 놓았던 붓을 다시 잡는다. 예술을 통해 스스로 성인으로 승화한 인물의 순례기.
raffy
5.0
전쟁과 절망이 지배하는 시대 속에서 예술가는 침묵하지만, 그의 붓끝에 남겨진 빛은 인간의 영혼을 일깨우고, 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영원한 기도로 남는다.
Jay Oh
4.5
숭고한 예술. Faith and fault in the face of creation.
FisherKino
4.5
놀랍고도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창세기 18장의 '세 천사의 방문'을 주제로 하는 삼위일체 이콘의 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어떤 고뇌와 고통 속에 이콘을 완성했는지를 과감한 형식미 안에 담은 작품이다. ● 8개의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라도네츠의 삼위일체 수도원 수도사인 루블료프는 동료 수도승들과 함께 당대 민중들이 당면한 참혹한 현실을 목도하며 스스로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기약없는 침묵에 들어간다. 한편 정치패권을 차지하고자 타타르와 손을 잡는 '대공의 동생' 조차 마을이 있으면 무참히 살육하고 양민을 성당에 몰아넣고 몰살시키는 타타르의 잔인함에 근심이 짙어진다. 루블료프는 가는 곳곳마다 민중이 얼마나 핍박받는지를 목도한다. 현실을 풍자한 광대는 혀가 잘리고 악기는 부서진다. ● 장애가 있는 여인을 타타르의 손에서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 수도사 루블로프는 침묵의 고행을 하며 그림을 그리지 않게 된다. ● 민중의 약동하는 힘과 삶의 의지로 점철된 '종' 에피소드는 질병과 이민족의 살육에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 십대 소년이 (실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르쳐 준 적도 없는) 아버지의 종 주조술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며 위정자의 종을 만드는 과업을 보여준다. 거푸집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들어가다 걸리는 질기고 질긴 뿌리는 한그루 나무의 것으로 드러나는데 이 뿌리는 땅 속에 있어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듯 러시아의 민초들이야말로 그 땅의 생명의 문명을 이루는 근간이라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함축한다. 종은 완성되고 대공으로 지칭되는 권력자와 종교권력은 종에게 축도하며 의식을 진행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든 이들에게는 관심조차 주지 않으며 종 제작지휘관인 소년이 종을 치지 않는다고 욕설을 내뱉을 뿐이다. 종의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퍼지자 정념 상태가 된 소년은 오열하고 루블료프는 진흙에서 뒹구는 소년을 끌어안고 '앞으로 너는 종을 만들고 나는 그림을 그리'겠노라 말문을 연다. 그러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에피소드에서 조차 루블료프는 민초들 사이에서 방황할 뿐이었으나 종을 만드는 민초들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끼는 가운데 한 소년에 대한 위로를 건네며 행위 안에서 죄의식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이게 된다. ● 이런 식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정말이지 영성이란 관념의 차원이 실재하는 것으로써 체험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 놀라울 지경이며 영화가 예술이 되는 경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 타르코프스키가 34세의 약관의 나이에 완성시킨 이 작품은 영화를 사랑하고 또 만들고픈 이들에게 깊은 절망과 동시에 영화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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