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준영

파우스트
平均 3.8
올바른 오답. . 밀란 쿤데라는 'what if'(만약 이랬더라면)의 의미를 부정한다. 인간은 여러 번 살지 못하기 때문에 전생과 현생, 현생과 후생을 비교해 어떤 삶이 최선이었는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사는 단 한 번의 삶, 그것이 전부다. 이 비극적 한계에서 많은 태도가 파생되어 나온다. 공부에만 열중해 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고등학교 때 영화인의 꿈을 좇는 게 나았을지 결코 알 수 없다.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할 수도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이 결말로 향한다. 가지 않은 길을 영원히 동경할 수도 있다. ‘라라랜드’의 결말은 그렇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아니면 느닷없이 대학을 자퇴하고 영화를 찍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런 영화가 인기가 많다. ‘업’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도 ‘버킷 리스트’도 이런 모험의 길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전히 초짜 감독은 대학을 자퇴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지 알 수 없을 것이다. . 괴테는 대문호다운 상상의 나래를 편다. 시네마를 포기한 우리의 대학생처럼, 평생 지식과 학문에 헌신하는 오솔길을 걸었던 파우스트는 깊은 공허감에 빠진다. “어디서나 인간들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 어쩌다 하나쯤 재수 좋은 놈이 존재했다는 것, 그걸 알려고 수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48) 자신의 마음속에 끈질기게 살아있는 두 번째 오솔길이 미련과 동경과 후회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 내 가슴 속엔 두 개의 영혼이 깃들여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떨어지려고 하네. 하나는 음탕한 애욕에 빠져 현세에 매달려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고, 다른 하나는 과감히 세속의 티끌을 떠나 숭고한 선인들의 영역에 오르려고 하네.”(69) 괴테는 대범하게도 파우스트에게 두 번째 삶을 선사한다. ‘뒤로 재생’ 버튼이 눌리고, 갈림길의 시작점에 돌아온 파우스트는 역사상 최초로 두 삶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재수 좋은 놈’이 된다. . 파우스트가 내일이 아닌 오늘을 위한 삶에 시동을 거는 동안 고생하는 건 메피스토펠레스뿐이다. 시종일관 희극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는 화려한 ‘욜로 라이프’ 뒤에는 반드시 뒤치다꺼리가 따른다는 걸 상기시킨다. “내게도 앞으로 고생을 시키지 말아 주세요. 바라건대, 너무 인색하지 마시기를! 나는 머리를 짜내면서 견마지로를 다하고 있는데...”(148) 농담으로 적대적인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기는 했지만, 괴테는 분명 영앤 리치에 호의적인 사람이 아니다. 젊은 시절의 방탕에는 부모님의 희생이 영수증으로 따라붙는다. 그 부모님의 여유에는 노동계급의 피땀이라는 원료가 서려 있다. 그 노동계급의 하루는 남반구 하층민의 시체들이 지탱하고 있다. 배우의 대사로 들었으면 유머에 불과했을 구절이 지면 위에서 예사롭지 않게 변모한다. “나 자신이 악마가 아니라면, 당장 악마에게 몸을 맡기고픈 심정입니다.”(152) . 하지만 메피스토펠레스의 눈물겨운(?) 헌신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는 두 번째 오솔길에서 궁극의 행복을 찾지 못한다. 그는 향락의 충족은 새로운 결핍이나 끔찍한 권태로 이어진다는 쇼펜하우어의 진리를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다. “그리하여 나는 욕망에서 향락을 향해 비척거리다가, 향락 속에선 또다시 새로운 욕망을 그리워하고 있다.”(178) 동시에 그는 온 세계가 고통받는 동안 태연하게 쾌락을 추구하면 영혼이 썩어 병들어버린다는 것도 배운다. 하룻밤 불놀이의 희생자가 된 그레트헨을 보면서 파우스트는 잊고 있던 양심의 심판을 받는다. 반면 메피스토펠레스는 희극적인 어조를 버리고 드디어 황야라는 악마다운 배경에서 그의 나약함을 꾸짖는다. 읽는 이는 여기서 이반을 비웃는 스메르쟈코프를 희미하게 예견할 수 있다. “이제 우린 다시 지혜의 한계에 도달했소이다. 