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65세 안나 할머니의 국토 종단기
“2천 리 길을 혼자 걷고 나서 나는 새털처럼 가벼워졌다!”
걷다 보니 살도 빠졌지만 마음의 다이어트 확실히 돼……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할머니, 인기 블로그(http://kr.blog.yahoo.com/ropa420kr) 운영자, 암벽 등반에, 무박 산행에, 온갖 산들 종주에, 네팔 트레킹을 하며 자신의 삶을 신나고 즐겁게 꾸려오던 안나 할머니. 그러나 “모든 여자의 꿈은 혼자 길 떠나는 것”이라는 말에는 가슴을 여미기만 하던 그녀가 마침내 65세의 나이에 2천리 길을 완주했다.
“남녘의 보리밭도 보고 싶고, 봄볕 따뜻한 흙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혼자 먼길 걸으며 살아온 날도 정리하고 살아갈 날도 생각해 보고 싶어” 걷기 시작했다는 할머니는 혼자 걸었던 23일 동안 자유를 만끽했다. 걷고 싶으면 걷고, 쉬고 싶으면 쉬었다. 강가에 앉아 발을 담그고 그늘 좋은 나무를 만나면 달게 낮잠 한잠 청한 뒤 다시 걸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만큼, 딱 그만큼 외로웠다. 발은 부르터 아프고, 배낭은 갈수록 무겁고, 제때에 식당을 만나지 못해 치즈 한 조각, 건빵 몇 개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 해질녘 낯선 여관방에 들어설 때는 쓸쓸함이 온 마음을 적셨다.
자유와 외로움의 맛을 진하게 본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자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대자연은 그 자체로 큰 예배당이며 사찰이 되어주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가식이 없고, 억지가 없고, 포장이 없는 자연 앞에 서니 나 역시 발가벗고 나를 마주하고 싶어진다. 지금껏 살면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잘못들, 남에게 준 상처들이 얼마나 많았으랴. 사람에게뿐 아니라 이 자연의 뭇 생명들에게는 또 어떠했을까? 자연스럽게 나를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다”라고 고백한다.
저자 황안나 씨는 남편의 연이은 사업 실패로 20여 년이 넘도록 빚의 멍에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월의 추위 속에서 연탄 한 장 없이 냉골에서 아기를 낳고, 쌀 한 톨 없어 물에 불린 메주콩을 먹어가며 지낸 때도 있었다. 교직 생활을 하며 버는 돈은 족족 빚 갚는 데에 쓸 수밖에 없었다. 돈 때문에 힘들었던 건 다 잊을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모멸감을 안겨준 사람들에 대한 미움은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았다. 해남 남창에서 강진을 지나고 영암의 월출산에 올랐을 땐 떨어진 붉은 동백을 보며 가슴의 한도 저렇게 토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후련할까 생각할 만큼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 많았다.
그러나 샘물과 꽃, 새 소리와 바람과 운무가 온전히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저절로 자연 앞에서 고백성사를 하게 된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인생이다. 아직도 누군가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원망한다면 그 시간만큼 나는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리라.”
걷는 동안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 대한 미움도 한 꺼풀 벗겨냈다.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자 그 비운 마음속에 고스란히 감사의 마음이 들어찼다. 안나 할머니는 걷고 난 뒤 몸무게도 많이 빠졌지만 무엇보다 마음의 다이어트가 된 점에 크게 감사했다.
고정 관념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 가볍게 살고 싶다
쉰 살에 운전 면허를 따겠다고 했을 때에도, 50 중반에 컴퓨터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에도, 60이 넘어 암벽 등반을 했을 때에도, 그리고 이번 국토 종단길에 오를 때에도 주변에선 다들 “그 나이에 웬……” “좀만 더 젊었어도” 이런 반응들을 보였다. 그러나 안나 할머니는 “지금이 가장 적기”라고 대답한다. “지금이 아니면, 오늘이 아니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언제 할 수 있단 말이냐”고 되묻는 할머니는 소소한 것이라도 해보고 싶은 일은 주저 없이 해본다.
