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서문 /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당신이나 나 같은 사물
미술관은 공장인가?
항의의 접합
미술의 정치: 동시대 미술과 포스트 민주주의로의 이행
미술이라는 직업: 삶의 자율성을 위한 주장들
모든 것에서의 자유: 프리랜서와 용병
실종자들: 얽힘, 중첩, 발굴이라는 불확정성의 현장
지구의 스팸: 재현에서 후퇴하기
컷! 재생산과 재조합
감사의 말
도판 목록
옮긴이의 글
해제 - 포스트 재현, 포스트 진실, 포스트인터넷: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 / 김지훈
스크린의 추방자들
ヒト・スタヤル
328p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상 작가이자 저술가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The Wretched of the Screen)> 개정판이다. 최근 전 세계 아트 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2017년 <아트리뷰>)된 그는 작업과 글, 강연을 통해 동료 작가와 큐레이터는 물론 현대 이론가들에게 줄곧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왔다. 이번 개정판은 이 책이 함의하는 두 가지 차원, 즉 동시대 미술 실천으로서 작업과 미술 담론 및 이미지 정치학을 논하는 이론서로서 차원을 더욱 엄밀히 다룬다. 후자를 위해 비디오, 영화 이론 및 미디어 연구자 김지훈의 감수와 주석을 더했으며,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를 ‘포스트 재현’, ‘포스트 진실’, ‘포스트 인터넷’이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 해제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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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訳者
レビュー
30+目次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영상 작가이자 저술가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The Wretched of the Screen)』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최근 전 세계 아트 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2017년 『아트리뷰』)된 그는 작업과 글, 강연을 통해 동료 작가와 큐레이터는 물론 현대 이론가들에게 줄곧 영감의 원천을 제공해왔다.
개정판은 이 책이 함의하는 두 가지 차원, 즉 동시대 미술 실천으로서 작업과 미술 담론 및 이미지 정치학을 논하는 이론서로서 차원을 더욱 엄밀히 다룬다. 후자를 위해 비디오, 영화 이론 및 미디어 연구자 김지훈의 감수와 주석을 더했으며, 히토 슈타이얼의 이론과 미술 프로젝트를 ‘포스트 재현’, ‘포스트 진실’, ‘포스트인터넷’이라는 세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한 해제를 실었다. 한편 한국어판 초판(2016)에 추가되었던 「면세 미술(Duty Free Art)」(2015)과 「총체적 현존재의 공포: 미술 영역에서 현전의 경제(The Terror of Total Dasein: Economies of Presence in the Art Field)」(2015)는 워크룸 프레스에서 출간할 히토 슈타이얼의 후속작 『면세 미술: 전 지구적 내전 시대의 미술(Duty Free Art: Art in the Age of Planetary Civil War)』 (가제)에 수록될 예정이다.
자유낙하하는 세상에 대처하는 법
히토 슈타이얼의 글은 우리가 생각지 못한 지점을 환기하면서 시작하곤 한다. 만약 우리가 디딘 땅이 굳건한 게 아니라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세상과 함께 자유낙하 중이라면? 첫 번째 글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부터 그는 독자를 추궁한다. 그로부터 당신이 믿고 있던 세상, 보고 있는 이미지, 향유하는 미술에 대한 의혹이 떠오른다. 근대를 가능케 했던 주요 장치로서 선형 원근법을 다룬 그의 고찰은 어느덧 21세기 들어 우리에게 익숙해진 항공 시점으로부터의 시선 역시 가짜임을, 우리에게 더 이상 단단한 토대란 없음을 밝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되묻는다. 그런데 애초에 우리에게 근본으로서 토대가 필요했던가? 자유낙하를 만끽하며 대열을 편성하고, 그 아찔한 낙하로부터 오는 현기증과 조우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대처하는 법이 아닐까?
이렇듯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현실을 전복하는 그의 언설은 유명한 글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서도 두드러진다. 해상도와 선예도(鮮銳度)로 가치를 평가받는 이미지의 위계질서 속에서 버림받은 이미지들, 즉 이리저리 복사되고, 편집되며, 끊임없이 순환하는, 그러는 와중에 흐릿해진 이미지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들은 공식적인 스크린에서 추방당해 디지털 세계의 황무지를 떠돈다. 이 이미지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그리고 모든 것을. 슈타이얼은 “해상도와 교환가치와는 별도로 우리는 속도, 강도, 확산으로 정의되는 또 다른 가치 형식”을 현시대의 이미지를 정의하는 새로운 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가난한 이미지들이 수행하는 임무를 책 전체를 관통해 보여준다. 가령 「지구의 스팸: 재현에서 후퇴하기」에 따르면, 이미지스팸은 놀랍게도 현실 세계에 대한 이중 스파이로서 우리에게 현대 사회에 만연한 감시의 눈길을 피할 피난처를 제공해준다. 진짜냐고? 사실 당신은 이미지스팸을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기에 그들이 진짜 어떤 모습인지, 왜 늘 웃고만 있는지, 우리가 보지 않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지 않은가.
