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평양냉면 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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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onth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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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론

本 ・ 2017

平均 4.2

하스미 시게히코를 읽는다는 것은 언어의 자장 안에서 펼쳐지는 거울 앞에 맨살의 얼굴을 노정하는 표층적 체험에 다름 아니다. 이 얼굴은 누구도 예측할 수없는, 그러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텍스트적 ‘모방과 반복’인 셈이다. 그 모방과 반복, 표층적 체험이란 하스미를 열심히 읽은 이들도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이런 식이다. 『그 후』(1909)에서 다이스케는 자신이 소개하여 친구 하라오카와 결혼한 미치요에게 대한 감정을 깨닫는다. 소세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너무도 강렬한 우주의 자극에 견딜 수 없게 된 머리를 되도록 푸른빛을 띤 깊은 물 속에 가라앉히고 싶을 정도였다” 이 푸른색의 이항대립, 붉은빛이 결말에 그가 자신의 감정을 모두 고백한 것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원조도 끊기게 되어 ”담배가게의 포렴이 빨갛다. 할인 판매의 깃발도 빨갛다. 전주가 빨갛다. 붉은 페인트칠을 한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빨개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소세키가 작가 자신을 무한히 희박화한 것이다. 작가가 언어를 지배한다는 종속 혹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언어가 작가를 지배한다는 범용하고도 엄숙한 벌거벗은 언어 체험의 현실. 그 현실이 어떻게 변용되어 작품에 풍부한 표정을 부여하는가, 이것이 하스미가 주목하는 표층 체험이다. 작가란 텍스트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부단히 이해하여 작품의 표층에 그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는 존재다. 작품은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작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완성되지 못한 소세키의 유작 『명암』(1916) 에서 주인공 ‘쓰다’가 겪는 입원 신세에서 소세키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힘들지만 말이다. 그런 탓에 우리는 어떠한 것을 ‘정신분석학’과 같은 외부의 담론을 가져와 그 욕망을 발아시키는 것이다. 발아되더라도 그것이 벌어지는 장소는 오직 ‘작품’ 속이여만 한다. 『산시로』(1908)에서 중요한 청각적 기호로 많은 이들은 산시로의 나지막한 내면적 음성 “스트레이 십”(Stray Sheep, 길 잃은 양)을 지적한다. 하스미는 그것보다 미네코의 초상화를 두고 ‘숲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 산시로는 ”숲의 여자라는 제목이 나쁘다“고 말한 외면적 음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거기서 산시로는 다른 제목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는다. 왜 일까. 소세키적 작품에서 여성은 범람하는 물 주변에서 등장하여 주인공을 유혹하고, 그것을 매개로 몽매한 그들을 일깨우지 않았는가. 다만 산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을 깨닫고 난 이후는 자신이 미네코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녀가 결혼하는 것을 지켜본 이후로, 자신이 “Stray Sheep"인 것을 인정하는 때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에고이즘(자기본위)는 그런 점에서 하스미에게 무용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진은 소세키의 근대성, 구조주의적 심층을 마르크스와 칸트, 프로이트 등의 견해를 통해 일종의 ‘트랜스 크리틱’을 행한다. 그에게 소세키는 사상적으로 ‘세계 시민’인 셈이다. 반면에 하스미에게 소세키는 ‘세계 시민’ 따위에 관심없는 “말의 바다의 수면에, 언어를 베개 삼고 드러누워” 자장 안의 한계에서 표층적 유희에 취한 ‘문학 공화국의 시민’이다. 고진의 ‘세계 시민’이 텍스트를 방패로 명망 받는 어떤 작가도 거기에 속할 수 있다. 하스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라타니의 사상적 시민은 명망 높은 어떤 작가도 사유를 무기로, 작품을 방패로 입성 가능하다. 하스미의 그것은 다르다. 사상적 본위를 배제하고 그것 자체에 노정됨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전에 이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가라타니: 저는 아는 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스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죠? (......) '알아야 한다'는 담론이 유통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가라타니: (문학계에는) 이론적인 자세를 경멸하는 낭만파 타입이 많죠. 저는 그런 타입을 가장 경멸합니다. 하스미: 자각해야 한다'는 자각과 무관하게 시선을 달리고, 그 달려간 시선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힘에 대한 반응의 방식이 무언가를 노정시키는 것, (......) 그렇게 해서 리얼한 것으로 노정되는 것만이 자각될 만하다는 것입니다. 하스미에게 그것을 행할 수있는 이는 엄격하게도 소수다. 그 엄격함은 그들이 ’미시마 유키오‘를 평가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라타니는 『역사와 반복』에서 그가 비록 극우주의자로 비극적인 마지막(자위대 앞에서 연설한 후 할복)을 벌였음에도 탐미주의적 문장과 현대 사회에 던진 묵직한 질문에 관하여 극우적이 아닌 천재적인 것이 지닌 사상을 긍정한다. 하스미는 고등학생 시절, 건너서 알던 그의 문학을 읽자마자 경멸했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철저히 계산하고, 그 계산된 구도 속에서만 움직인다. 거기에는 언어와 사물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사건'이 없다. 오직 미학이라는 이름의 박제된 포즈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소재로 삼은 가면도, 금각사도, 탐미주의적(하스미는 탐미주의라는 말 대신, 표층적이라고 말한다) 요소도 자신의 미학을 투영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 혹은 '도구'로 풍요로운 표면(Surface)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치환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작품에서 빌린 것은 작품에게 돌려준다. 이것이 하스미가 생각하는 ‘문학 공화국의 시민’인 소세키적인 혹은 작가의 태도다. 작품과 자신의 자장은 팽개친 채로 특히 자신의 사상, 태도, 관점을 강하게 부여하는 우둔함은 이 시대에 더욱 범람하고 있다. 자신을 반영한다는 것은 무한한 착각의 이중변속일 뿐이다. 시대에 따르는 것은 거기서 한 발 물러서지 못하고 그것과 긴밀히 밀착하여 지의 조직화를 완성하지 못하는 우둔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스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를 읽자. 존 포드를 보자. 오즈 야스지로를 보자.” 문학과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알고 있을 그 이름들은 애석하게도 너무나 알려지지 않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보수주의도, 인종주의도 아닌, 작품의 순수하고도 무한한 운동을 시작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그것이 작품의 유일한 모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