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홍준영

홍준영

6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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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本 ・ 2014

平均 3.8

기사의 의무는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 뻔뻔한 자작 찬양시와 유쾌한 서문을 넘겨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엉뚱하게도 주인공 돈키호테가 게걸스레 돼지고기를 먹는 장면이다. 한 장짜리 레포트를 쓸 때도 깜빡이는 커서를 한참 바라보며 첫 문장을(대개 첫 문장만) 고민하는 게 창작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의 선택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진다. 이때 주석이 단서를 준다. 당대는 개종한 유대인들을 상대로 신앙검증이 성행하던 가톨릭 극단주의의 시대였다는 점, 돈키호테가 먹던 돼지고기 요리의 이름은 '노고와 탄식'이었다는 점, 가슴속 깊이 신앙을 간직하던 이들은 이 요리를 강요당했을 때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점. 결국 첫 장면은 왕을 중심으로 하는 질서와 그를 지탱하는 가톨릭 신앙이라는 하나의 선택지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배경을 설명하고, 동시에 시작부터 돈키호테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돼지고기를 열심히 먹는 대목이 나오므로 그는 신실한 가톨릭교도인가? 아니면 '노고와 탄식'을 먹는 대목이 나오므로 그는 남몰래 가톨릭을 증오하며 자신의 신념을 숨기고 있는 사람인가? . 서두에 제시된 이 구도, 즉 위압적인 세계와 그 앞에 선 알쏭달쏭한 정체의 주인공이라는 구도는 작품 전체를 일관적으로 지배한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탐독하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가득한 모욕과 불의, 폭력과 위선에 눈을 뜨게 되고, 이러한 부조리에 모든 사람들이 수긍하는 현실이 유지될 수 있는 원인으로 '마술사'라는 가상의 존재를 지목한다. 그 마술사는 산초 같은 일반인들이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풍요로운 세계들을 왜곡하고 은폐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세계를 창조해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인정할 것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며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미치광이라고, 범죄자라고,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파멸시킨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등장한 비유와도 비슷하다. 실컷 '중립국'을 반복재생하고 문을 나선 주인공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 바다로 내보내는 마술사의 존재를 상상한다. 허상을 좇아 바다로 떠난 사람들은 난파당하고, 항구를 차지해버린 마술사는 돌아온 사람들을 위험하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둔다.) . 풍차를 거인이라고, 객줏집을 성이라고, 양떼를 군대라고 상상하는 돈키호테의 광기는 따라서 마술사와의 대결이다. 주저없이 풍차에 돌진하고 객줏집에서 전투를 벌이며 양떼들의 목을 베는 그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강요된 하나의 진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그에 저항해왔던 인류의 선구자들을 연상시킨다. 가톨릭 신본주의 앞에 선 종교개혁가들, 전제군주정 앞에 선 계몽사상가들, 독점자본주의 앞에 선 공산주의자들, 독재정치 앞에 선 민주화 운동가들. (놀랍게도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이들과 실제로 비슷한 말을 하는 돈키호테를 발견할 수 있다. "옛사람들이 황금시대라고 일컬은 그 행복한 시대, 행복한 세기가 있었으니, 이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네 것’, ‘내 것’이라는 이 두 가지 말을 몰랐기 때문이라오." "어떻게 강요당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왕이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욕망의 강력한 힘이 작용했을 경우 그 속에 죄악이 개입되지 않았다면 그 욕망을 따르는 자가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어디 가세요, 돈키호테 나리? 