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론
하스미 시게히코
3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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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초기의 대표작이자 ‘나쓰메 소세키론’의 오래된 계보에서 있어서 가장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꼽히는 저작이다. 당시 저자가 갖고 있던 비전문가성, 즉 아마추어적인 측면은 소세키를 말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기는커녕 소세키의 텍스트와 쓸데없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뛰어난 소세키론을 발표하기도 했던 가라타니 고진이 이 책을 일컬어 “이처럼 의미의 끊임없는 해체를 통해 그것이 쾌락으로 이어지는 비평을 읽은 적이 없다. 오히려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것이 주저해질 정도이다.”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저자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그의 작품에 숨겨지고 매몰된 의미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것의 ‘말들의 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소세키를 “지극히 물질적인 언어의 실천가”로 포착하고 있다. 또한 그는 소세키라고 생각되는 그림자와의 조우를 회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세키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기억을 잊어버릴 것, 그리고 소세키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 것, 그리하여 언어 의외의 어떤 것도 시야로부터 일소해버릴 것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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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レビュー
4目次
-서장 읽는다는 것과 불의의 일격
-1장 드러눕는 소세키
-2장 거울과 반복
-3장 보고자 소세키
-4장 가까움의 유혹
-5장 절단의 흔적과 멂
-6장 명암의 그늘
-7장 비와 조우의 징조
-8장 젖은 풍경
-9장 종縱의 구도
-10장 <산시로>를 읽는다
-종장 소세키적 ‘작품’
-단행본 후기
-신판 후기
-해설
-옮긴이 후기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말의 바다’에 귀를 기울인다
‘물질적인 언어의 실천가’ 소세키
‘소세키를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의 바다의 수면에, 언어를 베개 삼고 드러누워… 그 주변에 소란스럽게 웅성대는 말들을 귀 기울여 경청하는 것”으로 “소세키에게 속하지 않으며, 읽는 이에게도 속하지 않는, 비인칭非人稱의 운동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문호’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그의 작품에 숨겨지고 매몰된 의미 따위는 없다고 선언하면서, 그것의 ‘말들의 운동’에 주목함으로써 소세키를 “지극히 물질적인 언어의 실천가”로 포착하고 있다.
방법적인 ‘기억상실’의 시도
저자는 이 책의 서장 “읽는다는 것과 불의의 일격”에서 이 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아닌가’에 대해 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라는 작가 자신의 초상을 해독하는 비평도 아니며, 소세키가 지어낸 이야기에서 무언가 상징성을 읽어내려는 시도도 아니다(그런 탓에 정신분석적인 접근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저자는 소세키라고 생각되는 그림자와의 조우를 회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이를 통해 이중의 의미에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소세키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기억을 잊어버릴 것, 그리고 소세키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잊도록 하는 상황을 만들 것. 그리하여 언어 의외의 어떤 것도 시야로부터 일소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처럼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텍스트 자체이며 소세키의 여러 작품에서 서로 연관을 만들어가는 언어의 자장磁場이다. 이것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저자는 임시적으로 ‘소세키적 존재’와 ‘소세키적 작품’이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소세키적 존재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세키 그 사람이 아니라 여러 작품을 통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소세키적’인 요소를 우연히 갖게 된 어떤 인간을 말한다. 그리고 소세키적 작품이란 소세키의 각 작품에 있어서의 이야기나 상징 같은 것이 아니라 언어들의 조합으로서 소세키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을 말한다. 이 문제설정의 수법이야말로 이 책을 읽는 데 있어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핵심에 더해 작품에서 반복해서 드러나는 모티브를 추출한다는 테마비평적인 시도가 더해지면서 이 책은 자신만의 독특한 비평적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사건으로서의 ‘드러눕는 것’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나쓰메 소세키의 다양한 작품들을 횡단하면서 여러 모티브나 요소를 추출해내고 그것을 각 장으로 나누어서 논하고 있는 작가론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작가론과는 다른 점은 그가 추출해내는 모티브가 흔히 간과하기 쉬운 대목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제1장은 “드러눕는 소세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소세키가 소설의 인물들에게 자주 드러눕는 자세를 취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자세는 그 인물에게 있어 “소중한 타자를 불러들이는 것”이 되고 “그 때 일어나는 일들에 관해서, 조우하는 말에 의해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것”이 소세키적 작품의 구조라는 지적에 독자는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소세키의 작품은 “드러눕는다는 자세를 지키는 인간에게 무엇이 가능할지를 묻는 생생한 시도”로 볼 수 있으며 “그 시도에 있어서 소세키의 문학은 소세키의 ‘사상’ 따위를 까마득히 넘어서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추어’로서의 비평가
1978년에 출간된 이 책은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적 ‘모험’의 출발점에 위치하는 책이면서 동시에 일본에서 ‘비평의 시대’의 이정표 역할을 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저자는 1977년 어느 잡지의 청탁으로 소세키에 대한 글을 쓰게 된 것이 이 책 집필의 계기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프랑스문학 연구자로 일본문학의 ‘전문가’를 자처하기 힘든 처지임을 전제하는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그 자신의 말에 따르자면 “소세키를 논하는 것에 깊은 자기 생각을 품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문가성, 즉 아마추어적인 측면은 하지만 소세키를 말하는 데 있어 장애가 되기는커녕 소세키의 텍스트와 쓸데없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으로 보인다.
