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소설의 새 장을 연 도스토옙스키 최후의 걸작
인간의 정념 이성 신앙을 아우르는 거대한 앎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_무라카미 하루키
근대소설의 새 장을 연 위대한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 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애초 구상한 두 편의 소설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완성된 미완의 작품이자, 그가 평생을 숙고해온 종교적·철학적 성찰과 작가적 역량이 집대성된 최후의 걸작으로 꼽힌다. 친부 살해를 다룬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각각 정념, 이성, 신앙을 대변하는 세 형제의 행동과 의식을 통해 자유, 믿음, 사랑, 악, 인류애와 구원의 문제를 그렸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소개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김희숙 교수가 맡아 심혈을 기울여 번역하고 정연한 해설을 더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라는 새로운 세계
그가 남긴 최후의 걸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빈민병원에서 근무하던 의사 미하일 안드레예비치 도스토옙스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세기 초엽에 태어난 동시대 작가들인 이반 투르게네프나 레프 톨스토이가 귀족 출신인 데 반해 도스토옙스키는 잡계급 출신으로, 이러한 출발점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0대 시절 부모를 모두 여의는데, 어머니는 폐병으로 사망하고 아버지는 농노들에게 살해당했다. 1846년 중편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이름을 얻기 시작하나 1849년 사상 죄목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 직전 감형되어 시베리아에서 수형 생활을 했다. 이때 수차례 심각한 뇌전증 발작을 겪었다. 30대의 대부분을 유형지에서 보내고 10년 만에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형과 함께 잡지를 창간하며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인다. 사회변혁을 계속 꿈꾸며 이를 실현할 방법을 문학으로 구현해보려는 시도는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시작으로 첫 장편소설인 『죄와 벌』에서 심화되어 작가가 1881년 타계해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이 최후의 걸작은 문학사적으로도 러시아 문학을 세계문학 속에 우뚝 세운 19세기 러시아 장편소설의 위대한 시대를 장엄하게 끝맺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20세기를 지나며 도스토옙스키의 영향력은 더욱 확장되어, 그의 작품들 중 특히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삶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이 다 들어 있는(커트 보니것)” “종합 소설(무라카미 하루키)”로서 후대 작가들에게 “북극성” 같은 지침이 되었고, 그의 사상적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중이라 할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의 표현대로 “도스토옙스키의 영향력이 절정에 도달하려면 아직 까마득하다. 그가 이룩한 대변혁은 아직 완전히 우리 것이 되지 못했으며 완전하게 인식되지도 못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아직 도스토옙스키가 되지 않았다.”
너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하라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을 한 알의 밀알되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친부 살해를 다룬 범죄소설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에게 버림받고 어머니도 없이 성장한 세 형제,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가 집으로 돌아온다. 이들은 음탕하고 탐욕스러운 아버지를 동정하거나 혐오하며, 특히 드미트리와 이반은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그의 죽음을 바란다. 그러던 중 표도르가 살해되자, 혐의는 유산 문제에 더해 연적 관계로 갈등을 빚던 장남 드미트리에게 쏠린다. 도스토옙스키는 한 집안에서 발생한 친부 살해라는 사건을 카라마조프의 피(‘벌’을 뜻하는 ‘카라кара’와 ‘더럽히다’를 뜻하는 ‘마자치мазать’)를 나눈 세 형제의 행동과 의식을 통해 이념적 차원과 결부해 갱생과 구원이라는 필생의 주제로 이끈다.
이 작품의 서문에 따르면, 작가는 애초에 셋째인 알렉세이 표도로비치 카라마조프, 즉 알료샤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전기적 이야기를 구상했는데 “전기는 하나인데 소설은 둘”이 되었다. 주된 소설은 두번째 것이나 주인공의 청년 시절 초기 한순간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 필요성으로 먼저 완성된 이야기가 본 소설인데, 작가의 남은 계획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완성된 미완의 작품이 되었다. 또한 작가의 의도와 달리 흔히들 이반을 중심으로 이 작품을 읽곤 하는데, 주요하게는 독립된 장으로서도 그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 세 개의 장, 즉 이성을 대변하는 이반의 주장이 펼쳐지는 「반역」 「대심문관」(1권) 및 「악마. 이반 표도로비치의 악몽」(3권) 전반에 작가 자신이 직접 경험한 불신과 회의의 상흔이 짙게 투영되어 있으며 작가가 다루고자 하는 사상적 논의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은 악을 저지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저지하고자 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반의 답은 지금 이 지상에서의 복수와 정의의 실현이다. 그렇기에 친부 살해란 곧 자기 자식을 버린 아버지, 즉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악과 고통 속에 방치한 창조주-신을 향한 복수가 된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반의 서구식 합리주의와 무신론 그리고 유클리드적 이성에 맞서 알료샤와 그의 정신적 아버지인 조시마 장로를 함께 세운다. 조시마 장로의 답은 사랑이다. 추상적인 이념이 아닌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 ‘양파 한 뿌리’를 이웃에게 건네는 행위이다.