우리의 기독교에 대항하러 가도록 나리를 부추기다니, 대체 나리의 가슴속에는 무슨 놈의 악마가 있는 겁니까요?" 어쩌면 인류는 500년 넘게 엇비슷한 주제로 고민하고 투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런데 돈키호테의 여정은 단순히 현실 세계와 이상의 갈등만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그의 투쟁에는 필연적인 패배가 예정되어 있고, 돈키호테 역시 그 결말을 알고 있다는 점이 이 소설에 독특한 정서를 부여한다. 그는 자신에게 승산이 있는지, 패배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사르트르가 말한 것처럼 그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량을 극한까지 쏟아부어 대의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 대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욕과 불의를 쳐부숴야 한다는 기사도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패배하고 다시 패배한다. 읽는 이에게 코미디처럼만 다가왔던 그의 몸부림은 거듭 반복되면서 점차 숭고한 무게를 가지게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성스럽게마저 느껴진다. 또다시 부랑배들에게 두들겨맞은 후에도 일어나 갑옷을 고쳐 입고선 "죽음과 함께 끝나지 않는 고통은 없다."라고 말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의 모습은 어지간한 성공담이나 해피엔딩보다 더 짙은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질주, 불가능한 꿈을 향한 무모하고 비이성적인 질주가 바로 인류 문학에 흐르는 경이로운 맥박인 것이다. 불지옥의 결말을 목도하고도 사랑을 하고 춤을 추는 카르멘, 파멸할지언정 패배할 수 없다며 상어와 싸우는 카리브 해의 노인, 다시 내려올 걸 알면서도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올리는 시지프스, 타노스 앞에서 방패끈을 조이는 캡틴 아메리카와 영겁의 희생으로 지구를 구하는 닥터 스트레인지 모두 결국은 돈키호테라는 거대한 원형의 변주이자 확장판이다. 이러한 예술적 맥박은 앞서 언급했던 선구자들과 그들이 이룩했던 역사의 기억과 합쳐지고, 종교재판소, 군사재판소, 정신병원 등의 수단으로 현실을 장악하려 했던 마술사들과 그들과 맞서 싸우며 기꺼이 패배를 받아들인 무수한 기사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렇기에 돈키호테의 주된 테마는 냉소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향한 찬양이다. .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슬픈 몰골의 기사'의 모험을 그저 낭만적으로 이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모험 이야기가 젊은 주인공의 성장을 조명하는 데에 비해, 돈키호테는 길을 떠날 때부터 이미 늙은 노인이다. 그가 조롱하고 부정하는 오랜 인습들은 그 역시 평생 속해 있던 것들이고, 그렇기에 돈키호테가 기사의 도를 펴고자 겪는 고통들은 단순히 육체적 차원의 장애물이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벌이는 사투의 결과물로도 읽힌다. 자신 역시 몰락한 귀족이자 십일조를 내는 가톨릭교도이며 지주였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돈키호테가 벌이는 소동은(또 그로부터 유발되는 웃음은) 자조적인 너털웃음이기도 하다. 그가 불평등한 신분제도와 예속적인 경제, 폭압적인 정치와 종교, 신음하는 여성에 대해 기나긴 웅변을 늘어놓을 때 세르반테스의 칼날은 뚜렷하게 돈키호테를 향한다. 너 역시 저 마술사와 함께하지 않았느냐고. 정말 마술사가 따로 있고 기사가 따로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돈키호테가 자초하는 고행은 속죄의 뉘앙스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참사를 목격했고, 그에게 남은 인간성의 불빛은 알론소 키하다 나으리가 뼈가 으스러지도록 고통스러운 정화의 길로 들어서도록, 용맹스러운 기사 돈키호테가 되도록 이끌어 준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이처럼 돈키호테의 여정을 가슴 뜨거운 전진의 기록으로도, 씁쓸한 회한과 뒤늦은 회개의 기록으로도 볼 수 있게 설계한다. 가끔씩 산초를 통해 위로의 말을 건네며, 한 번씩은 그가 꿈꾸는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허락해주며, 이따금씩은 그에게 맞장구쳐 주면서. . +책의 편집은 읽기 좋게 잘 되어있다. 문장도 매끄럽고 오탈자도 없다. 그러나 두께가 들고 다니며 읽기에는 심히 불편하다. 삽화들이 각 장의 시작에 모여 있는 것도 아쉽다. [자가격리 기념 서문학 걸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