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이현승

이현승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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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인

本 ・ 2023

平均 3.7

정리 계몽의 시대는 신을 죽이고 이성을 드높였다. 양차 대전은 다시 이성을 죽였고, 이번엔 허무와 회의가 전 유럽에 번지게 되었다. 좌절된 인간 이상을 목격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냉소라는 감정이 일종의 세련된 사상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었다. 한편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의 잔재는 유럽을 어지럽혔고, 자본주의의 폐해는 여전히 척결되지 못했으며, 아직도 이념의 대립을 청산하지 못한 인류는 냉전에 돌입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카뮈의 <반항인>은 그러한 혼돈의 시기에 출간되었다. 본작에서 카뮈는 합리주의도 허무주의도 결국 낡은 종교적 관념의 형태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공산주의는 합리의 탈을 쓴 채 먼 훗날에 도래할 지상낙원을 약속한다. 허무주의는 가치판단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가치판단을 내리며 내부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허무를 신성화한다. 종교적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장구한 시도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예속으로 귀결되었다. 소련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예언적 가치를 섬기는 신성 제국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가치의 부재에서 오는 허무 속에 질식해 버렸다. 신을 상실한 인류의 최종적 귀결은 이념 재판에 의해 희생되던가, 혹은 자살하던가 둘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카뮈는 <반항인>에서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특히 공산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며 좌우 지식인들에게 동시에 욕을 먹었다. 실제로 책의 상당한 분량이 허무주의적 태도와 공산주의 비판을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역사에 의해 유토피아가 필연적으로 도래할 것임을 믿는 공산주의는 세상에 대한 절대적 긍정이고, 반대로 허무주의는 세상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 인류가 이러한 ‘절대성’을 논하는 순간 모순과 자가당착은 필연적이다. 카뮈의 말마따나 인류는 역사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역사를 파악할 수 없고,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성은 황당한 개념이기까지 하다. 그건 신의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절대성을 논하는 순간 인류는 전근대로 회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절대성을 표방한 새로운 사회 건설’은 말 자체가 모순이다. ‘절대적 가치를 내건 혁명’이라는 모순적 명제를 대신해 카뮈가 내놓는 대안은 바로 ‘반항’이다. 카뮈는 여러 역사적 예시(사드와 랭보, 니체, 그리고 레닌에서 히틀러까지)를 들며 반항과 혁명의 차이를 강조하고, 절대성에 반한 상대성과 중용의 정신(이른바 지중해 정신)을 설파한다(물론 그가 혁명 정신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1950년 당시 인류의 혁명은 그 ‘반항적 기원’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논리적 당착에 빠졌음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반항은 억압자에 대한 피억압자들의 연대적 존엄성에 기초하는데, 혁명적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억압자의 편에 서서 피억압자들에 대한 박해를 정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뮈는 오늘날 혁명이 그 기원을 기억하고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한다.). 어쩌면 카뮈 본인조차 그가 맑시즘에 행했던 추상성의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뮈가 맑스와 사회주의의 언어를 비판했듯, 그가 반항을 표현하는 언어 역시 추상적이고, 어떤 면에선 미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럽의 지성사를 종횡무진 누비는 서술과 미학적 문장의 결합이 내뿜는 강렬함은 알베르 카뮈 그만의 독창성이기도 하다. ‘반항’이라는 개념에 대해선 오랜 시간 숙고가 필요하겠지만, 책 자체의 태도와 완결성은 흠잡을 구석이 없다. +알베르 카뮈나 사르트르의 글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그 태도에 있는 것 같다. 둘 모두 전후 사회의 피폐해진 모습에 대한 동일한 심려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합리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당대에 만연했던 수동적 허무주의를 완고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류의 진정한 특권은 절망이 아닌 주체성임을 강조한다. 그건 아마 이성의 함정과 전후 사회를 갉아먹는 허무주의의 늪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한 ‘지성’의 책임감을 반영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