“에필로그에서 알료샤는 열두 소년을 모아 ‘새로운 인간들’로서 그들을 준비한다. 세 형제 중 알료샤는 가장 먼저 ‘새로워짐’에 도달했다. 조시마 장로가 죽은 뒤 그가 겪은 충돌과 대립, 혼돈과 충격은 새로운 정신의 ‘발아’를 방해하는 세상의 마지막 껍질을 인식하게 했고, 세상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세상의 본질을 통찰하게 해주었다. 그는 이 과정을 거쳐 세상의 의심스러운 여러 가치와 작별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이제 그에게 생겨나는 사랑은 덧없는 감정이나 순간적인 경험이 아니라, 평생토록 변치 않을 완성된 갱신의 증거다. 이렇게 준비를 갖추고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따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밀알이 될 수 있다.”_역자 해설 중에서
결국 제사로 쓴 「요한복음」 12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로부터 열두 소년의 환호성, “영원히 이렇게, 평생토록 손에 손을 잡고! 카라마조프 만세!”에 이르기까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 작가가 전하는 의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다. 너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하라.
노벨연구소 선정 ‘100대 세계문학’
가디언 선정 ‘세계 100대 도서’
BBC 선정 ‘지난 천 년간 최고의 작가 10’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フョードル・ドストエフスキー · 小説
576p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7, 158, 159권. 근대소설의 새 장을 연 위대한 작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마지막 작품이 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애초 구상한 두 편의 소설 중 첫번째에 해당하는 완성된 미완의 작품이자, 그가 평생을 숙고해온 종교적.철학적 성찰과 작가적 역량이 집대성된 최후의 걸작으로 꼽힌다. 친부 살해를 다룬 범죄소설의 틀을 빌려 각각 정념, 이성, 신앙을 대변하는 세 형제의 행동과 의식을 통해 자유, 믿음, 사랑, 악, 인류애와 구원의 문제를 그렸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소개되는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김희숙 교수가 맡아 심혈을 기울여 번역하고 정연한 해설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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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인
4.5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작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필자는 이 책으로 도스토예프스키를 처음 접했는데, 첫인상은 '난해하다' 였다. 한 인물의 독백과 말이 50페이지 정도에 걸쳐있어 쉽게 지루함을 유발하고, 문체 또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사실을 비비꼬아서 전달한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본래 예술이라는 것이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색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걸 생각해봤을때,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의 그런 난해한 문체는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필자는 이러한 문체에 묘한 매력을 느껴 정신없이 이 책을 탐닉(?)하기도 했다. 아쉬운 점을 꼽자면 페이지 수 대비 이야기의 진전이 크지 않아 읽고나서 느껴지는 포만감이 크지 않다는 것과, 본 작품이 프롤로그에서 끝나버려 향후 등장인물들의 행보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1,400페이지의 책을 읽은 게 어디가서 자랑할만한 거리는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은 좋다. 여러모로 진입장벽이 높아 추천드리기에 곤란한 책인데, 도전하고 싶으신 분들은 앞부분 등장인물 소개를 읽어보고 생각하거나, 혹은 그 유명한 '대심문관' 파트만이라도 읽어보는 걸 권해드리고 싶다.