흔히 한 작가의 작품군을 읽을 때 시간적으로 축적되어 가는 순서에 따라 읽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이것은 그 작가를 수직적인 세계에 놓고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작가를 그것의 성숙에 이르는 도정으로 파악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일정한 역사성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스미는 소세키의 일군의 작품들을 가로방향으로 늘어서 있는 세계, 즉 수평적 세계로 파악한다. 이를테면 <행인>이 <마음> 바로 이전에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은 하등 고려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그 두 작품에서 반복되는 모티브가 어떤 것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훨씬 유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인공이 거문고의 소리를 듣게 되면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거나 비가 내리면 주인공이 여성과 함께 어딘가에 갇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세키를 봄으로써 우리는 인물들의 손에서 “언제 주사위가 떨어질까 하는 유예상태를 견디는 말들이 엮어내는, 서스펜스 풍부한 이야기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세계를 불안정성이 감도는 수평적인 세계로 파악함으로써 오늘날 비평적 ‘고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의미의 해체를 통한 쾌락
하스미 시게히코는 1960년대 후반부터 롤랑 바르트,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등의 저작을 일본에 소개한 저명한 프랑스문학자이자 동경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한 거물지식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광적이고 깊은 열정을 자랑하는 영화비평가로서의 얼굴도 가지고 있다. 그간 국내에는『영화의 맨살』,『감독 오즈 야스지로』등의 책을 통해 그의 영화에 대한 글들이 먼저 소개된 바가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 특유의 대단히 호흡이 길고 도발적이며 의미작용이 거의 상실될 지경까지 몰아붙이는 과감한 문체는 독자들에게 묘한 긴장감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선사하기도 했다.
『나쓰메 소세키론』은 문학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초기의 대표작이면서 일본에서의 ‘나쓰메 소세키론’의 오래된 계보에서 있어서 가장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 자신 뛰어난 소세키론을 발표하기도 했던 가라타니 고진은 이 책을 일컬어 “이처럼 의미의 끊임없는 해체를 통해 그것이 쾌락으로 이어지는 비평을 읽은 적이 없다. 오히려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것이 주저해질 정도이다.”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 책의 발간을 통해 ‘표층’의 비평가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의 세계와 쾌락에 찬 조우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평양냉면 마니아
5.0
하스미 시게히코를 읽는다는 것은 언어의 자장 안에서 펼쳐지는 거울 앞에 맨살의 얼굴을 노정하는 표층적 체험에 다름 아니다. 이 얼굴은 누구도 예측할 수없는, 그러니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텍스트적 ‘모방과 반복’인 셈이다. 그 모방과 반복, 표층적 체험이란 하스미를 열심히 읽은 이들도 파악하기 어려워한다. 이런 식이다. 『그 후』(1909)에서 다이스케는 자신이 소개하여 친구 하라오카와 결혼한 미치요에게 대한 감정을 깨닫는다. 소세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너무도 강렬한 우주의 자극에 견딜 수 없게 된 머리를 되도록 푸른빛을 띤 깊은 물 속에 가라앉히고 싶을 정도였다” 이 푸른색의 이항대립, 붉은빛이 결말에 그가 자신의 감정을 모두 고백한 것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원조도 끊기게 되어 ”담배가게의 포렴이 빨갛다. 