이쯤 되면 당신들 인간들은 머리가 돌아버릴 거요. 끝까지 해낼 수도 없으면서, 왜 우리와 한통속이 된 겁니까? 날고는 싶은데 눈앞이 아찔해서 안 된다는 게요? 우리가 당신에게 강요한 거요? 아니면 당신이 우리에게 붙은 거요?”(236) . 그레트헨이 세계문학사에 유례없는 감동과 함께 파멸하면서 파우스트의 두 번째 오솔길, 그리고 1부는 끝난다. 이 대목의 긴박함과 장중함은 1부를 직접 통독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파우스트: 당신은 살아야 해! / 마르게레테: 하느님, 심판해 주소서!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에게) 갑시다, 가요! 아니면 그 계집과 함께 내버려두겠소. 마르게레테: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절 구원하소서! 천사들이여! 그대들 성스런 무리여. 절 에워싸고 지켜주소서. 하인리히! 전 당신이 무서워요. 메피스토펠레스: 그녀는 심판받았소! / 목소리: (위로부터) 구원받았노라!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에게) 내게로 오시오! (파우스트와 함께 사라진다) 목소리: (안으로부터, 점점 스러지면서) 하인리히! 하인리히!”(249) . 2부에서 파우스트는 보다 괴테 자신에게 밀착한다. 정신과 육체의 길에서 번갈아 허무를 경험한 그는 쇼펜하우어의 예견대로 (고전) 예술에서 빛을 찾는다. 덕분에 읽는 이는 갑자기 신곡 뺨치는 서양 인문학 능력인증평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거창한 인명과 지명을 소거하면 2부의 핵심도 자명하다. “뭘 하는 거요, 어리석은 사람들아? 대체 무슨 짓들이오? 이건 단지 가장무도회 장난이란 말이오. 오늘 밤은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마시오. 황금이나 보물을 정말 주었다고 믿나요? 이런 놀이에선 여러분에게 장난감 돈도 과할 것이오. 답답한 양반들! 교묘한 가상이 곧장 천박한 진실로 되어야 하는가.”(2; 64) 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에 불과할 뿐이다. 괴테가 고전적 아름다움의 정수로 상정하는 헬레나와의 사랑도 오이포리온의 죽음과 함께 허깨비 같은 면사포만 남긴다. 쇼펜하우어는 틀렸다. 예술은 구원의 해답이 되지 못한다. . 만년의 괴테는 기개를 잃지 않는다. 삶다운 삶을 찾아 달까지도 날아갈 양반이라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조롱에도 파우스트는 꿋꿋이 답한다. “당치도 않은 소리! 이 지상에는 아직도 위대한 일을 할 여지가 남아 있어. 놀랄 만한 일을 해내야 해. 과감히 노력하고픈 힘이 느껴지네. (중략) 행위가 전부다. 명성은 허무한 것이다.”(2; 296) 파우스트는 괴테가 정해 놓은 답에 근접해간다. 무엇을 추구하는지(진리, 감각, 예술)는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추구하는지(위대한, 놀랄 만한, 과감한)가 중요하다. 그는 생각해낼 수 있는 최고의 도전을 스스로 부과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물결이 아무리 넘쳐도 언덕을 만나면 휘감기듯 돌아나가니까. 그것이 제아무리 오만하게 날뛰어도 약간의 높이면 그것과 당당히 맞설 수 있고, 약간의 깊이면 그것을 힘차게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2; 298) 그는 삶이라는 바다를 간척하겠다고 나선다. . 마지막 시험이 닥친다. 뮤지컬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질 만큼 음악적인 5막에서 결핍, 죄악, 근심, 궁핍이 찾아온다.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건 이 중 근심뿐이다. “내 목소리, 귀에는 들리지 않아도 마음속엔 쟁쟁히 울릴 거예요. 온갖 형상으로 바뀌면서 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답니다. 오솔길에서나 파도 위에서나 영원히 불안한 길동무지요. 찾지 않아도 항상 나타나 저주를 받지만 아첨도 받는답니다-당신은 아직 근심을 모르셨나요?”(2; 357) 그러나 우리의 대학생과 다르게 파우스트는 세 갈래의 삶을 비교하는 특권을 누린 사람이다. 그는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2; 364)라는 진리를 확신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근심이 그의 눈을 멀게 하지만, 이미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젊은 방황의 시절을 보냈기에 파우스트는 허둥대지 않는다. 정신의 눈이 멀었던 사람은 육체의 눈이 멀었을 때 오히려 빛을 발견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래를 향해 투쟁하던 그는 최고의 행복을 맛보며 숨을 거둔다. . 