レビュー
chan

chan

7 years ag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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バイス

映画 ・ 2018

平均 3.6

-권력을 악이라는 형태로 빚어내는 시스템. 그 시스템의 원리를 체득한 괴물- . . (스포일러) 다른 영화들과 비교해 영화<바이스>의 가장 특이한 점을 하나만 꼽자면 바로 시작과 끝 장면이 가진 함의를 유사 오프닝과 유사 엔딩(쿠키영상)을 통해 모두 두 번이나 거듭 강조하여 설파한다는 것이다. 굳이 세세하게 따지자면 <바이스>의 첫 장면은 술에 잔뜩 찌들은 과거의 딕 체니(크리스찬 베일)의 모습과 권력의 최상단에 위치한 미래의 딕 체니를 연결하는 장면이겠지만 <바이스>는 신원불명의 내레이터가 개입함으로서 비로소 시작된다.(심지어 내레이터 스스로가 특정 지점에서 “이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이스>는 (당연히도) 딕 체니에 관한 영화지만 내레이터가 이야기의 시작을 선언하는 부분은 그의 아내인 린 체니(에이미 아담스)와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내레이터에 따르면 <바이스>의 이야기는 린 체니가 본인의 모교에서 고학점을 취득하면서 시작한다고 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린 체니는 구제불능의 처지인 딕 체니에게 본인의 젠더적 한계를 토로하며 자신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 달라고 강하게 내쏜다.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왜 화자는 이 지점을 영화의 시작이라고 해석한 것일까. . 해당 지점에서 약 40~5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영화는 이전까지의 분위기와 정 반대되는 느낌을 자아내는 훈훈한 자막을 삽입하며 영화의 막을 내리는 일종의 페이크 엔딩을 선보인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여기서 중요한 건 엔딩이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이러한 페이크 엔딩에 이어 영화가 재차 시작되는 맥락이다. (페이크 엔딩은 말 그대로 ‘가짜’이며 새로운 시작을 위한 끝으로 보인다.) 영화는 부시(샘 록웰)의 전화로부터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 여기서 영화는 전화를 받는 딕 체니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해당 장면에서 보이는 건 얼굴을 제외한 체니의 상반신과 하반신이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린 체니의 얼굴을 아웃 포커싱하며 오로지 통화가 온 그 순간만을 강조한다. 50분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때 역시 영화는 달라지겠냐고 묻는 린 과 대답을 하는 체니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대답을 하는 체니의 사운드만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두 씬이 서로 병치가 되도록 만드는 오프닝 씬과 유사 오프닝 씬 사이의 연결고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욕망의 부축임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체니는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겠냐는 린의 질문에 “앞으로 달라질 게.” 라는 답 대신에 “실망시키지 않을 게.” 라는 답을 내놓는다. 린을 실망시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린은 체니 이상으로 야망이 강한 인물이다. 자녀들이 세상의 구조를 이해하기에 턱없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녀들에게 세상사는 힘과 권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가르치고 체니가 자녀들과 백악관에서 장난을 치자 단호하게 이를 막아선다. 그녀는 권력 그 자체에 매혹된 사람이다. 하지만 사회적 젠더적 한계로 인해 그녀는 본인의 욕망의 실현이 불가능하고 남편의 성공을 통해서야만 비로소 대리 충족이 가능하다. 그런 린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권력에 대한 린의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야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위의 질문에서 만약 체니가 달라질 것이라 답했다면 아마도 그것은 인격적으로 보다 나은 사람이 되리라는 의미였겠지만 오히려 체니가 택한 답은 그 반대의 것이었다. 