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세일

怒りの日
平均 4.0
종교가 인간의 질서 위에 군림하여 그들의 삶을 강제적으로 정립하고, 기득권의 이념에 맞지 않는 모든 자들은 마녀로 몰고 가며 규탄한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탄생한 종교라는 개념의 아이러니. 아마도 이러한 아이러니가 가장 잘 드러나는 순간은 잔 다르크의 이야기에 있을 것이고, <분노의 날>은 잔 다르크에게 가려진 또 다른 여성들의 마녀사냥에 대한 불합리를 스크린에 재현한다. 어쩌면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가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쓴 <잔 다르크의 수난>. 다만 <분노의 날>은 잔 다르크와 같은 투쟁적 여성에 대한 일종의 영웅 서사가 아닌, 시대의 질병에 매몰된 서민 여성의 삶에 대한 비극을 중점으로 다룬다. 그저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었을 뿐인 안느의 바람은, 어느샌가 파렴치한 마녀가 꾸민 유혹적 죄악이 되었다. 그녀의 몸을 탐하고 얻기 위해 성직자로서의 진리를 저버린 목사. 그리고 아버지의 아내, 즉 본인의 새엄마인 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녀에 대한 욕망을 놓지 못한 아들. 그들의 사이에서 안느가 벌인 일은, 사랑하지 않는 목사를 증오하는 동시에 마음이 가는 대로 그의 아들을 사랑한 것뿐. 거짓을 부정하고 진실을 포용하였기에 끝내 마녀가 된 안느. 영화의 마지막에서 본인 스스로를 마녀로 지칭하며 타인의 압박 하에 모든 죄를 털어놓는 장면에서의 안느는, 끝내 삶의 마지막 순간마저 거짓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던 그녀와 같은 처지에 놓였던 당대 여성들의 모습을 상징하게 된다. 여타 드레이어의 영화가 모두 그러했듯, <분노의 날>의 숏 또한 일정하게 정갈함을 유지한다. 그리고 모든 인물들이 영화에 필요한 최소한의 연기만을 선보일 뿐, 그 이상의 운동적인 분출을 지양한다. 하지만 드레이어와 브레송의 차이가 있다면, 드레이어는 인물들의 얼굴(감정)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극의 초반 본인의 목숨을 구해주지 않아 목사를 증오하게 된 마녀로 지칭당한 여성의 표정, 그리고 점점 개인의 삶에 대한 주체를 되찾아가면서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겪던 안느. 이것이 둘의 (종교) 영화에서 각기 다른 숭고함이 묻어나는 이유가 아닐까. 브레송은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싫어했지만, 드레이어는 <잔 다르크의 수난>의 정신적 후속작과도 같은 <분노의 날>을 통해 그에 응수했다. 이처럼 거장들의 흥미로운 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