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thenic Syndrome
Astenicheskiy sindrom
1989 · Drama · USSR
2h 33m

In the old days it was called hypochrondria, or black melancholia. Now, apparently, it's termed the Asthenic Syndrome. Whatever it is, Nikolai, a teacher of epicly indifferent pupils, has got it, and it's not much fun.
양기연
4.5
89년의 영화가 앓던 무기력 증후군으로부터 30년 뒤의 관객인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운가? (스포일러) . 나타샤가 창밖을 올려다 보는 숏 뒤에 마치 그에 대한 리액션 숏처럼 크레인을 타고 하강하는 숏이 이어붙는다. 그리고 젊은 여인이 나타샤의 옷의 얼룩을 지워주는 숏이 반복된다. 한 인물이 정신적으로 붕괴돠어가는 것에 대한 영화적 표현인가 싶을 즈음, 갑자기 흑백의 화면이 컬러로 바뀌고는, 나타샤와 꼭 닮은 배우와 남성 사회자가 무대 전면으로 나와 지금까지의 내용이 모두 '영화 속 영화'였음을 밝힌다. 이 영화는 여기서 비로소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흑백의 스크린은 꺼지고 커튼은 내려졌다. 영화는 끝났다. 그러면 그 바깥은 현실이어야 할진대 오히려 혼돈은 더욱 가중된다. 영화 속 영화는 비록 극중 나타샤의 행동이 차라리 코미디에 가까울 정도로 그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나타샤의 남편이 죽었고 그 장례를 치른 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존중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샤는 홀로 그를 그리워 하며 서서히 정신이 붕괴되어 간다'는 비교적 선명한 플롯을 따르고 있다. 허나 영화 속 영화가 끝난 뒤 펼쳐지는 영화 속 현실의 영역에는 그 어떤 선명한 플롯도 존재하지 않는다. . 선명한 플롯이 부재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대칭과 반복이다.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가 캐비어 셋 째 캔을 따려고 아내, 장모와 대화를 나누던 중 '대칭'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그 숏에서 니콜라이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장모는 대칭을 이룬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 속 컬러 영역의 수많은 요소들이 대칭을 이루거나 혹은 반복되고 있다. 니콜라이가 거리를 걸을 때 두 쌍의 커플이 니콜라이를 사이에 둔 채 기괴한 춤을 추며 격렬한 키스를 나눈다. 똑같이 마샤라는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소녀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며 같은 구절을 읊는다. 컬러 영역 초반에 언급되는 '가슴에 뱀이 있다는 생각에 잠긴 일종의 집착증'은 후반 니콜라이와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의 대사로 반복된다. 게다가 수많은 장면들이 영화의 암묵적 룰이라 해도 좋을 가상선 따위는 우습다는 식으로 여러 각도에서 마구잡이로 반복된다. 결국 극중에서 흑백 영역의 영화가 끝난 순간 시작되는 컬러 영역은, 플롯이 사라진다는 점에선 더 현실에 가깝지만 그 자리를 대칭과 반복이 채운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영화적인 독특한 특성을 갖는다. 아들로부터 마우스피스를 받은 이리나 파블로바가 트럼펫을 불자, 그 내화면의 음향이 곧 외화면의 음악으로 바뀌고, 그 음악을 BGM 삼아 반복되는 패턴들을 보여주는 숏들이 이어지더니, 트럼펫을 부는 천사의 그림 숏이 등장하는 연출은, 현실의 영역에 가까운 듯 더욱 영화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컬러 영역의 특성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그러한 독특한 특성을 적극 활용해 가며, 영화는 89년 당시 붕괴를 앞둔 당대 소련의 상황을 수많은 대사의 범람 및 파악하기 힘든 상황의 연속 안에 일련의 반복과 대칭을 삽입해 가며 일종의 캐리커처와도 같은 기묘한 혼돈의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회 곳곳에 폭력이 만연하다. 식량 배급은 저질에 공정하지 못하며, 주거 환경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들은 뒷돈을 주고 갇혀 있는 개들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는 위선을 보인다(이때 영화는 그들이 슬퍼하는 숏을 먼저 제시한 뒤 갇힌 개들의 모습을 오랜 시간 슬픈 음악과 함께 제시함으로써 관객도 그 사람들처럼 슬픈 감정을 느끼게끔 유도하더니, 이내 검은 화면에 '사람들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다.'의 자막을 띄우며 관객들마저 그들과 매한가지임을 지적해 보인다.). 