그렇게 린의 욕망은 체니에게로 전이되었고, 극중 내레이터는 이것이 <바이스>의 시작이라 해석했다. 말하자면 이 모든 이야기를 린이 일으킨 나비효과로 봐도 무방하다는 시각이다. . 그렇게 아내의 욕망을 전달받은 딕은 쉴 새 없이 점점 타락해간다. 내면의 타락과 외적 상승이 결부되어있다는 것이 체니라는 인물의 가장 큰 아이러니이다. 점점 망가져가는 체니에게 관객의 입장에서 마음 두기가 힘들어져가고 있을 무렵에, 체니는 의외의 선택을 감행한다. 그는 본인의 앞날과 딸의 안위 사이에서, 지체 없이 딸의 안위를 선택한다. 인물이 인격적으로 가장 높이 위치한 상태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일시 중단한다. 하지만 부시의 전화로 잠재되어 있던 체니의 욕망이 다시금 자극받는 순간, <바이스>의 이야기는 재차 시작될 수밖에 없어진다. (따라서 영화의 페이크 엔딩은 순간의 웃음을 위한 장난질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바이스>의 훈훈한 페이크 엔딩에는 그때 만약 부시가 체니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의 쓸쓸함이 배어있다. 영화가 두 번째로 시작되는 지점에서 체니는 순전히 린의 욕망을 대신 실현하는 대리인이 아니다. 그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본인이 겪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본인만이 추구하는 욕망의 형태를 학습한 무서운 인물이 되어있다. 아내의 꼭두각시에서 반대로 누군가를 부려먹는 위치가 된 그는,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점점 더 파국으로 치닫고 권력의 측면에서는 점점 더 하늘로 치솟는다. . 그런데 이야기를 이렇게 나눠서 본다면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면 영화의 감독 아담 멕케이는 특정 인물들이 딕 체니에게 권력을 부축인 순간을 강조함으로서 결정적 잘못을 부시와 린의 몫으로 돌리는 것인가? 당연히도 그렇지는 않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논조를 고려하였을 시에 얼토당토않은 의문은 아니다. <바이스>는 시종 딕 체니를 조롱하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바이스>는 딕 체니를 이해하려 열심히 노력한다.(영화를 다 보고나면 결국 영화의 내레이터는 딕의 심장이 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화는, 딕 체니라는 인물에 대한 비판 이전에 딕 체니라는 괴물을 낳은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선행한다. 딕이 예일대학에서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막일을 하고 있을 때, 동료 작업자 한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체니는 다친 동료를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지만 작업 관리자는 체니를 포함한 다른 작업자들에게 다시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한다. 결국 체니는 일의 전체적인 능률을 위해서는 소수의 희생은 눈여겨 볼 틈이 없다는 것을 노동자 계급에서부터 학습한 셈이다. 후에 체니는 럼즈펠드(스티브 카렐)의 밑에 와서도 대의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소수가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되는 광경을 목도한다. 캄보디아에 폭격이 떨어져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장면을 혼자 상상할 때, 그는 윤리적 차원에서 진지하게 본인의 직업에 대해 숙고했을 것이다. 허나 시스템을 갈아엎을 독창적인 패러다임을 제시할 창의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성공을 위해선 시스템 아래 복종하는 수밖에 없고 그 역시 마찬가지의 노선을 밟는다. . 영화 <바이스>가 다루고 있는 권력부라는 시스템은 여러모로 감독의 전작인 <빅쇼트>의 시스템을 상기시킨다. 두 영화 모두에서, 극중 인물들의 성공이나 성취에는 국민들의 막심한 손해가 필요하다. 또한 두 영화의 시스템은 시스템 내에 속한 인물들의 탐욕을 자극한다. 시스템이 인물들의 욕망을 부축일 때, 그 인물들의 욕망이 시스템 외의 인물들의 실패를 가중시킬 때, 아담 멕케이는 진정 그 시스템이 부패한 것이라 말한다.