すずめの戸締まり
すずめの戸締まり
2022 · アニメーション/アドベンチャー/アクション · 日本
121分 · PG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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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Encounter

Abandoned Resort

First Aid

Cat Chase

Cat Chase

At Night in F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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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Encounter
Abandoned Resort
First Aid
Cat Chase
Cat Chase
At Night in Ferry
Pun2
1.5
솔직히 말해 날씨의 아이에서 발전한 게 없다. (날씨의 아이조차 잘 만든 작품이 아니지만) 뻔하게 공리주의적이기도 하다.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에 대한 질문이 날씨의 아이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올 줄은 몰랐다. . 과거로 돌아가 일본은 그 어떤 나라보다 자연재해를 많이 당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신을 향한 숭배가 필요했던 나라였고 이에 따라 비롯된 감정이 '체념'(모노노 아와레)이었다. 체념은 우리나라의 '한'처럼 일본인들의 특징적인 무언가로 남았다. .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렇게 주구장창 보여주는 벚꽃과 죽음에 대한 예찬,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 닌자 문화, 등 이들의 죽음에는 숭고함이라는 후천적인 감정이 뒤따르고, 일본 곳곳에 놓인 신사는 일본이 그 어떤 나라보다 죽음과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재난)에 대해 오래 생각한 나라임을 보여준다. (재해는 개인의 견해와 바램과 상관없이 찾아왔기에 후천적으로 '죽음'을 예찬해야 비극의 명분을 간신히 정당화시킬 수 있었다.) . 이 영화의 유일한 의의가 있다면 타 애니메이션과 다르게 '자연재해를 우리가 이겨보고 싶었다' 정도 밖에 없겠다. . 이 영화는 모험의 시작부터 삐그덕거린다. 단순히 초면인 남주와의 첫사랑이 모험의 시발점이 된다. 본래 이런 모험의 서사들은 긴급한 환경을 만들든, 주인공에게 소중한 것을 뺏든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게끔 박차를 가해줘야 하는데, '스즈메의 문단속'은 가장 강렬하게 시작해야 할 시발점마저 '우연'에 기댄다. 폐허를 찾아가게 된 이유를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에'로 명분을 만든 걸 목격한 뒤부터 난 급격히 피곤해졌다. 관객들은 어떠한 인과 없이 '주인공이니까', '모험을 시작해야하니까'라는 이유만으로 주인공의 과장된 행동과, 대사, 과잉된 감정들을 받아내야 했다. . 스토리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단 일종의 게임 스토리처럼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 잠깐 쉬었다 다시 보스가 등장, 또 클리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조금 강해진 보스가 다시 등장. 이런 과정을 무려 4,5번을 반복한다. 그래서 상영 시간이 120분임에도 불구하고 체감은 약 4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상투적이면서 대충 넘어가는 이 반복성이 어마어마한 피로감을 양성해낸다. 이렇게 만들거라면 굳이 영화가 아닌 TVA시리즈로 나왔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스즈메의 문단속'이 영화로 출시된 이유가 단 하나도 없다. 장르의 이점을 단 하나라도 살리지 못했다. . 캐릭터조차 공을 들이지 않았다. 주인공을 포함해 모든 캐릭터가 유형적이다. 복합적으로 설계된 캐릭터가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대로 '전사前史'가 구성돼 있는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모두가 경직된 개연성 속에서 마리오네트처럼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일종의 체스 말처럼 임무 뿐인 인물이기에 대사도 우리가 예상하는 범위 내에서만 논다. 결국 이는 각본의 부실함으로 이어지고 관객은 피로를 넘어선 곤욕스러움까지 느끼게 된다. . 심지어 여주인공은 전작들의 장점들만 대충 가져와 만들어 놓았고, 대사들보다 일본 여자 캐릭터들의 진부한 클리셰를 그냥 다 가져와서 박아놨다. 에에에? 놀라거나, 갑자기 해맑게 웃어 넘기거나, 즉 감정은 지나치게 과잉돼 있고,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텐션이 과하게 높게 설정돼 있다. 뻔하디 뻔한 애니메이션 특유의 감정과 대사를 연발하며 착한아이 증후군에 걸려 모든 사소한 사건 하나하나에 휘말린다. 그리하여 의미 없는 상영 시간만 더 늘어나게 됐다. . 중후반부터는 그저 대화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으면서 왜 이렇게 저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 정도다. 거의 세상 모든 비련의 여주인공 콩깍지를 다 쓴 것처럼 여자 주인공이 행동한다. . 음악의 사용마저 최악이다. 초반에는 영화 '바빌론'에 나올 법한 기똥찬 재즈 음악을 등굣길에 깔고, 추격전에 깔더니 후반에는 신카이 마코토의 시간여행, 신카이의 고전음악탐방, 나는 고전 음악이 좋아요 수준으로 영화가 전락해버린다. 뭐 가요톱텐도 아니고 말이다. . 이렇게 심하고 뻔뻔한 자기복제, 매니리즘은 처음 본다. 솔직히 자기복제를 하더라도 영화에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면, 그건 강점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너의 이름은 -> 날씨의 아이 ->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점차 장점은 사라지고 그저 좋았던 과거 만을 추억하며 그 과거들을 현실에 덕지덕지 붙여대고 있다. 이런 영화가 어떻게 흥행을 달리고 있는지 많은 작가들의 자전적인 매너리즘, 성공에 의한 자기복제를 목격해 왔지만 이렇게 처참하고 한심스러운 창작자의 행보는 처음 본다. . 한 줄 로그라인만 잘 설정하면 뭐하나, 그거에 그치고 영화를 제대로 못 만드는데.
진태
5.0
문을 열어 과거를 꼭 안아주고픈 현재의 사람들
스테디셀러
2.5
대뜸 빠르게 뛰는 심장에 맥을 짚지 못한다
이동진 평론가
3.0
작품 전체가 길고 간절하게 수행하는 의례처럼 다가온다.
Hitomi0ff
5.0
내가 로또 당첨되고 코인 대박나서 회사에 사직서내러 갈때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출근길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매일 보는 것 같다.
무비신
4.0
각자의 이유로 응어리 맺힌 이들에게 과거의 위로와 미래의 희망을 현재가 전한다.
김현승
3.5
