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르

Underground(英題)
平均 3.3
2022. 10. 27. 쉰 번째 영화 : 언더그라운드 일상에 지치고 사람에 지쳐 영화를 좋아했던 마음들이 점차 사그라드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금은 서글펐다. 헬스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기기도 했고 전만큼 우울하지 않은 탓인지 영화를 점차 멀리하게 됐다. 여러 현실적인 이유들로 영화제도 많이 참여 못하게 됐고.. 그래도 이런 우연한 자리에서 좋은 영화를 만나는 일은 아직도 반갑다. 전북지역에서 이 년째 진행하는 ‘비정규노동 생각주간’에 기획을 맡아 언더그라운드 공동상영을 함께 하게 되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대학생 때 어느 집회에 참가한 일이 있었다. 수많은 깃발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그 멋에 넋이 나간 내게 '너 왜 저렇게 많은 단위들이 깃발을 들고 집회에 참가하는지 아니?'라고 나를 집회에 데려온 선배가 물었다. 알 길이 없던 나는 당연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 선배는 '깃발은 우리가 어디 아래로 모여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꼭 필요한 거야.'라는 말을 남겼다. 그 때는 그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서른을 조금 넘긴 지금에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에게 이런 영화는 '깃발'과도 같다. 조합원들의 고충을 일일히 해결하고, 임금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교섭을 진행하고, 그저 많은 머리 수를 위해 집회에 나와주십사 조합원들을 조직하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운동이 맞는지,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내 운동의 정체성을 잃을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런 영화들은 우리가 어떤 기치 아래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해준다. 가끔 명확하지는 않더라도 또 우리가 같은 깃발 아래 있을 수 없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더라도 학습은 전체 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 우리가 어디쯤 자리하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짚어준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가 큰 틀 안에 함께하는 동지임을 인식하게 해주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운영위 자료 작성이, 조합원의 푸념을 들어주는 전화가, 산별 간부들과 커피 한 잔,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모든 총체가 무엇을 위함인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영화가 뚜렷하게 무언가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저 현상을 열거할 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는 우리가 선택할 문제처럼 덩그러니 놓아둔다. 깃발이 그러하듯, 그 아래로 모여 우리가 무엇을 할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 어쨌든 이 영화 덕분에 내가 민주노총에서 일하는 게 무엇을 위함이었나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좋았다. 하루하루 밥 벌어 먹고 사는 식충이가 아니라, 활동가로서의 삶을 택한 내가 지금 전체운동이라는 큰 틀 아래 어디쯤 있으며,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돌아볼 수 있게 해줘 고맙다. 가르치려 하지 않지만 가르침을 사사받는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