(물론 영화는 시스템 내에 속한 인물들의 과실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영화 속 시스템은 소수가 흥하고 다수가 망하는 구조지만 극중 인물들은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본인들의 악행을 재차 합리화한다.) . <바이스>는 권력에 대한 욕구가 시스템 안에 들어가면 악이라는 형태로 빚어지는 메커니즘에 대해 칼을 겨눈다. 사실 21세기에 들어서 ‘권력’이라는 단어는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부정적 인상을 안겨주지만 사실 권력의 본래 뜻을 고려해보면 이를 마냥 부정적이라 보기는 힘들다. 결국 권력을 악으로 만드는 것은 권력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인물 이전에 시스템을 비판하는 영화의 방식은 상당히 합당하다. 그런데 여기서 앞서 우려한 경우가 재차 발생한다. 딕 체니는 분명 악인이다. 허나 시작부터 인물을 악인이라 낙인찍어버리면 비난의 화살이 오로지 인물에게 날아감으로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불가하다. 그렇다고 시스템의 비판을 위해 절대적 악인으로 인식되는 인물에게 선한 인상을 부여하면 인물에 대한 옹호라는 관객의 비난이 가능해진다. (영화의 소재가 소재인지라 <바이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위험한 부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양자사이의 딜레마에서 영화는 하는 수 없이 처음에는 인물을 나름대로 선한,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인물로 설정했다.(딕의 첫 모습을 술에 잔뜩 취한 만신창이 상태로 등장시킨 건 영화가 조롱에 대한 욕구를 참고 참다 그 와중에 선택한 나름의 임시방편이라 보인다.) 그렇게 시스템의 여러 문제점들을 확립한 영화는 딕 체니를 비판할 나름대로의 명분이 생겼다. 시스템이 악을 종용하는 건 사실이지만 어찌됐든 딕 체니가 그 안에서 악행을 행한 건 사실이니 시스템의 추악함이 드러난 이제부터는 딕 체니를 마음껏 조롱해도 시스템과 딕 체니에 대한 비판의 균형이 잡힐 것이고 또 시스템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다 되려 인물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응해야할 경우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애초에 중립을 지키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소재이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이스>가 나름의 중립을 지키는 방법은 딕 체니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중반부를 지나면 영화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딕 체니를 잔인할 정도로 조롱하고 조소한다. (최종적으론 삭제되긴 했지만 심지어 뮤지컬의 방식도 풍자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 영화가 점차 진행될수록, 악한 시스템과 악인의 경계는 점차 희미해진다. 체니의 심장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그 희미한 경계에 대한 단적인 예시가 된다. 그가 조금씩 타락해 나갈 때마다 일종의 불운한 징조처럼 보였던 그의 심장 통증은 마침내 문제를 일으킨다. 허나 그의 심장은 제 생명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본 영화의 내레이터의 심장을 이식받음으로서 다시금 되살아난다. 본 영화의 내레이터는 노동자 계급의 평범한 소시민이며 체니와 부시의 정책으로 인해 파병까지 다녀온, 지극히 보통의 미국시민이다. 한 국민의 죽음이 본인의 생을 연명케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순간 그의 운명은 권력부와 노동자 계급사이에 자행되는 착취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겹쳐지고 마침내 체니는 시스템의 악한 논리체계를 그대로 체득한 괴물로 거듭난다. 그리고 영화는 그 순간을 더더욱 잔인하게 끌고나가려한다. 체니가 심장을 이식받을 때, 우리가 보는 심장은 체니가 이식받는 내레이터의 심장이 아닌 부패할 대로 부패한 체니의 심장이다. 그리고 그 심장과 교차로 편집되는 것은 딸의 명예와 본인의 권력을 바꿔치기 하는 체니의 치졸한 낯짝이다. 당신이 인간이긴 한 것이냐고 일갈하는 듯한 해당 장면은 <바이스>의 가장 처연한 순간이다. 사실 그가 시스템에 점차 동화되고 있었음을 영화는 편집을 통해 초반부터 이미 보여준 바가 있다. 영화의 초반부, 장인이 장모를 살해한 것만 같은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황에서, 체니는 본인의 가족을 위해 심증만으로 장인을 거칠게 몰아낸다. 이처럼 심증만을 가지고 행동했던 것은 가정이란 환경에서는 꽤나 의로운 행동으로 남았다. 