괴테는 하느님의 권능을 빌려 파우스트의 삶을 채점한다.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네가 무슨 유혹을 하든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니까.”(24) 1부의 서막을 열었던 신의 말씀은 2부의 대단원에서 반복되며 작품의 수미상관 구조를 완성한다.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 그에겐 천상으로부터 사랑의 은총이 내려졌으니, 축복받은 무리가 그를 진심으로 환영하게 되리라.”(2; 381) 어쨌든 온 힘을 다해 갈망한 자는 구원의 자격이 있다는 근거로 괴테는 100점을 매긴다. 학문의 진리-육체의 쾌락-예술의 초월-행위의 투쟁 순으로 노선 변경을 겪은 파우스트의 최종 답안에 만점을 준 것이다. 그러나 읽는 이는 출제자가 응시한 시험을 순순히 인정할 수 없다. 과연 괴테의 이야기는 단 한 번 살아야 하는 우리의 한계를 극복해주는가? 그리고 그의 결론은 본받을 만한가? . 첫째 질문은 유연하게 평가할 수 있다. 파우스트는 분명 우리의 대학생과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는 동시에 쟁취할 수 없는 목표를 추구하고, 읽는 이를 대신해 여러 대안을 차례로 경험하며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유추해내려 애쓴다. 고뇌하는 현대인을 대신해 괴테가 일련의 수고로운 사고실험을 했다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의 관념론이나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이 그러하듯이 이 사고실험은 괴테의 머릿속에서만 완결된 형태를 띤다. 파우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시인하듯이, “그런 양피지 책이, 무슨 성스런 샘물이나 되듯 한 모금 마셔 영원히 갈증을 풀어줄 수 있겠나? 그것이 자네의 영혼에서 샘솟은 것이 아니라면, 상쾌한 맛을 얻지 못할 것일세.”(44) 괴테의 결론에 영혼으로 동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파우스트’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보다 그럴듯하고 단정하지 못할 것이다. . 그리고 파우스트의 결론은 본받을 만하지 않다. 무슨 길을 걷든 당당하고 힘차게 걷는다면 의미로 충만한 여정이 되리라는 말은 분명 위로를 준다. 그러나 올바르지 않은 길은 분명 존재한다. 그레트헨의 오빠를 죽이고 노부부의 집을 불태운 파우스트의 길은 맹목적인 자아 확장의 길이고 폭주의 길이다. 지식을 탐구하고 쾌락에 탐닉하고 예술을 탐험한 그의 여정 역시 강렬한 의지 하에 수행된 행위였다는 점은, 그리고 파우스트가 바로 그 행위들을 하나하나 후회하고 반성했다는 점은 어떤 길이든 열심히만 걸으라는 응원의 타당성마저 무색하게 한다. 차라리 간척지에서 깨달음을 얻은 파우스트가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면서 모든 순간이 행복이었음을 인정했다면 이야기에는 일관적인 힘이 실렸을 것이다. 말하자면 괴테는 올바르지 않은 풀이 과정을 거친 올바르지 않은 해답이 정답이라고 올바르지 않게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 그런데 희한하게도 괴테의 오답은 마음에 따스한 위안을 준다. 여러 삶을 살고 비교한 파우스트조차 정답을 찾지 못했다면, 단 한 번 살아야 하는 우리의 대학생이 연거푸 오답을 고르는 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what if’를 되뇔 필요조차 없다. 대안인 줄 알았던 선택지도 오답이었으리라는 게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괴테는 다른 작가들과는 조금 차별화된 명제로 읽는 이의 삶에 불빛을 비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모든 삶이 하나의 정답이라고 말한다. 카뮈의 ‘페스트’는 삶에 정답이라는 건 없다고 말한다. ‘파우스트’는 모든 삶이 하나의 오답이라고 말하는 책이다. 인간에게는 매번 어김없이 오답을 고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신과 악마가 나란히 인간의 삶을 자신의 정답으로 채점하는 동안, “메피스토펠레스: 그녀는 심판받았소! / 목소리: (위로부터) 구원받았노라!” 그레트헨과 파우스트는 모두 자신의 오답을 고수한다. 우리의 대학생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틀린 답을 골랐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이 틀렸다고 ‘옳게’ 생각할 것이다. ‘저는 틀렸습니다.’ ‘정답입니다!’ . +2부는...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