할인 판매의 깃발도 빨갛다. 전주가 빨갛다. 붉은 페인트칠을 한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온통 빨개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소세키가 작가 자신을 무한히 희박화한 것이다. 작가가 언어를 지배한다는 종속 혹은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언어가 작가를 지배한다는 범용하고도 엄숙한 벌거벗은 언어 체험의 현실. 그 현실이 어떻게 변용되어 작품에 풍부한 표정을 부여하는가, 이것이 하스미가 주목하는 표층 체험이다. 작가란 텍스트의 지배자가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부단히 이해하여 작품의 표층에 그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는 존재다. 작품은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다. 작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욕망만 있을 뿐이다. 완성되지 못한 소세키의 유작 『명암』(1916) 에서 주인공 ‘쓰다’가 겪는 입원 신세에서 소세키를 떠올리지 않는다는 것은 힘들지만 말이다. 그런 탓에 우리는 어떠한 것을 ‘정신분석학’과 같은 외부의 담론을 가져와 그 욕망을 발아시키는 것이다. 발아되더라도 그것이 벌어지는 장소는 오직 ‘작품’ 속이여만 한다. 『산시로』(1908)에서 중요한 청각적 기호로 많은 이들은 산시로의 나지막한 내면적 음성 “스트레이 십”(Stray Sheep, 길 잃은 양)을 지적한다. 하스미는 그것보다 미네코의 초상화를 두고 ‘숲의 여인’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 산시로는 ”숲의 여자라는 제목이 나쁘다“고 말한 외면적 음성에 주목한다. 하지만 거기서 산시로는 다른 제목에 대해서는 제시하지 않는다. 왜 일까. 소세키적 작품에서 여성은 범람하는 물 주변에서 등장하여 주인공을 유혹하고, 그것을 매개로 몽매한 그들을 일깨우지 않았는가. 다만 산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것을 깨닫고 난 이후는 자신이 미네코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그녀가 결혼하는 것을 지켜본 이후로, 자신이 “Stray Sheep"인 것을 인정하는 때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에고이즘(자기본위)는 그런 점에서 하스미에게 무용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진은 소세키의 근대성, 구조주의적 심층을 마르크스와 칸트, 프로이트 등의 견해를 통해 일종의 ‘트랜스 크리틱’을 행한다. 그에게 소세키는 사상적으로 ‘세계 시민’인 셈이다. 반면에 하스미에게 소세키는 ‘세계 시민’ 따위에 관심없는 “말의 바다의 수면에, 언어를 베개 삼고 드러누워” 자장 안의 한계에서 표층적 유희에 취한 ‘문학 공화국의 시민’이다. 고진의 ‘세계 시민’이 텍스트를 방패로 명망 받는 어떤 작가도 거기에 속할 수 있다. 하스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가라타니의 사상적 시민은 명망 높은 어떤 작가도 사유를 무기로, 작품을 방패로 입성 가능하다. 하스미의 그것은 다르다. 사상적 본위를 배제하고 그것 자체에 노정됨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일전에 이에 관하여 논쟁을 벌인 바 있다. 가라타니: 저는 아는 것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스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죠? (......) '알아야 한다'는 담론이 유통되어버리지 않습니까? 가라타니: (문학계에는) 이론적인 자세를 경멸하는 낭만파 타입이 많죠. 저는 그런 타입을 가장 경멸합니다. 하스미: 자각해야 한다'는 자각과 무관하게 시선을 달리고, 그 달려간 시선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힘에 대한 반응의 방식이 무언가를 노정시키는 것, (......) 그렇게 해서 리얼한 것으로 노정되는 것만이 자각될 만하다는 것입니다. 하스미에게 그것을 행할 수있는 이는 엄격하게도 소수다. 그 엄격함은 그들이 ’미시마 유키오‘를 평가하는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가라타니는 『역사와 반복』에서 그가 비록 극우주의자로 비극적인 마지막(자위대 앞에서 연설한 후 할복)을 벌였음에도 탐미주의적 문장과 현대 사회에 던진 묵직한 질문에 관하여 극우적이 아닌 천재적인 것이 지닌 사상을 긍정한다. 