동시대 미술이라는 스크린
히토 슈타이얼의 글은 또한 동시대 미술이 작동하는 방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적 공장으로서 미술관을 가리켜 그는 서슴없이 “열성껏 무급 노동하는 인턴들을 직원으로 둔, 문화 산업의 공식 대리점”이라 칭한다. 이 경제 안에서는 관람객조차 (관람이라는) 노동을 피할 수 없다. 아니 온 세상으로 확장된 미술관은 출구를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삶과의 합일이라는 예술의 오랜 숙원이, 오늘날 예술에 점령당한 삶으로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술인지 뭔지를 가끔 접할 뿐,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예술이 어떻게 삶을 점령하냐고? 아마도 다음 중에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항목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 한없는 자가 수행으로 둔갑하여 당신을 사로잡고 있는가? 아침에 깨면 자신이 일종의 복제물처럼 느껴지는가? 늘 자기를 전시하고 있는가?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앞에서 미화, 개선, 승격되거나 그렇게 되고자 한 적이 있는가? 허물어져 가는 옆 건물에 붓을 들고 다니는 애들 몇 명이 이사 온 탓에 집세가 배로 뛴 적이 있는가? 당신의 감정이 디자인된 경험이 있는가, 아니, 당신의 아이폰이 당신을 디자인한다 여겨지는가? […] 일회성 미술 전시에 시의 문화 예산 가운데 무지막지한 분량이 전용되는 도시에 살고 있는가? 착취적 은행이 지역의 개념 미술을 사유화하는가? 이 모든 사례가 예술적 점령의 징후이다.”
또한 동시대 미술은 자신의 분관을 세계 도처에 흩뿌리며 신자유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주요 도구이다. “동시대 미술은 예측을 불허하고, 설명되지 않으며, 반짝거리고, 변덕스럽고, 기분파이며, 영감과 천재들에 이끌린다. 독재를 꿈꾸는 모든 과두정권이 스스로를 그렇게 연출하고 싶을 법하게 말이다. 예술가의 역할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는 독재자를 지향하는 모든 이의 자화상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들에게 정부란 잠재적으로, 그리고 위험하게도, 예술의 한 형식이다.” “인권이 침해당하는 나라라고?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미술관을 지으면 된다!” 히토 슈타이얼의 글 곳곳에서 이렇듯 우리는 누추한 현실을 가리는 스크린으로 기능하는 동시대 미술과 맞닥뜨린다.
해동하라. 가속하라. 거주하라. 점령하라
슈타이얼의 글은 늘 현실 그 자체로 우리를 이끈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새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가 맞이한 자유로 이어지고, 그것은 “시민적 자유의 향유가 아니며, 불확정적이고 예측불허의 미래로 던져진 많은 사람들이 으레 경험하는, 자유낙하의 자유”임이 드러난다. 모든 노동이 직업으로 전환된 오늘날 “하루를 마치고 사람들은 직업 현장을 떠나 집에 가서, 이전에는 노동이라 불렸던 일들을” 수행한다.
또한 그는 동시대 미술과 현실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행동가로서 그 속에 뛰어든다. 때로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암매장지를 발굴하며 실종자들이 그들의 사체로써 남긴 증언을 어루만지고, 터키에서 처형당한 친우의 흔적을 애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그의 작업과 연동되어 현실 세계에 개입한다. 암담한 현실을 한탄하거나 그에 주눅 들지 않고, 언제나 정면으로 돌파할 (혹은 우회할) 길을 찾아내고, 행동을 촉구한다. 그의 글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선동이다. 산산조각 난 현실의 파편들을 보여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를 다시 편집하자. 재구축하라. 재배치하라. 부수라. 접합하라. 낯설게 하라. 해동하라. 가속하라. 거주하라. 점령하라.” 스크린에서 추방당한 이미지들이 기거하는 곳, 히토 슈타이얼의 글에서 우리는 그곳이야말로 우리에게 허락된 공유지이자 점령의 영토임을 알게 된다.



134340
4.0
현대예술의 흐름과 세계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잘 모르는 나에겐 구로사와 고다르 이야기만 반가울뿐 낯설었다..
