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혜미

소문의 벽
平均 4.1
2020年12月20日に見ました。
아버지에게 사랑스런 굴레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아버지는 나중 그걸 일거에 벗어던질 수가 있었다는 것, 그것만이 그에겐 큰 뜻이 있었다. (...) 하지만 이젠 현수 한 사람뿐 아니라 그 누구도 자의대로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다만 현수에게 보다 괴롭게 여겨지는 것은 그것을 남들처럼 사랑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장이든지 안방 내외든지 그 사람들에겐 제법 굴레가 단단해서 그것을 무척들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자신의 굴레만이 유독 헐렁하고, 그래서 더욱 괴롭고 가볍고, 도대체 사랑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남에게 굴레를 씌움으로써 스스로 그 굴레를 쓴 자(그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사랑할 수 있을 터이다)와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자, 어떤 기회에 고삐를 쥐듯 익숙해져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된 자와 그러지 못해 끝끝내 벗어던지고 싶어 하는 자(그들은 얼마나 자신의 굴레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가)의 차이가 아닐는지…… 그걸 함부로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현수는 분명 그런 것만 같았다. -37p 가학성 훈련 하지만 이제 틀렸어요. 뭐라구요? 그러나 전 결국 소설을 포기할 순 없을 거라구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글쎄 그럴까요? 제가 이렇게 열심히 이런 얘기를 떠들어대고 있는 건 이미 소설을 단념해버렸기 때문일 텐데요? 그럼요. 제가 소설을 포기했다는 건 물론 제게 할 말이 없다는 건 아니죠.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결국 제 내부와 언어의 욕구는 증가하고 있는데, 거꾸로 소설이라는 화법의 기능은 우리들에게서 자꾸만 더 무기력해져가고 있는 셈이지요. 그래서 전 소설보다 좀더 적절한 방법으로 저의 말을 계속하기 위해 그것을 포기해야 했다는 뜻이 될 수도 있구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도 또 이만한 이야기조차도 서로 잘 통할 수가 없다는 점이에요. 그만큼 저는 또 늘 이야기가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가구요. -285p 목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