하스미는 고등학생 시절, 건너서 알던 그의 문학을 읽자마자 경멸했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유키오의 문학은 근본적으로 '취향'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철저히 계산하고, 그 계산된 구도 속에서만 움직인다. 거기에는 언어와 사물이 부딪히며 발생하는 '사건'이 없다. 오직 미학이라는 이름의 박제된 포즈만이 있을 뿐이다." 그가 소재로 삼은 가면도, 금각사도, 탐미주의적(하스미는 탐미주의라는 말 대신, 표층적이라고 말한다) 요소도 자신의 미학을 투영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 혹은 '도구'로 풍요로운 표면(Surface)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치환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작품에서 빌린 것은 작품에게 돌려준다. 이것이 하스미가 생각하는 ‘문학 공화국의 시민’인 소세키적인 혹은 작가의 태도다. 작품과 자신의 자장은 팽개친 채로 특히 자신의 사상, 태도, 관점을 강하게 부여하는 우둔함은 이 시대에 더욱 범람하고 있다. 자신을 반영한다는 것은 무한한 착각의 이중변속일 뿐이다. 시대에 따르는 것은 거기서 한 발 물러서지 못하고 그것과 긴밀히 밀착하여 지의 조직화를 완성하지 못하는 우둔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스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를 읽자. 존 포드를 보자. 오즈 야스지로를 보자.” 문학과 영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알고 있을 그 이름들은 애석하게도 너무나 알려지지 않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보수주의도, 인종주의도 아닌, 작품의 순수하고도 무한한 운동을 시작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그것이 작품의 유일한 모럴이다.
Tere
강덕구 추천
바다코끼리
5.0
가라타니 고진은 소세키의 작품들 속 구조적 분열에 집중하며 그 분열을 통해 소세키의 이야기는 심층의 레벨로 하강한다고 이야기하며 이 심층이란 칸트의 물자체, 프로이트의 무의식, 마르크스의 하부구조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이러한 심층을 거부하며 소세키적 작품이란 언어의 표층에서 벌어지는 말의 자장에 흘러들어가 이를 유희해야 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를 실천해보이기 위해 소세키의 작품들에서 반복되는 들어눕는다는 것, 명과 암의 양극, 수직적 구조, 물을 근처에한 여자들을 풀어낸다. <풀베개>의 화공이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이야기 할때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림속 오필리아가 드러누워 있다는 사실이며, <마음>속 가마쿠라에서 선생님과의 시간에서 강조되는 것은 나와 선생이 물 위에 드러누워있었다는 사실에 다름이아니다. 소세키 작품들에서 드러눕는다는 것은 그 베갯맡에 사람들을 불러모아 말이 조직되도록 유혹하는 자세이기 때문이란 식이다. 당황스럽고 반발하고 싶은 동시에 짜릿하다. 전혀 새로우면서도 소세키의 소설이 잼있다는 것에는 오히려 이러한 표층적 몸짓들이 만드는 운동감이나 리듬이 깊이 관련되었다는 생각이드는 점에서 우리는 모두 이미 소세키 텍스트의 표층을 읽었다. 마쓰우라 리에코씨의 추천처럼 서장을 건너뛰고 1장 <드러눕는 소세키> 부터 읽기를 추천한다. 읽기에 앞서 <태풍>정도를 빼고는 소세키 전집을 모두 읽은 다음에 읽을 필요가 있으며 소세키 작품들의 심층을 이리저리 상상하고 맛보며 작가 소세키의 그림자와 조우하는 독서상우라는 사자성어로 웅변될 수 있는 범용한 즐거움을 먼저 맛보고 읽기를 권한다. 깨부술 벽을 충분히 쌓지 않았다면 그 망치질에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작품이나 이야기는 그저 생각한 대로 써지거나 이야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이 그에 걸맞게 조직되는 데는 그 나름의 계기가 필요한 것이다.
엄동규
5.0
'드러눕는다' '먹는다' '어두움과 밝음' 이라는 언어적 표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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