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은 개인의 역사이자 도시의 기억이다
“그 골목에 삶을 두고 왔다”
도시는 사람의 몸과 똑같다. 큰길이 굵은 핏줄이라고 보면 큰길 뒤로 뻗어 있는 길들은 가는 핏줄이다. 큰길 뒤로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그 길이 골목이다. 도시에는 무수한 골목이 있다. 사람의 몸처럼 모세혈관 역할을 하는 골목이 잘 살아 있고 건강해야 도시도 생기 있게 살아난다. 골목은 도시의 맨얼굴이며 도시의 정체성이며 삶의 여유를 주는 공간이다. 골목에는 달팽이 속도처럼 느리기 그지없는 시간이 시루떡처럼 쌓여 있고, 무수한 집과 흉터 같은 삶의 웅숭깊은 사연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골목은 장소와 장소 사이의 틈이며, 하나의 장소다. 장소의 속성은 머무름을 전제하지만, 골목은 흘러가는 길이면서, 또한 머무는 장소다. 큰길에서 꺾어 들어가면 만나는 그 골목은 집으로 이어지는 그냥 경로가 아닌, 소통이 이루어지고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그래서 그곳엔 시간이 담기고 사람 이야기가 담긴다. 골목은 모든 사람의 삶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배경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골목에서 나고 그곳에서 자라며 그곳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골목은 우리의 기억이며 추억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과거이기도 하다. 그 골목에는 굽이진 인생길처럼 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어떤 신산함이 아로새겨져 있다.
도시화가 강력하게 진행되며 효율성과 개발 이익을 위해 골목은 허물어지게 되었고, 이제는 다소 희소하고 과거 회귀적인 정서의 배경으로 남게 되었다. 사람들이 골목을 찾아가서 즐기기는 하지만, 그곳에는 생활은 없다. 생활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없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결국 우리는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오랜 풍상을 겪으며 생긴 얼굴의 주름살과도 같은 골목을 없애버렸다. 그래서 작고 사소한 개인의 역사와 도시의 기억도 함께 묻혔고 증발되어버렸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간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덮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그 아름다움은 시간이라는 포장이 덮이며 다양한 연상과 감흥을 불러온다. 사람이나 도시는 시간이 담기고 기억이 담겨 품위와 개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건물은 없어져도 복원이 가능하지만, 골목길은 없어지면 복원이 어렵다. 그 골목길이 없어지면 도시의 정체성은 점점 없어진다. 우리는 기회가 되면 미련 없이 동네들을 깔아뭉개고 기억을 지워버리고 치부를 감추어버린다. 또 실개천들을 오염시켰고, 냄새난다고 피했으며, 길을 넓힌다고 아예 시멘트로 덮어버린다. 우리의 정체성과 자존심도 그때 같이 묻혀버렸다. 그렇게 도시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속도가 인간을 지배하고 편리가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이다. 아직도 골목을 없애고 넓은 길로 만드는 것이 도시의 발전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은 어느 좁고 구불거리는 골목으로 들어가 걸어보고 과연 재개발이 합당한지 살펴볼 일이다.
『골목 인문학』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 부부가 태어나서 자라 가장 익숙한 서울의 골목, 여행으로 혹은 일로 다녀온 우리나라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골목, 그리 많이 다니지는 않았지만 좋아하는 몇몇 나라의 숨겨진 골목 등을 통해 골목의 풍경과 역사를 그려낸다. 그 풍경과 역사에는 사람 이야기가 있고, 동네 이야기가 있고, 도시 이야기가 있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사람 이야기이며 사람의 자취라고 보면, 골목이야말로 사람의 자취와 사람 이야기가 듬뿍 담겨 있는 나이테와 같은 장소다.
골목에는 삶이 켜켜이 쌓여 있다
종로나 을지로의 골목을 걷다 보면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건축가이기도 했던 이상이 떠오른다. 그는 백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 통인동 154번지에서 자랐다. 이상은 신명학교와 보성학교와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하고 나중에 금홍이라는 여인과 종로 1가로 추정되는 곳에서 제비다방을 경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태어난 사직동은 길이 되어버렸고, 통인동 집은 여러 필지로 나뉘었고, 신명학교는 배화여자고등학교와 합쳐졌다. 보성학교 터는 조계사가 되어버렸고, 제비다방과 수하동 아파트 등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심지어 그가 근무했던 조선총독부 건물도 철거되었다. 이상의 복잡한 내면을 보는 듯한 골목들은 YMCA 부근에 잔설처럼 아주 조금 남아, 숨어 지내는 패잔병처럼 몸을 숨기고 있다.