바이킹을 타러 갔을 때 “아주머니는 맨 뒤에 타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오세요”라고 말하는 청년을 향해 “괜찮아요, 많이 타봤어요” 하고는 신나게 바이킹을 즐긴다. 내려와서는 “총각! 나 아줌마 아냐. 예순 다섯 된 할머니야”라고 말해 주변 사람들을 웃게 했다는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일이든 최고로 ‘맛있게’ 경험하고자 한다. 인터넷 게임에도 홀딱 빠져 끝내는 최고점에 이르게 되고, 아이젠이 없어 못 올라간다는 지리산 천왕봉도 하산을 한 뒤 아이젠을 사서 신고 다시 오르는 열정을 보인다.
이 사회는 사람들을 너무 일찍 늙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0대에 제 갈 길을 찾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30대에 뭔가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처럼, 40대엔 새로운 뭔가를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듯이 말한다. 50대에 들어서면 “내 나이에 뭘!” 이런 식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도하는 일에 두려움을 갖도록 만든다. 좌충우돌하기도 할 테지만, 거기에서 얻게 될 살아있는 지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말이다”(47쪽)
고정 관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이고, 우리를 가장 무겁게 하는 일이다. 이 나이에는 적어도 이렇게 해야 하고, 이 정도 사회적 지위면 몇 평짜리 아파트에서, 얼마짜리 자가용은 굴려야 하고, 나잇값을 하려면 이런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는 등등의 ‘생각’이 우리를 너무나 옥죄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주변 여건 때문도 아니고 스스로의 관념 때문에 신나는 경험을 포기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197쪽)
40년 가까운 교직 생활을 하느라, 그리고 빚더미 아래 허덕이느라 자유롭지 못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이제부터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하는 할머니는 “나를 얽매게 하는 게 없고, 거칠 게 없는 나이, 어딜 가서 혼자 머물러도 좋은 나이,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쳐도 좋은 나이, 아무도 경계하지 않는 나이, 그래서 더없이 편한 나이…… 내 나이가 나를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지! 나는 지금 내 나이가 참 좋다고” 말한다.
65세 안나 할머니가 우리에게 주는 아름다운 선물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마음으로 길을 나섰건만 세상은 그를 무장 해제시켰고, 더 넉넉하게 자신을 열어놓아도 좋다고 가르쳐주었다. 처음 본 황 할머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재워주고 밥을 지어 대접하고 옷을 빨아준 사람부터 공짜 밥을 준 식당 아주머니들, 먼길을 달려와 구간구간 함께 걸으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지인들, 몸이 불편해 함께 걸을 수는 없지만 지도를 펴놓고 가는 구간을 색칠해 가며 마음으로 따라와 준 친구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올려진 국토 종단 이야기를 보고 많은 이들이 격려 글을 올려주었다. 또 일상의 버거움을 탓하며 마냥 게으름을 피웠던 자신을 흔들어 깨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글도 꽤나 많이 올라왔다. 그 모든 것이 오히려 안나 할머니에겐 자신이 그들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산악회원들과 함께 떠난 줄로만 알고 있는 남편을 만나는 구룡령에서의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일을 한 거냐”며 아내를 부여잡고 우는 칠순의 남편, 그런 남편을 끌어안고 함께 우는 노부부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면 누구나 가슴 뭉클했을 것이다.
그런 남편은 국토 종단을 모두 마친 아내와 함께, 아내가 걸었던 그 길을 다시 떠나보는 6일간의 여행을 계획한다. 나이든 자신의 아내가 어떤 길을 어떻게 걷고, 자고, 먹고, 어떤 마음으로 걸었을지를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또 다리가 아파 꼼꼼하게 둘러보지 못한 명소들도 다시 차로 구경시켜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살면서 고생만 시킨 아내와 함께 떠난 6일간의 여행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것도 안나 할머니가 이번 종단 길에서 얻은 큰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