교육과 문학은 이러한 사회적 병폐에 대한 구원이 될 수 있을까? . 그에 대한 응답과도 같은 인물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는 교육자이자 작가이다. 극중에서 니콜라이가 사회 곳곳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가 곧 교육과 문학의 화신으로서 사회 곳곳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교육자로서 니콜라이는 어떤 학생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며, 어떤 학생도 그와 소통하려 들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개 사냥에 대한 행정적인 문제 뒷전으로 밀려나 들리지 않는다. 교육은 더 이상 이 사회에 대해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영화는 탁상공론으로 전락해 버린 교원 회의를 생선의 배를 헤집는 숏과 교차하더니, 니콜라이의 코 고는 소리로 방해하여 끝내 버림으로써 이를 총체적으로 비웃어 버린다. . 문학은 어떠한가? 영화는 첫 씬에서 세 명의 여인이 톨스토이의 작품을 찬양하는 숏을 삽입한다. 그러나 세 명의 음성이 조금씩 어긋나서 전달되기에 그 말은 선명하게 전달되기보다는 차라리 혼란스럽게 들린다. 심지어 그 바로 이전 숏과 이후 숏은 버려진 인형 등 쓰레기더미 위에 터지는 비누방울들이다. 결국 다 옛것이며 금방 사라지는 허망한 것들이라는 것일까? . 니콜라이는 극중에서 작가로서 단 한 편의 글도 완성하지 못한다. 그가 단편이랍시고 여러 문장들을 읊어 대기는 하나 이를 글로 적지 않는 이상 결국 일회적인 발화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의 단편의 첫 발화는 홀로 있는 방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단 한 명의 청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두 번째 발화는 그의 장모를 상대로 이루어지긴 하나 장모는 이를 딱히 귀담아 듣지 않는 듯하다. 관객의 입장에서도 그의 대사가 워낙 빠르다 보니 이를 문학으로서 음미할 여유가 없다. . 잡힌 개들에 대한 위선을 고발하는 듯한 자막이 화면 전면을 채운 바로 그 다음 니콜라이가 화면 전면을 바라보고 대사를 읊을 때, 이는 마치 그의 교육 혹은 문학이 비로소 청자로서의 관객과 교감을 이뤄낸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씬에서 니콜라이가 말하는 바는 모든 것은 결국 휘발되고 잊혀지게 마련이며 그 자신이 지금 말하는 것조차도 결국 잊혀지리라는 내용이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 숏들이 이어지면, 그는 강박증 환자, 약물 중독 환자, 알코올 중독 환자와 한 방을 쓰는 환자 신세임이 밝혀지고, 그 자신도 결국 무력하게 드러누워 버린다. 결국 그의 문학 역시 실패한 것이다. . 사실 교육과 문화의 화신으로서의 니콜라이의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영화 중반 소년이 외친다. "콜리야가 죽었어!" 콜리야는 니콜라이의 애칭이다. 물론 극중 맥락에선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가 아닌 다른 콜리야를 언급한 것이겠지만, 그 콜리야가 누군지에 대해선 그 이후로 조금도 언급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콜리야의 죽음은 니콜라이의 예정된 죽음을 암시하기 위해 굳이 언급된 것이나 다름없다. . 사랑의 조각 게임에서도 니콜라이의 죽음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사랑의 조각을 완성하는 게임은 곧 그 피사체를 사진으로 찍음으로써, 다시 말해 정지한 프레임 내에 박제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박제된 일련의 나신들이 영화 도중에 연달아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게임의 방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드러누워 있는 인물이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마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은 이후 병원 씬에서 반복된다. 입원한 니콜라이를 두 명의 마샤가 찾아온다(이때 영화는 두 마샤의 숏과 니콜라이의 리액션 숏 사이에서 조명의 사용을 통해 마치 전혀 다른 두 시간대가 맞붙어 있는 듯한, 현실의 공간이 아닌 듯한 기이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리고 마샤가 니콜라이와 결혼하겠다 하고 니콜라이가 그들과 함께 떠나려는 순간, 마샤가 니콜라이에게 다가서는 모습이 여러 각도의 숏으로 반복되더니, 갑자기 병원 밖의 동상이 방금 전 그들의 모습처럼 여러 각도의 숏으로 반복해서 보여진다. 니콜라이가 사랑의 조각으로, 죽음의 형상으로 완벽히 박제된 것이다. . 니콜라이는 아무데서나 잠드는 병을 앓고 있다. 교육과 문학의 화신인 그가 아무데서나 잠든다는 것은 결국 사회의 병폐에 교육과 문화가 눈을 감고 외면한다는 것, 실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처음 잠들었을 때 그는 다행히 지하철에 내린 상태에서 잠들었다. 