상맹
5.0
매끄러운 번역은 아니더라도, 히토 쨩의 상상력과 비평의 원천을 접할 수 있어서 넘 좋은 것. 미술과 미술관에 대한 고민들도 좋고 철학적 정치적 고민들도 너무 좋다. 넘 깜찍하심 사유가. 말 그대로 스크린에서 추방되고 잘려지고 빈곤해지고 조각난 이미지들을 애도하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런 이미지로서 저항하는 방식들. 우리는 현존을 대리하면서 왔다갔다하는 스팸이다. 너무 많은 재현과 시각적 포착 속에서 재현되지 않은 것. 마침 국현에서 히토 슈타이얼 전시가 열리고 있으니 얼른 2-3트 하러 가야제. 아래는 히토 슈타이얼 전시 1트 비평. 4천원 전시에 정보량 말고 의미량이 너무 많아서 반도 못 보고 왔다. 작품도 너무 많지만 언어화를 안 하면 뭔가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로 던져주는 거리들이 너무 많다. 인상비평을 하자면 히토 슈타이얼 누님은 바르다 누님을 계승하고 디지몬 어드벤쳐 우리들의 워 게임에서 다양한 픽셀과 디지털 직접회로로 구성된 오메가몬에 탑승해서 보이지 않는 디지털 전사이자 풍자꾼 같다. 사실 주제라고 하면 명확하다. 인공지능, 알고리즘, 군사기술 등에 있어서 의심하고 재사유를 하자라는 것. 어느시대에나 있어왔던 시대적 비판의식. 하지만 그걸 그려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게임적, 스팸적, 디지털 이미지와 밈을 적극 활용한다. 즉 손쉬운 이분법 기계 부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지도 새롭거니와 거기다가 사운드도 인공보이스, 스코어들은 조잡한 힙합과 EDM이다. 패션쇼나 테마파크가 된 미술관을 비웃는 거 같기도 하고, 초기작에서 꾸준히 나오는 B급 정서의 음악과 푸티지들 보면 또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주제도 풍자에 가까워서 계속 보는 데 리듬도 좋아서 자꾸 몸도 흔들고 친숙하고 너무 귀엽고 웃겨서 아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좋은 건 남겨두고 아껴봐야지. 몇 개의 작품은 슈티글러의 ‘자동화 사회’와 맞닿아 있듯 ‘예지’에 대한 것이다. 예지를 모두 알고리즘에 맡기는 사회. 허구와 상상을 통해 미래를 예지하기 보다는 트렌딩에 욕망 아니 충동을 구성하고 자꾸 새로고침하는 우리. 자본은 우리가 욕망하지 않은 것도 소비하게 만든다. 작품 제목대로 ‘야성적 충동’. 또 하나는 발렌시아가에 대한 것. 발렌시아가의 전략은 안팎을 뒤집는 것. 못난 것과 빈곤한 것들을 사유화하는 것. 그 전략은 역시 트렌딩과 알고리즘. 계속 해쉬태그되고 리트윗되면 그 상품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 그 태깅이랑 리트윗은 발렌시아가가 아닌 우리가 노동하는 것. 그리고 소비자로의 정체성을 강조화해서 더 비싼 가치를 창출하는 것. 사실 발렌시아가에 대한 것이 아닌 것. 요새 을지로와 레트로가 싫어진 것도 빈곤의 사유화에 있는 것 같다. 을지로는 빈곤을 힙한 것으로 사유화하는 것 같다 이젠. 종로는 상대적 위치와 이미지의 빈곤함을 디그니티로 바꾸는데 말이다. 안 이쁘고 맛 없고 구린 건 구린거다. 힙한 게 아니다. 그게 멋지려면 철학과 의미와 디그니티가 있어야한다. 그게 노동이고 가치이다. 이 안팎의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에 히토 누님이 그래도 멋있는 것은 이 빈곤한 이미지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과거의 빈부의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가 밈으로, 디지털 스팸같은 이미지들로,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 모든 걸 시각화하고 포착하려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안 보여질 수 있을까. 혹은 우리는 어떻게 그 이미지들의 해상도를 높이도록 요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떻게 해상도 높은 픽셀이 될 수 있을까. 디지몬 극장판에서 같은 색의 픽셀인 디아블로몬이 무수히 증식되는 상황에서의 여러 존재들의 다중화면 픽셀들. 너무 많은 픽셀들이면 쉽게 포착되지도 않는다. 다음에 또 가서 못 본 거 마저 봐야지. 한 두 번은 더 갈듯 싶다. We are in without u Without me With out With doubt we doubt 원근법에서 낙하시선으로. 부유하고 사망한 부감시선. 에세이, 실험 영화 등 빈곤한 이미지는, 이미지의 사회 계층 안에서 어떤 가치도 지니지 못했으므로 가난하다. 빈곤한 이미지는 무명의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마찬가지로 공유된 역사를 창조한다. 이동함에 따라 동맹을 만들어내고, 번역 혹은 오역을 이끌어내며, 새로운 대중 및 논의를 창출한다. 시각적 실질을 잃음으로써 일말의 정치적인 가격을 회복하고 새로운 아우라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가난한 이미지의 유통은 지가 배르토프가 말한 ‘시각적 유대’를 만들어낸다. 사물로서의 이미지에 참여하기란 그것의 잠재적인 동인, 상상가능한 모든 목적을 위해 동원될 수 있는, 반드시 유익하지만은 않은 동인에 참여하기를 뜻한다. 그것은 활발히, 때로는 기하급수적으로 확산된다.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잔해 그 자체이다. 우리는 폐품 한 더미이다. 이미지는 멍들고 손상되었으므로 영광스럽지도 온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현실과 픽션 그 경계에서 다시 재창조되는 초기 작업 포함. 미술관이 곧 전쟁터. 분할된 시공간과 감각을 대리해서 보여주는 곳. 다분할 화면, 간헐적 감상, 다중적 시선, 산만하고 단일하지만 공통의, 불완전하지만 진행 중인, 다양한 장면과 조합으로 편집될 수 있는. 공장으로서의 미술관과 그 영화적 정치학은 이 누락된 다중의 주체를 청원한다. 이 때 그 부재와 결핍을 노출시킴으로써 이 주체를 향한 열망을 동시에 촉진시킨다.