허나 유사한 태도와 행실이 권력이라는 시스템에 들어갔을 시에는 예기가 꽤나 달라진다. 체니가 장인을 몰아내는 장면에 이어 영화는 곧바로 수십년이 점프한 배경인 체니의 노인시절로 넘어간다. 해당 시점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전과 유사한 체니의 태도다. 테러에 대한 확실한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는 상황에서 체니는 건강식과 관련된 가벼운 농을 하며 본인의 심증만을 믿은 채 무시무시한 결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린다. 같은 신념을 가지고 행했던 일이 가정이라는 시스템에서 가장이라는 직책을 통해서는 정의롭게 구현되었지만 권력이라는 시스템아래 정치인이라는 직책에선 적국과의 갈등을 가속화한, 정반대의 형식으로 구현됐던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권력이라는 시스템이 체니의 개인적 성향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부추기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영화의 초반부터 보여줌으로서 인물이 시스템과 만나는 순간, 딕 체니라는 괴물의 탄생은 필연이었음을 방증했던 것이다. . 앞서 유사한 함의를 지닌 시작이 두 번 반복되었던 것처럼, 마무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된다. 영화의 엔딩에서, 영화의 제목 그대로인 vice(악) 그 자체가 되어버린 체니는 인터뷰 도중에 관객을 향해 자리를 고쳐 앉으며 궤변에 가까운 본인의 주장을 강력하게 피력한다. “당신들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 난 당신들이 앉혀준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라고 악이 교묘하게 책임을 우리 쪽으로 돌려버릴 때, 그리고 관객은 그 책임을 온전히 악인의 몫으로 떠넘기는 순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모두가 방기하는 이 상황은 섬뜩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재치 있는 쿠키영상을 유사 엔딩으로 삼음으로서 본인의 주장을 공고히 하려한다. 영화의 쿠키영상은 어딘가 이상하다. 분명 부시 시절에 여론조작을 위해 모인 구성원들 인줄로만 알았던 이들이 힐러리와 트럼프, 그리고 분노의 질주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분명 타임라인을 진지하게 따져본다면 이치에 어긋나는 장면이다. <바이스>가 타임라인을 어기면서 까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영화 속 참극이 비단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는 영화의 시의성이며 더더욱 힘주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수의 정신 나간 엘리트들이 나라를 말아먹고 있는데도 분노의 질주나 논하고 있는 대중들의 우매함이다. 차라리 트럼프에 관해 토론하며 추하게 쌈박질을 하는 노인네들이 더 낫다고 말하는 듯한 해당 장면에는 애덤 맥케이 특유의 주제의식이 엿보인다. 전작인 <빅쇼트>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집을 잃었던 것일까. <바이스>에서, 어떻게 그런 비열하고 줏대 없는 인물들이 전 세계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대부분이 금융에 관심이 없어 본인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옆집 이웃 따라 주식을 매매했고 대부분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그냥 주변의 흐름에 편승하였고 그 타락한 인물들을 그 자리에 앉혔으니까. 시종 시스템과 시스템 내부를 겨냥하던 영화가 그 시스템의 존재 자체를 가능케한 이들을 강하게 노려보는 대목이다. 비단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미국의 역사일 뿐 이라고 손쉽게 단정지으며 그 비판의 잣대에서 벗어나오기엔, 한국의 관객 또한 윤리적인 측면에서 부끄러움을 느낄만한 여지가 상당하다.(<빅쇼트>와 <바이스>는 묘하게도 한국의 역사와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 “진실은 시와 같다. 많은 사람들은 시를 혐오한다.” <빅쇼트>의 인상적인 한 대사다. 속뜻을 곱씹고 활자 뒤에 숨겨진 의미를 사유하는데 시의 진정한 의미가 있듯이, 겉치레에 현혹되지 말고 속뜻을 헤아리는 과정을 귀찮아하지 말라고 애덤 맥케이는 두 작품을 통해 간곡히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