홍준영
5.0
두 심연 사이에서. . 천안에서 아홉 살 짜리 아이가 여행가방에 갇힌 채 죽었어. 게임기가 고장난 걸 본 계모가 큰 가방에 가뒀다가, 아이가 소변을 보자 더 작은 가방에 7시간 동안 가뒀대. 숨이 안 쉬어진다고 아이가 꺽꺽대자 계모는 그 위에 올라타 조용히 하라고 짓눌렀다는군. 경찰이 차갑게 식은 아이의 몸을 꺼냈을 때 두피는 온통 찢어져 있었고 팔에는 담뱃자국이 가득했어. 그러는 동안 창녕에서는 친어머니가 아홉 살 딸의 손가락을 프라이팬으로 지지고 있었어. 그녀는 집안일을 시킬 때가 아니면 자식을 벽에 쇠사슬로 묶어놓았고, 실수가 있을 때면 달군 젓가락이나 글루건으로 발바닥을 쑤셨대. 알료샤, 나는 지금 논의를 간략히 하기 위해 죄없는 이들의 고통 중 극히 일부, 아이들의 고통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선임들에게 구타당하며 화장실 바닥을 핥다 자살한 병사, 강제로 음란한 영상을 찍다가 결국 유린당하고 만 여자, 보험금을 노린 아들에게 살해된 늙은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직 입도 못 열었어. 알료샤, 나도 창녕의 어머니와 딸이 화해하고 부둥켜 우는 걸 보고 싶다. 네가 믿는 신이 천안의 아이를 부활시켰을 때, 계모는 용서를 빌고 의붓아들은 그녀를 쓰다듬는 광경을 보고 싶어. 그렇지만 여행가방 속에서 육백삼십 분 동안 아이가 흘린 눈물은 어떻게 되는 거냐! 그 고통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쇠사슬에 묶인 꼬마가 '하나님, 살려주세요'라고 외친 순간은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결국 (오늘날 한국에서) 이반이 던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작성된 두 복음서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작품에서 대칭을 이루는 '분신'을 자주 활용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마지막 역작에서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던 복음서의 분신을 빚어내는 데 기어코 성공한다. 절대자의 존재에 기반해 사랑과 용서의 율법을 노래하는 복음서에 대항하여 무신론에 기반해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주권을 노래하는 '안티복음서'가 탄생한 것이다.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가 복음서의 대변자라면,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그의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는 안티복음서의 대변자라 부를 법하다. 드미트리, 이반, 카체리나, 그루셴카, 리자, 콜랴 등 나머지 인물들은 두 복음서(검사의 표현을 빌리면 '두 심연') 사이에서 방황하고 번뇌한다. 그러나 중간에서 방황하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가 범죄소설이든, 연애소설이든, 청춘소설이든, 그들의 마음에서 진정 공명하며 선택의 기준이 되는 질문은 결국 한 개로 수렴한다. 정직한 하인 그리고리가 즐겨 읽는 성경 '욥기' 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 처음으로 동생에게 마음을 연 이반 카라마조프가 들려주는 서사시 '대심문관'의 기초를 이루는 질문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은 왜 일어나는가? 죄없는 이들에게는 왜 고통이 발생하는가? 다시 말해, 대체 아이들은 왜 고통받는가? . 안티복음서의 해답은 간단하다. 선의 기준인 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결론에서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한없는 자유의 빛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나는 끝까지 이 추잡함 속에 허덕이며 살고 싶거든, (중략) 다만 다들 몰래 그 짓을 하지만 나는 탁 터놓고 한다는 말이지. 내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건만 이런 나를 온갖 추잡한 놈들이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니까." 그는 양심, 도덕, 규범 등이 모두 공허한 허상에 불과함을 간파한다. "일단 인류가 하나같이 다 신을 거부한다면 (중략) 무엇보다도 이전의 모든 도덕률이 저절로 붕괴될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것이 도래할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취하기 위해 한데 뭉치겠지만, 이는 기필코 오로지 이 세계에서의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일 따름이다." 그는 이반의 선언처럼 돌아오지 않는 오늘의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여자들을 유혹하고 재물과 쾌락을 탐닉한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온전히 실현하려는 표도르의 이러한 사투는 신성하고 진정 거룩한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나'뿐이고, 나의 삶을 방해하려는 모든 외부의 잣대, 종교적 교리, 신이라는 개념은 무익할 뿐 아니라 사악한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는 '모든 것은 허용된다'라는 하나의 테제는 이렇게 표도르에 의해 밝혀진다. . 