운디네
4.0
졸전 즈음에 선생들 눈 앞에 들이밀고 싶었다. 아무렴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그들에게 낙하나 푸어함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세대가 다르다고 퉁치고 아는 얘기만 하면 그만인 것을... 수년간 나를 봐오며 턱괴고 하는 얘기들 보다 멀리서 넘어온 모르는 글이 더 적확하다.
yves
4.0
낙하란 상관적이다. 즉 낙하하면서 향하게 되는 그 무엇이 없다면 낙하를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끝없는 추락은 아프지 않단 걸 그녀도 알까요 세계의 정답을 해석할 수 없는 나는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유사인간
4.0
번역본이 이해되지 않아 재번역본을 봤지만 재번역본조차 이해되지 않아 원문을 찾게되는 매직.
여욱
4.5
히토 슈타이얼의 <스크린의 추방자들>은 이미지의 위계가 자본주의의 위계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선연히 고발한다. 그녀가 말하는 ‘빈곤한 이미지’란 단순히 저화질, 열화된 시각물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해상도의 자격이 부여되지 못한 이미지, 권력을 부재한 자리에서 증식하는 불청객의 시각 언어다. 고해상도는 위신이고, 저해상도는 생존이다. 이는 문화적 계급사회 속 시청각 자본의 배분 구조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극장에서 상영되지 않는다. 대신 불법 스트리밍의 픽셀화된 잔상 속에서, 파일 공유 사이트의 데이터 덩어리 속에서, 뒤틀리고 느려진 채로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잔존의 미학’이야말로 슈타이얼이 주목한 스크린의 추방자들의 정치적 본질이다. 슈타이얼은 중심으로부터 추방된 이 이미지들을 단지 불쌍한 유령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복제와 이동, 공유를 통해 권위적 시선을 붕괴시키는 민주적 주체로 작동한다. 빈곤한 이미지는 기꺼이 열화되고, 잘못 압축되며, 초점에서 이탈한다. 이 이미지들은 ‘선명하지 않음’을 통해 오히려 권력의 해상도를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기억의 공동체를 생성한다. <스크린의 추방자들>은 우리 시대 이미지 정치학의 좌표를 정밀하게 재조정한다. 중요한 건 화면에 무엇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이미지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보급되고, 누구의 손을 거쳐 열화되었는가다. 빈곤한 이미지는 비난받을 저해상도가 아니라, 저항과 연대의 저해상도다. 그것은 일종의 시각적 프롤레타리아, 혹은 계급을 의식하는 픽셀이며, 거대 미디어 체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잔조의 정치다.
누리
5.0
20260118 스크린의 추방자들이 정말 히토쨩의 생각처럼 스스로 거부, 후퇴하는 것이며 결국 스팸처럼 돌아와 시스템을 점령하고 전복시킬 수 있을까? 항상 이런 종류의 주장은 미심쩍지만… 몰라! 그냥 눈 딱 감고 낙하하기!
Ellis K
4.0
"만약 라이프니츠의 전지전능한 남성 관찰자가 불능이라고 한다면, 정의의 여신은 해상도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가락을 우툴두툴하고 반짝거리는 이미지, 분할 공간에 남겨진 저해상도 모나드 위로 가져가 그 가장자리, 격차, 틈을 쓰다듬을 것이다. 그 지질학적 윤곽을 파악하고, 그 상처를 감지하고, 불가능은 가능하며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 굳게 믿을 것이다."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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