그의 상태를 묻는 경비가 그가 죽었느냐고 묻자, 여자는 단지 잠든 것뿐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 경비와 여자 모두 하품을 한다. 니콜라이의 졸음은 다른 이들에게 전염된다. 교육과 문학이 잠드는 순간 사회 모두가 잠들고 말 것이라는 의미일까? . 그가 마지막으로 잠드는 장면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요소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하철에 탄 한 여자는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기억이 초기화되는 것처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대사 한 줄만 바꾸어 가며 반복하고 있다. 컬러 영역 도입부에서 '땅을 파고 누군가 묻는 장례 장면을 왜 봐야 하냐'며 불만을 토로하던 알료샤와 그를 달래던 그의 애인은, 마치 그 장면에서부터 영영 지하철에서 내린 적이 없는 것처럼 마지막 씬에서도 그때와 유사한 차림새로 유사한 대사를 뱉으며 여전히 지하철 안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애정 행각을 마샤와 니콜라이가 이어받고 있다. 마치 키스를 나누던 두 쌍의 커플처럼. 잠시 후 니콜라이가 다시 잠든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마샤가 그를 깨우려 하나 니콜라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죽은 건가요?" "아뇨, 잠든 거예요" 이전에 등장한 문답이 반복된다. 끝내 마샤조차도 그를 버리고 지하철에서 내린다. 마치 장례를 치르듯 꽃 하나가 한 켠에 놓여 있는 것 외엔 대칭을 이룬 채 지하철 한 가운데 시체처럼 누운 니콜라이의 모습 위로, 이전에 생선의 배를 헤집을 때 흘렀던 음악이 다시 반복된다. 영화 초반의 관마냥 땅 아래 묻힌 지하철에 누인 그의 몸 위로 빛과 어둠이 수 번 교차할 때, 우리는 아마도 그가 죽었으리라고 추측하게 된다. 이전에 "콜리야가 죽었다"던 발화가 이렇게 재현된다. . 결국 컬러 영역은 "콜리야가 죽었어!"라는 외침과 니콜라이가 지하철 안에 홀로 시체처럼 잠든 모습 사이에서 니콜라이가 온갖 반복과 대칭 사이로 이미 죽어버린 교육과 문학의 화신으로서 사회 곳곳의 병폐의 흔적 사이로 유령처럼 배회하는 연옥과도 같다. 하지만 연옥은 단지 컬러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 앞에서 흑백 영역은 '나타샤의 남편이 죽었고 그 장례를 치른 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존중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샤는 홀로 그를 그리워 하며 서서히 정신이 붕괴되어 간다'는 플롯 하에 진행된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나타샤의 남편이 죽었음에도, 그 무덤을 파는 이들도 잡담을 나누고, 장례식에서조차 누군가는 떠들며 웃는가 하면, 그나마 슬퍼하던 이들조차 빨리 그 죽음을 잊으려 할 때, 그의 죽음에 진정으로 슬퍼하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는 나타샤 한 명 뿐이다. 이는 지하철에 홀로 시체처럼 누운 니콜라이와 그 지하철이 떠나는 모습을 홀로 바라보던 마샤의 모습으로 재현된다. 이렇게 컬러 영역과 흑백 영역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컬러 영역에서의 니콜라이의 죽음 이후 마샤는 흑백 영역에서의 나타샤의 모습을 반복할 것이고, 그 모습을 보는 이들은 '장례 장면이나 그 때문에 미쳐가는 이의 모습을 누가 보고 싶어하냐'며 모두들 그 자리를 뜨고 심지어 죽음의 당사자인 니콜라이조차도 그 죽음을 애도하기는커녕 그 앞에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니콜라이는 예정된 죽음을 맞이하리라.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사회의 병폐 앞에 눈 감고 외면한 교육과 문학의 죽음을 슬퍼할 대체재로서의 영화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흑백 영화 속 나타샤가 그러했듯 혼자 그 죽음을 기억하고 그 앞에 정신이 붕괴되어 괴로워 하는 것이 어쩌면 영화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그 영화는 컬러 영역의 첫 장면의 관객들이 그러했듯 모두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연옥의 굴레는 한층 더 방대해졌다. 컬러 영역뿐 아니라 흑백 영역까지 삼키더니, 사회의 병증과 그 앞에 실패한 교육과 문학, 나아가 그의 대체재로서 등장하였지만 끝내 무력할지 모르는 영화까지 아우른 이 거대한 연옥에서 우리는 과연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연옥에서 89년의 영화가 앓고 있던 무기력 증후군에 30년 뒤의 관객인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상맹
4.0
누군가는 공격성으로 누군가는 잠들어버리는 방식으로 세계에 만연한 논리는 없는 떠벌이의 이념들에 무기력으로 대응한다. 당시대성을 반영하는 오브제들과 사람들의 몸짓들을 연출적 실험으로 담아내는 건 좋았으나 너무 정신이 없고 산만해서 힘든 건 팩트… 이게 감독님이 전달하고 싶었던 시대상이겠지.