그러나 복음서의 주인공은 테제를 밝히는 선지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안티복음서의 적그리스도는 스메르쟈코프라고 할 만하다. 남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었던 백치(또는 성녀)가 마구간이 아닌 목욕탕에서 홀로 낳은 이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논한다. "주 하느님이 빛을 창조한 건 첫째 날이고 태양과 달과 별은 넷째 날에 창조했다면서요. 그럼, 첫째 날엔 어디서 빛이 비쳤던 거죠?" 성전에서 강론한 예수를 마주한 학자들처럼 그리고리는 이 반역적 질문 앞에서 말문을 잃는다. 성부는 아들을 희생해 구원이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복음)을 선포하나, 두 무신론자만이 집에 남은 어느 밤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의 두개골을 부수면서 모든 것이, 심지어 친부 살해까지도 가능하다는 기쁜 소식을 만천하에 알린다. 무신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처럼 보이던 이반은 이 충격적 과업 앞에 무너지고 만다. "그때만 해도 도련님은 줄곧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말씀하시더니, 이제 와선 왜 그렇게 불안에 떨고 계신 거죠?" 베드로처럼 세 번 찾아와 자신을 살인자라고 정죄하며 의심하는 이반에게 스메르쟈코프는 도리어 연민을 보낸다. 살인이 뭐가 어때서. 고작 '살인자'라는 칭호 앞에 두려워하다니. 안티복음서의 신앙으로 무장한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의 사역을 장엄한 자살로 마무리한다. 예수는 목숨과 영혼을 신에게 맡겼으나, 인간은 목숨과 영혼마저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는 선언인 셈이다. . 반면 조시마 장로가 표도르와 스메르쟈코프에게 대항하기 위해 꺼내드는 테제는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이다. 이 테제가 도출되는 과정 역시 직관적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유한한 나의 1인칭 시점은 곧바로 무의미해진다. 영원 앞의 시간, 불멸 앞의 필멸, 보편 앞의 주관은 0과 다름없는 만큼 신을 받아들인 인간은 티끌만도 못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는 신이 제공한 하루, 신이 제공한 타인, 신이 제공한 버찌 잼과 밀짚모자 위의 리본에 무한히 감사하며 신의 명령을 실천해 세계를 사랑하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 절대성을 인정하는 인간이라면 그러한 사랑은 자발적일 수밖에 없다. 신의 시점으로 삶을 응시하는 사람은 타인, 곧 신과 그의 세계를 향한 사랑에서 본질적 행복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기에 전적으로 행복한 자는 자기 자신에게 곧장 ‘나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서약을 이행했노라.’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조시마는 매일 자신이 감사하고 사랑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한다. 그는 자신이 진공 속에서 명멸하는 먼지가 아니라 삶의 의미로 충만한 먼지라는 사실에 감격한다. " ‘즐거워하자꾸나.’ 여윈 노인이 계속했다. ‘새 포도주를, 새롭고 위대한 기쁨의 포도주를 마시자꾸나.’ " 그에게 삶은 신의 무한한 은총 속에서 출렁이는 포도주와 같다. . 알료샤는 조시마 장로의 신앙을 체화한 뒤 그의 유언대로 속세로 나아가 카라마조프 가와 민중들에게 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과 인류를 향한 동포애를 가슴에 품은 채 러시아의 대지와 만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안티복음을 떨치고 진리와 불멸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두 복음서가 충돌하는 지점마다 알료샤는 조시마의 복음에 무게를 더하면서 소설의 균형을 가다듬는다. 그러한 그가 가장 열성을 기울여 '신의 심연'으로 이끄려 하는 인물은 작품의 주인공 드미트리다. 그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이반의 논리에 설득당하다가도,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라는 조시마의 호소에도 흔들린다. 두 심연 사이를 헤매던 그는 카체리나를 배반하겠다는 생각의 죄,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혀의 죄, 2등 대위를 구타하는 손의 죄를 저지르며 거듭 실족하고 넘어진다. 두 복음서는 그의 내면에서 가장 치열하게 대결하고, 작가는 우선 법정의 입을 빌어 그의 삶과 죄 모두에 유죄를 선고한 뒤 드미트리를 스메르쟈코프가 자살하기 전 머물렀던 병실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에게는 회의주의자 이반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두 여인이 찾아와 구원의 햇살을 비춘다. 