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승

すずめの戸締まり
平均 3.4
보편적 서사로의 확장을 선언하는 분기점. 마침내 미야자키 하야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고양이를 미워할 수 있을까? 앙증맞은 고양이가 수십만 사상자를 낼 수 있는 신적 존재라는 사실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인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규모 재난에 ‘신’의 이름을 붙여 왔다. 성경뿐 아니라 동양의 무속신앙에도 재해를 통해 죄인을 처벌하는 신은 익히 등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같은 처벌의 신화는 필연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를 내포한다.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은 사람 중에는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어린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절대 선으로 상정되는 신이 순진무구한 아이를 해치는 것은 다분히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독실한 유신론자는 유한한 인간이 신의 ‘거룩한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망한 어머니를 찾아 동산을 헤매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궤변은 설득력을 잃는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부도덕한 신’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변덕이 신의 본질이니까.” 신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상정하는 최상의 인격자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목적 없이 쇄도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에 가깝다. 대지에 충격을 가해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는 통상적인 ‘악’이 아니다. 그저 일본 열도 아래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힘에 불과하다. ‘미미즈’가 폭발할 때 오색의 물방울이 하늘을 뒤덮는다. 분출하는 에너지가 악의를 지녔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 물방울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악이야 어찌 됐든, 변덕쟁이 신으로 인해 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 영화의 함의를 시제에 반영한다면, 지진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가족을 잃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즈메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소타의 임무를 돕는다. 그 누구보다 희생자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소중한 이를 너무 빨리 떠나보낸 사람에게 “끝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는 카프카의 격언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이로써 영화의 목표가 선명해진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생존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대규모 재난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전작 <너의 이름은>(2016)에서도 ‘대지진’이 직접적으로 인용된다. 다만, 전작은 재난보다 한 고등학생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었다. 지진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혹은 감춰졌던 사연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영화의 연결고리는 신카이 마코토의 죽음관에서 찾을 수 있다. <너의 이름은>의 두 청춘은 삶과 죽음이 맞닿는 영역에서 재회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삶과 죽음이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는 전작의 죽음관을 계승한다. 저세상은 분명 “현세의 우리는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스즈메는 어린 시절, 그리고 관람차에서 분출하는 ‘미미즈’를 통해 다른 세계의 누군가를 조우한 경험이 있다. 이때 ‘문 너머’를 별이 반짝이는 환상적인 세계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2017)가 그러했듯, 명을 달리한 이들이 아름다운 장소에 도달했다는 믿음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뭉클한 위로를 선사한다. 소타의 마지막 주문(呪文)과 스즈메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건네는 말은 스크린 너머의 생존자들을 향해 있다.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안다.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더 살고 싶다.” “널 사랑해줄 사람들이 있고, 너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리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거야.” 스즈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삶에 어떠한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가치한 삶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것은 소타와의 사랑이다. 극적인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삶과 죽음을 활용한 <너의 이름은>과 정반대로, <스즈메의 문단속>은 삶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사랑을 활용한 것이다. 선악의 범주를 초월한 신이 본래의 자리(요석)로 되돌아가며 혼란이 사그라든다. 신은 언제든 다시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힘이다. 그렇게 스즈메는 12년 동안 위태롭게 흔들리던 고향을 되찾는다. <너의 이름은>에서 ‘이름’이 소중한 인연을 연결하는 매개였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목소리’다. 여느 날처럼 학교에 등교하는, 지하철로 회사에 출근하는, “놀이동산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일상의 공간을 덮친 재난이 남기고 간 것은 간신히 기억을 붙잡고 있는 목소리 한 조각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잊혀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새로운 참사를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커플에 머무르던 추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반전(反戰), 환경 보존 등 인류 보편적인 서사를 신화의 양식을 빌려 풀어냈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사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집단의 공명을 일으키는 영화로의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면,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수식어가 더 이상 아깝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 “백만 명을 살렸으니 명예롭게 생각해라!” 참 일본스럽다. / 230325 2회차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