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치언 씨의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가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발간되었다. 2005년 발간된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 이후 두번째 시집이다.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1999년)과 세계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2001년)에 각각 당선된 경험이 있는 최치언 씨는 대한민국 연극대상 희곡상(2009년)을 수상한 유망한 희곡 작가이자 총체극 연출가이기도 하다. 찬란하기까지 한 속도감과 한 편의 부조리극을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구성, 장르의 경계를 해체하는 시적 상상-구조력을 통해 합리성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누구나 불명료한 세계라 치부해버리는 이 세계의 어두운 단면을 적나라한 빛의 언어로 다루는 이번 시집은 통념과 금기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시의 독자들을 안내할 것이다.
+ 금기의 언어-시를 말하다!
최치언의 이번 시집은 플라톤의 저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플라톤은 시인을 신용하지 않았다. 시인들은 가짜의 세계를 가짜의 언어로 숨겼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최치언은 이를 극복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계가 합리성과 이성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환상을 ‘시’로 깨버리려 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곳은 절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에게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은 없다. 플라톤의 말을 그대로 뒤집는 것이다. 과연 저 밖의 세계가 진짜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최치언 시의 난해는 이 때문이다. 그의 시-언어는 우리가 객관적 논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고방식의 틀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우리’의 시선으론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이를 ‘왜곡’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가짜’라고 부를 수는 없다. 눈치챘겠지만, ‘비정상’ ‘왜곡’이란 단어는 ‘정상’과 ‘진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므로. 우리는 오랜 시간 이 두 단어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데에 의심을 품고 있었으므로. ‘진짜’와 ‘가짜’이 등장한 이때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맹신하고 있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에 대해. 최치언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시-언어는 이 맹신을 단칼에 잘라낸다. ‘이 세계를 의심하라!’
+ ‘이 세계를 의심하라’
여기까지 왔을 때, 우리는 그의 시적 태도를 물어야 한다. 이에 따라, 이 시집의 가치는 결정된다. ‘내’가 본 것이 ‘진짜’라고 ‘너희들’이 보고 있는 것은 모두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너희들’을 다그치고 모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넣는 ‘문학’은, 그것이 아무리 ‘진리’더라도 그 가치를 잃지 않을까. 최치언은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현자’이다. 그는 아무도 다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호흡과 리듬에 맞춰 읽는 이들을 바깥으로 유인해내는 조력자/유혹자의 역할에 더 충실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독한 현실을 달콤/화려한 언변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너희들’을 이리로, 이리로 유혹한다. 급박하게 때론 부드럽게. 동시에 그는 치열하게 싸운다. 자신이 보지 못한 것과 보려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들과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그는 테레이시아스이자 오이디푸스이며 오디세우스이자 세이렌이다. 이 싸움의 기록이 바로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이다.
+ 가부장(家父長)과의 싸움
세계의 바탕은 가족이다. 모든 관계는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족으로 끝난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가족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때 가족은 울타리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가족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 울타리가 우리를 보호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 울타리는 합리성이고 이성이며 보호인 동시에 강요이며 억압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합리성과 이성을 교육받는다. 울타리 밖이 분명한 세계라는 것을 그곳에 서야 비로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사회는 감추고 있다. 최치언은 첫 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하였다.
홀로 남아 썩는 것들아!
내가 아니었으면 오직 너였을, 혼자되지 않을 것들아.
어떻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본 하늘은 온통 핏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리고 우린, 다시 각자가 되어 먼 곳으로 떠났다.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전문
시집의 첫 시인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이 시는 제목이 없다. 편의상 시의 첫 행을 제목으로 둔다)를 가족과 그 울타리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서로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지만 끝내 “사랑을 하”는, 해야만 하는 개념. 최지언은 이렇게 시작되는 시로 앞으로 진행될 <기상천외 해괴망측 가족사>를 위로한다. 그의 의도는 ‘가족’으로 대표되는 이성과 합리성의 해체가 아니라 우리가 비정상이라고 부르는, 그 감추고 싶어 하는 실제하는 것들에 대한 드러냄이다. 시인은 눈 먼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눈앞의 현실은 보지 못하면서 더 먼 곳을 바라보는 존재들. 그는 시인이라는 천형을 받아들이고 개인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읽어낸다. 그들은 ‘아버지’이다.
아버지 기억나세요
이 아름다운 집에서 당신만 없다는 것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진다던
엄마의 말이 ─「개인의 집」 부분
흔하디흔한, ‘아버지 죽이기 그리고 이에 따른 세계를 구하는 오이디푸스적 스토리’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이 독백은 이에 기댄 발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세계 속의 아버지는 그 역시 비탄의 존재이다. 아버지들은 “한그루 큰 나무처럼 서서 당신의 굵고 힘찬 뿌리를 화분에/심으려고 자꾸만 헉헉대며 우는” 존재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나약하고 다만 아무 곳으로 탈주할 궁리를 하지 않는 자들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우리를 가둔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는 정확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정형되어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갇히기 위해 헉헉대거나 스스로 갇혀버린 존재들에 불과하다.
그가 미용실에서 나왔을 때 그가 미용사인지 머리 깎은 손님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그가 건너편 슈퍼마켓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미용사가 물건을 사기 위해 슈퍼에 들어간 것인지
머리 깎은 손님이 담배를 사기 위해 슈퍼에 들어 간 것인지
[……]
횡단보도를 황급히 건너 내가 바라보는 옥상아래 건물을 지나
식당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처음 슈퍼를 식당으로 착각한 머리 깎은 손님이었는지
미용사가 슈퍼주인에게 빈 미용실을 맡기고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간 것인지 또 아님 그는
─「창문에 비친 거리의 방식」 부분
우리는 불확정적인 것을 불안해하는 존재들이다.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한다. 불안과 공포는 우리를 화분 속으로 밀어 넣는다. 울타리 밖은 늑대와 이리가 가득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곳에 산딸기 열매가 있을지 향기 가득한 꽃이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으로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사실 최치언 역시 그곳에 가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선험적인 그의 지팡이가 가리키는 곳에 ‘가족’의 실체, 우리의 믿음에 ‘실체’가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의 마지막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황폐한 삶에서
나는 이사를 갈 것이다
[……]
나는 이사를 갈 것이다 오래 묵은 장롱과 책장을 버리고 낡은 구두를 버리고
밤새 눈물로 쓴 편지들도 버리고 버려진 사연들은 아마 울겠지 버려진 사연만
우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죽은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