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향기

熱帯の黙示録
平均 3.6
열대의 묵시록이란 다큐멘터리에서는 브라질을 가리켜 신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발전과 민주주의로 세워진 나라라고 표현한다. 브라질의 복음주의 이데올로기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이 나레이션은 글을 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브라질은 우리의 사회보다 더 보수적인 복음주의적 색채를 지닌 나라이다. 그들은 이 복음을 통해 군사 독재를 마쳤고 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다 말한다. 그들의 말로는 그 과정에서 여러 실수는 있지만 그들이 이 체제를 고수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을 이뤄가고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들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다스리는 신정체제를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들의 자축은 과연 기독교인의 모범일까? 또 다른 십자군의 서막일까. 복음주의 체제 기반의 사회의 공통점은 발전과 민주주의에 있다. 그들은 시멘트로 자유에 대한 열망과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덧칠했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 점차 바벨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발전과 민주주의를 하나님께서 주신 성공의 열매로 보는 것.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착오였다. 난 그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하나님을 향한 순수와 열망은 신앙인이라면 꼭 있어야 할 태도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진다는 것과 그 수가 늘어남에 따라 위로와 공감이 없는 복음주의의 폭력을 낳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점차 정치 세력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전파가 아닌 수호를 위해 민주주의의 폭력성만을 답습하고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작 복음의 소외된 자들, 소수자들을 위한 환대와 배려, 포용이 아닌 압제와 차별, 혐오를 조장하고 있다. 신앙과 신학적 차원에서도 여러 본질적인 질문들이 든다. 과연 이들이 믿는 예언과 각종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현상들이 성경에 부합한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진짜라 볼 수 있는가? 그 현상을 믿는 게 믿음이라면 그것이 구원이라 볼 수 있는가. 그들은 보이지 않는 예수를 스스로 재단하여 믿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기적이란 현상에 집중하지 않는다. 평범한 삶 가운데서 깊은 질문을 던지시는 지혜와 은혜에 집중한다. 하나님은 그 말씀들인 성경 그 자체를 전능함의 증거로 제시한다. 이 말씀의 깊이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데 우린 너무 보이는 것에 집중한다. 우리는 작은 믿음에 너무나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 문자적인 현상에만 집중하는 현상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또다른 이데올로기를 낳는다. 바로 독재다. 한편, 대체 어떤 이유로 독재를 옹호하는 것일까 생각해봤다. 이들은 정치적 메시야를 곤고히 세워. 마치 자신들이 참 선지자 집단인 것처럼 자신을 포장하고 그 대표자를 선전 도구로 세운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문자적이며 배경과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비상식적인 독해는 이렇게 종교적 우민화와 독재를 표방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는 민주주의와 엄연히 다르다. 민주주의는 그저 수단일뿐 이것을 지나치게 신성화한 것은 또 다른 선동과 날조와 다름 없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면 중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 심판과 묵시록이라는 ‘겉보기에’ 자극적인 것들에 집중한다. 자신의 폭력과 혐오를 합리화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강성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 다수를 옹립한다. 그래서 복음주의권 교회는 대형을 표방하고, 보편을 추구한다. 그들은 마지막 때를 기다리나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이 사는 이곳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돈과 시멘트로 바른 그들만의 성전. 그들은 참으로 재밌는 캐치프라이즈를 내건다. 계시록의 바벨은 기독교를 무너뜨리려는 세력들이라 말한다. 문화와 사회에서 우위를 가진 자들로 이를 해석하기도 한다. 대개는 로마와 교회의 차이를 두고 말하지만. 현대 교회는 이 차이가 없다. 기독교를 방해하는 세력을 없애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악의 세력이라 지칭하는 자들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와 소외된 자들을 위한 정책에 힘쓰는 자들이다. 그리고 가상의 적을 만들어 교인들과 노인들을 현혹시킨다. 정작 공산주의자와의 전쟁은 70년간 멈췄는데 말이다. 지금 기득권으로 서 있는 바벨은 다름 아닌 기독교인 자신들이다. 누가, 바벨일까. 그들이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다. . . . 가난을 혐오하는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세대 청년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세대 도파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세대 사랑이 없는 세대 지구를 돌보지 않는 세대 예수를 조롱하는 세대 . . . 현대 기성세대는 자신들의 욕망을 그럴싸한 시스템에 포장하여 버티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는 엄정히 돌아봐야 한다. 정치적 악용의 끝은 결국, 복음을 떠나야 한다는 기독교 혐오만 앞당길 뿐이다. 놀랍도록 전 세계의 복음주의권 나라가 같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청년들은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버려진 세대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에 기독교가 앞장선다는 것은. 그들은 기억할 것이다.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해와 지옥은 우리 스스로 만든다는 것을. 이조차 사탄의 함정이었다는 것을. 로마시대와 다르나 더 뼈 아픈 박해가 우릴 찾아올 것이다. 나태와 혼란과 폭력과 음란과 혐오와 분노와 죽음과 함께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일까? 하나의 나라일까? 이 나라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것일까? 내 거로 만들고 싶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