목포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던 바닷가 작은 어촌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이자 일본으로 여러 가지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한 항구로 목포를 개발했다. 그런데 그전부터 목포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 목포항에 붙어 있는 언덕에 집들이 바닷가 바위에 자리 잡은 여러 가지 패각류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 동네는 온금동이라고 불리지만 원래 이름은 ‘다순구미’다. 다순구미는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이다. 아기자기하며 아름답고, 굽이진 인생길처럼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언덕을 따라 굽이굽이 길들이 이어져 있다. 좁기도 하고 다소 넓기도 하고 가파르기도 하다가 완만하기도 한 아주 다양한 표정을 지닌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속초 청호동 도로변에는 낮은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오래된 마을이라지만 별다른 정취라든가 연륜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작은 마을 읍내의 풍경처럼 조악한 간판과 가게가 즐비하다.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중간중간 보이는 좁은 골목들이 나타나고 그 사이로 작은 집들이 빼곡하게 달려 있다. 한눈에도 그곳에서는 삶의 어떤 신산함이 느껴진다. 함경도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겪었을 힘든 삶의 여정이 이곳 아바이마을에 담겨 있다. 수시로 들이닥치는 해일로 집을 땅에 반쯤 묻은 채 살아야 했고, 두고 온 집과 가족을 시시때때로 그리워해야 했다. 불시에 떠나온 고향이 바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런 그리움은 더했을 것이다. 아바이마을에는 그런 쓸쓸한 기억과 오래된 이야기가 세찬 바닷바람 사이로 끊임없이 떠돌고 있다.
부산역 바로 건너편에 있는 원도심에 해당되는 초량동은 6·25전쟁 이전부터 원주민이 많이 살았던 오래된 곳이다. 부산역 광장의 떠들썩하고 복잡한 풍경과는 조금 다른, 부산의 생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중에서 산복도로는 내륙에서 달려나온 산맥의 힘줄들이 뻗어가다 해안에 이르러 급하게 멈춘 듯, 가파르게 바다를 향해 떨어져내리는 부산의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도로다. 이곳에 서면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부산이나 목포 같은 개항기 항구도시는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기 위해 찾아든 노동자들이 기존의 주거지보다 점점 위쪽으로 숨 가쁘게 올라가 산동네에 정착했다. 경사지에 틈새도 없이 빼곡하게 채워진 집들은 6·25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인구를 도시 인프라가 미처 감당하지 못한 결과다. 그곳에는 시간이 잠시 느려지고 흘러내릴 듯 겹겹이 쌓인 흉터 같은 삶의 흔적들이 흐르고 있다.
골목에는 세상의 모든 풍경이 있다
서울 종로세무서 뒤편에 있는 익선동은 다른 골목처럼 오랜 시간 지속된 곳인데, 익선동 166번지는 한옥이 가지런히 모여 있는 블록이다. 1930년대에 급속한 인구 유입으로 가중되던 경성의 주택난을 타개하기 위해 북촌에 한옥을 개발할 때 같이 지어낸 곳이다. 지금 북촌의 한옥은 10여 년 전부터 고쳐지고 정리되어 아주 비싼 몸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익선동은 그 사이 블록으로 묶어 개발하려던 계획이 중단되어 땅값만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채 잊혀서 여전히 퇴락해 서걱거리는 서민의 동네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익선동에 젊은이들이 몰리고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곳 역시 사람은 자꾸 밀리고 커피나 피자, 여유와 낭만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추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그렇게 골목의 색깔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성북동에는 두 얼굴이 있다. 서울 성곽에 붙은 언덕에 펼쳐진 오래된 골목을 가진 북정마을 등의 소박한 마을과 건너편 언덕 위에 1960년대 삼청터널이 개통되며 진행된 택지 개발로 이루어진 큰길에 면한 저택들이 공존한다. 만해 한용운, 조지훈, 김기창, 김환기 등의 문인과 화가 등이 살며 활동했던 흔적이 아직도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