최선호(鎔皓)
WatchList
영화 정보:Daum영화 http://me2.do/FyM68dm5 죽기 전에 꼭 봐야 할영화 1001편 순위에 올라와 있는 앨리스 영화
뒤죽박죽
4.0
2021. 2/23 <무기력 증후군> 무기력 증후군을 월요일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어제 두번이나 보다가 골아 떨어지고 오늘 카페에 나와 남은 50분 정도의 분량을 마저 보았다. 이 영화는 보고 있으면 물리적으로 눈꺼풀과 몸을 무겁게 만드는 피로감이 밀려온다. 여러 에피소드들 속에서 연속되고 반복되는 모티프들 가운데, 반복이나 변주이지만 비대칭의 느낌을 불러오는 요소들에 대해 막연한 의문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학교-감옥-동물원 비유. “학교는 감옥과 같이 규율이 확실해야하지 동물원같아서는 안된다.” --> 이후 학교 내 직원들이 쫓겨난? 잃어버린? 강아지를 lost and found animal 센터에 찾으러 나서는 일이 벌어지는데, 유리창살 너머에서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며 동물/짐승 흉내를 내며 간접적으로(그러나 직설적으로) ‘동물원’ 비유를 긍정하던 학생들과는 다르게 유기동물들은 지치고 힘 없는 모습으로 비좁은 철제 케이지 안에 갇혀 있다. 남편 잃은 여자의 히스테리 (생에 대한, 생의 관성에 대한 분노) /// 중년 남자 교사의 피로감, 열차, 묘지, 죽음, 사진 /// 정지, 조각상 흉내 [1] 남편을 잃고 관을 땅에 묻은 후 방황하고,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사회의 암묵적 룰을 모두 깨부수며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하는 여인. 종점에서 어디로도 가지 않는, 행선지 없는 버스를 타고, 거리의 행인들에게 불만스럽게 몸을 부딪히며 시비를 걸고, 갑자기 거리의 여자 행세를 하는가 하면, 남자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잘못은 ‘살아있음(alive)’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그녀를 위로하러 온 친지와 친구들을 매섭게 쏘아보며 쫓아내고, 남편이 묻힌 구덩이 속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다가 묘지들 사이로 뛰쳐나간다. 묘지에 새겨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 -- 그리고 스틸쇼트(일수밖에 없는) 사진들. (증명사진이거나 연인의 스냅숏이거나 가족사진이거나 등등-- 사진 테마는 이후 집에 앉아 혼자서 창밖을 내다보며 맨 빵을 뜯어먹는 동안에도 반복된다. 죽은 사람의 사진들 (위아래가 마구잡이로 뒤섞인)을 정리하는 누군가의 손과 빵을 먹다가 테이블 끝 쪽으로 유리잔들을 밀쳐 떨어뜨리는 여자. 그리고는 외투를 이불삼아 잠에 빠져들고 -- 일어난다. 직장에 사직서를 낸 후 다른 누군가를 충동적으로 유혹한다. 쫓아낸다. [1.5] 유리잔의 깨진 잔해들을 정리하고 창밖을 내다보면, 리프트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고 있는 여자 자신이 보인다. 꿈처럼 느리게 미끄러지다 땅을 내딛자 덜컹이고 출렁이는 리프트. 여자는 버스를 기다린다. 뒤에선 누군가가 그녀의 코트에 붙은 먼지들을 털어준다. 가볍게 인사하자 ‘천만에요, now you can go’라고 말하는 낯선 이. (여자는 삶의 희망, 따스함을 되찾은 것일까?) -- 그 말대로 여자는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다. 방금 전 상황이 스크린에 다시 펼쳐지고 있다. 불이 켜진 극장, ‘남편을 잃은 여인’을 연기했던 여자는 배우로서 무대에 선다. 프로그래머가 그녀의 이력을 안내한다. “게르만, 소쿠로프, 무라토바 같은 거장의 영화들은 계속 얘기되고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출구로 우르르 빨려나간다. “뭐 이딴 영화가 다 있지? 내 삶도 피곤해 죽겠는데 이런 영화를 봐야하나?” 진행자는 관객들에게 가지 말라고 붙잡지만 나중에는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실소에 함께 웃음을 터뜨린다. 여배우를 위해 들고 나왔던 분홍 장미다발은 건네어지지 않고, 배우는 무대의 장막 뒤로 사라지려 하다가 다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인 뒤에 퇴장한다. 동원된 듯한 군인들도 일어서서 출구로 나간다. [2] 2부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극장과 지하철역 건물 내부를 움직여다니는 거대한 군중들. 동일한 방향으로 움직여가는 이들은 타인의 삶은 물론, 자신의 삶에도 무관심해보인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장면들을 피부로 그대로 전달하는 대중교통 시퀀스. 