보편적 서사로의 확장을 선언하는 분기점. 마침내 미야자키 하야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 똘망똘망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고양이를 미워할 수 있을까? 앙증맞은 고양이가 수십만 사상자를 낼 수 있는 신적 존재라는 사실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인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대규모 재난에 ‘신’의 이름을 붙여 왔다. 성경뿐 아니라 동양의 무속신앙에도 재해를 통해 죄인을 처벌하는 신은 익히 등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 같은 처벌의 신화는 필연적으로 치명적인 오류를 내포한다. 자연재해로 가족을 잃은 사람 중에는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어린아이도 있기 때문이다. 절대 선으로 상정되는 신이 순진무구한 아이를 해치는 것은 다분히 아이러니하다. 이에 대해 독실한 유신론자는 유한한 인간이 신의 ‘거룩한 뜻’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망한 어머니를 찾아 동산을 헤매는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궤변은 설득력을 잃는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부도덕한 신’에 대한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변덕이 신의 본질이니까.” 신은 더 이상 그리스도가 상정하는 최상의 인격자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목적 없이 쇄도하는 원초적인 에너지에 가깝다. 대지에 충격을 가해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는 통상적인 ‘악’이 아니다. 그저 일본 열도 아래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힘에 불과하다. ‘미미즈’가 폭발할 때 오색의 물방울이 하늘을 뒤덮는다. 분출하는 에너지가 악의를 지녔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 물방울을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악이야 어찌 됐든, 변덕쟁이 신으로 인해 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목숨을 잃는다. 영화의 함의를 시제에 반영한다면, 지진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가족을 잃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즈메는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소타의 임무를 돕는다. 그 누구보다 희생자의 고통을 잘 알고 있는 그녀였기 때문이다. 소중한 이를 너무 빨리 떠나보낸 사람에게 “끝이 있기에 삶이 아름답다.”는 카프카의 격언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 이로써 영화의 목표가 선명해진다.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생존자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삶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에 대규모 재난이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전작 <너의 이름은>(2016)에서도 ‘대지진’이 직접적으로 인용된다. 다만, 전작은 재난보다 한 고등학생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사가 전개되었다. 지진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 혹은 감춰졌던 사연으로서 기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 영화의 연결고리는 신카이 마코토의 죽음관에서 찾을 수 있다. <너의 이름은>의 두 청춘은 삶과 죽음이 맞닿는 영역에서 재회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삶과 죽음이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는 전작의 죽음관을 계승한다. 저세상은 분명 “현세의 우리는 갈 수도 없고, 가서도 안 되는 곳”이다. 그러나 스즈메는 어린 시절, 그리고 관람차에서 분출하는 ‘미미즈’를 통해 다른 세계의 누군가를 조우한 경험이 있다. 이때 ‘문 너머’를 별이 반짝이는 환상적인 세계로 묘사한 점이 흥미롭다. 픽사의 애니메이션 <코코>(2017)가 그러했듯, 명을 달리한 이들이 아름다운 장소에 도달했다는 믿음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뭉클한 위로를 선사한다. 소타의 마지막 주문(呪文)과 스즈메가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 건네는 말은 스크린 너머의 생존자들을 향해 있다. “인생이 덧없다는 것을 안다. 죽음이 늘 가까이에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오늘 하루를 더 살고 싶다.” “널 사랑해줄 사람들이 있고, 너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거야. 그리고 다시 일상을 살아갈 거야.” 스즈메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녀는 삶에 어떠한 미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가치한 삶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은 것은 소타와의 사랑이다. 극적인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삶과 죽음을 활용한 <너의 이름은>과 정반대로, <스즈메의 문단속>은 삶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사랑을 활용한 것이다. 선악의 범주를 초월한 신이 본래의 자리(요석)로 되돌아가며 혼란이 사그라든다. 신은 언제든 다시 변덕을 부릴 수 있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 인간의 힘이다. 그렇게 스즈메는 12년 동안 위태롭게 흔들리던 고향을 되찾는다. <너의 이름은>에서 ‘이름’이 소중한 인연을 연결하는 매개였다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목소리’다. 여느 날처럼 학교에 등교하는, 지하철로 회사에 출근하는, “놀이동산에서 첫 데이트를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일상의 공간을 덮친 재난이 남기고 간 것은 간신히 기억을 붙잡고 있는 목소리 한 조각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잊혀 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새로운 참사를 억제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하나의 커플에 머무르던 추억이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반전(反戰), 환경 보존 등 인류 보편적인 서사를 신화의 양식을 빌려 풀어냈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사적인 사랑 이야기에서 집단의 공명을 일으키는 영화로의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면,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수식어가 더 이상 아깝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 “백만 명을 살렸으니 명예롭게 생각해라!” 참 일본스럽다. / 230325 2회차 관람
Jay Oh
3.5
너의 이름 이전에, 먼저 마주해야 할 나의 이름은. Hello to the past. My name is... 다녀 + 오다. 되돌릴 수 없는 상실과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는 잊는 것이 아니라 딛고 일어나는 것이라는 이야기. 그 슬픔의 문은 언제든 열리기 마련이지만, 닫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는, 그럼에도 언제든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 재난, 성장, 사랑이 나름 괜찮게 어우러진 게, 좀 더 납득이 되는 <날씨의 아이>를 본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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