지하철 칸칸이 실린 사람들의 얼굴은 지문과도 같은 퍼스널리티가 아니라 피곤으로 동기화되어있다. 눈을 감고 어딘가로 실려가다가 문이 열리면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 극으로부터 빠져나와현실의 현장감 (피곤과 삶의 노곤함, 무의미 그 자체) 속으로... 일방통행처럼 보이는 군중의 흐름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바닥에 누운 한 남자를 통해 영화는 2부로 이동한다. 고등학교 교사인 그 역시 만성피로에 시달린다. 고양이와 강아지,, 새 등의 동물 에피소드가 삽입되어 있고, 생선장수가 있는 떠들썩한 시장풍경과 학교 수업시간이 교차한다. 조각상, 스틸 사진 속 얼굴들, 사람들이 ‘조각’을 흉내내는 게임이 열리고 있는 파티의 한 장면. 몸으로 다툼을 벌이는 사람들과 조각-회화 (누드화)를 흉내내는 인물들 교사의 꿈, 무력한 유기동물들의 얼굴 _ 잠에 빠져든 사람들 (“죽은거야?” “아니, 자는거야”)의 정지된 몸. = (정작 ‘죽은 사람들’은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 사물들 속에 파묻힌 채, 그들에 소속되고 싶지만, 카메라가 다가가면 몸을 움직이거나 눈을 깜빡인다. 장식품들. 아들과 어머니의 대화. 벽지의 무늬.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여학생 두 명과 영화 초반부의 할머니 세 명 (돌림노래 같은 것을 하며 인형을 들고 있다) - 대화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물려 소음이 되어버리는 연출. / 음악 삽입. 트럼펫 연주. 정신병원 장면들 = 초반부에 언급되었던 뱀을 삼킨 남자. 뱀은 뼈가 없어서 엑스레이에도 감지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울과 무기력은 병명을 확정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는 병가를 받고 병원에 입원한다. 장미꽃을 들고와, 당신을 wake you up 해주겠다는 제자. =>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 커플같은 모습으로 지하철에 오른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 그럼 “우린 이제 뭘 하지?” --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남자는 다시 잠에 빠져든다. 열차의 불이 다 꺼진채 어딘가로 멀어져 갈 때까지도... 소녀는 그를 몇 번 깨워보다가 지하철에서 내린다. 서로 귀찮기 때문에 불의에 눈감는 문제 --> 어느편이 선이라고 할 수 없이 고착되어 있는, 습관적 무기력증.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순환열차처럼 한방울의 슬픔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있다. [[“몽타주의 구조 배후에는 어떤 트라우마적 사건이나 충격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 무딘 백일몽 상태와 정신적 충격 상태 사이를 부유하는 영화 공격적인 여성과 수동적인 남성. Male nudity / 직접적인 욕설 (지하철 소음과 섞여들림) + 검열의 문제.]] + 맥베스는 양심을 져버리지 못한 채 살인을 저질렀기에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러면 <무기력 증후군>에서 쏟아지는 졸음은 ... 운행이 종료된 열차에 누워 실려가는 인간의 육신. 능동이 아닌 수동. 긍정이 아닌 부정. 공격적인 여자의 분노와 수동적인 윤리와 지. -- 병리적인 것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영화로 그림/조각을 재연하는 것. 타블로 비방 스러운 장면들.
boinda
3.0
무기력 증후군이 아니라 나타샤의 폭력적 히스테리 극이 끝나고 관객 앞에 인사하는 그녀의 실제 이름 올가 안토노바와 무라토바 감독을 소개하며 영화 속 영화에서 나와 두 시간 반의 거칠고 소란스러운 긴 여정이 시작된다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잘 못된 소개글은 영화 속에 훔겨진 의도를 견강부회 할 수 있다 소련은 붕괴되지 않았고 공산당 또한 건재한 시기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에 서구 평론가들이 무라토바의 비판적 작품을 보고 김치국 마시는 해석을 하는 듯 하다
기원
4.0
2019.11.3 - 야성적 순수: 키라 무라토바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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