드미트리가 유형을 받아들이고 속죄에 나설지, 유형에서 탈출하지만 법이 심판하지 못하는 자신의 죄를 참회할지, 죄와 벌 모두를 부정할지 말해주지 않은 채 소설은 그렇게 끝이 난다. . 그렇다면 '왜 죄없는 자들이 고통받는가?'에 대한 복음서의 대답은 무엇인가? 첫째 해답은 티끌만도 못한 인간 그 누구에게도 죄있음과 죄없음을 감히 판단할 능력도 권한도 없다는 해답이다. 그러나 이 답변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꼈는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에필로그에 조그맣고 따스한 보충의견을 첨부한다. 신은 있습니다. 어떻게 신이 있는 세상에서 계모가 의붓아들을 죽일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답변이 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더 이상 가엾게 죽어가는 이들이 없도록 온 힘을 다해 인내하고 화평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죽은 일류샤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을 다독여 다시 삶으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신이 계시고 우리는 그의 세계 속에서 살고 사랑해야 하는 의무와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스메르쟈코프는 쾌감을 위해, 자신의 정의를 위해,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아이를 여행가방에 가둔다. 표도르는 한발치 물러나 킬킬대며 "좋은 일입니다. 모든 게 좋은 일입니다."라고 읊조린다. 이반은 쓰러진 아이 앞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신에게 소리친다. 그러나 알료샤는 아이의 무덤 앞에서 그를 사랑했던 이들을 위로한다. 삶은 좋은 것이라고, 죽음 이후에 우리는 부활한 그를 다시 만나볼 것이라고. 그러는 동안 신은 침묵하거나, 없다. . "알료샤, 신은 있느냐?" 서사를 지배하는 표도르의 이 냉소적인 질문에 모두가 답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작가는 다채로운 인물 군상들을 내려다보던 독자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진다. 독자가 신을 믿는다면, 왜 지금, 여기에서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처럼 살고 있지 않는 것인가? 진정 불멸을 믿는다면 왜 독자는 지상에서의 작은 일에 넘어지고 실족하며 죄를 짓는 것인가? 신과 불멸에 대한 그의 믿음이 온전한데도 왜 그는 "'모든 것' 대신 달랑 2루블만 내고, ‘나를 따르라’ 대신에 그냥 미사만 보러" 다니는가? 반면 독자가 신을 믿지 않는다면, 왜 지금, 여기에서 스메르쟈코프와 표도르처럼 살지 않는 것인가? 왜 더 풍요롭고 행복한 순간들을 위해 남의 불행을 감수하지 않는가? 왜 양심이나 도덕이라는 우상에 매여 스메르쟈코프와 표도르의 자유로운 삶을 악하다고 비난하는가? 그는 왜 이반처럼 '살인자'나 '아동학대자'라는 타이틀 앞에서 무력해지고 괴로워하는가? 작중 모든 인물들이 '신은 있느냐?' '왜 아이들은 고통받는가?'라는 명시적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동안, 숨겨진 이 세 번째 수수께끼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두 복음서 중 어떤 진리를 고르던, 작가는 스스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믿음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 머리가 쪼개져라 치열하게 고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그 두 심연 사이에서 어느 방향으로 믿음의 도약을 내딛을지 선택하라고 외치는 작품이다. . +서사시 '대심문관', 가나의 포도주 잔치 환상, 이반과 악마의 조우, 최후의 법정 공방 등 그 자체로 한 편의 작품이 될 법한 명장면들로 가득하다. 적어도 한 장면은 한 호흡에 읽어야 온전히 그 감동이 전달되는 듯하다. +세 권으로 나눠진 민음사 판본으로 읽었다. 번역도 좋고 오탈자도 없다. 첫 페이지에 인물들의 풀네임과 별명들이 정리되어 있는데, 참고하면서 1권을 다 읽고 나면 2권부터는 이름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다.
Sun-Jae Eric Park
5.0
이토록 극단적인 인간의 다면성 결코 규정 지을 수 없는 인간 그 영원한 수수께끼
반이야
4.0
[민음사 책 읽음. 김연경 옮김] 다 읽다니 새해에 참 잘한 일이다 고귀함과 저열함이 한 영혼에 들어있고, 거기에 양심이란 게 장착되어 있으면 이 사단이 난다. 그런데 이런게 인간이라는 거다 라는 아주 길고 지극한 이야기
김아람
5.0
"살고 싶어, 난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 끈적한 이파리들이 내게는 소중하고, 푸른 하늘도 소중하고, 가끔씩은 별 다른 이유도 없이 정이 가는 어떤 사람들도 소중하고, 오래전부터 더이상 신뢰를 상실해버렸지만 그럼에도 오래 묵은 기억 때문에 마음으론 존중하고 있는 인류의 어떤 위업도 소중해."
파니핑크
4.0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정수는 '대심문관' 에 있지 않을까 싶다.
김태욱
4.0
사람이 너무 많다
구본철
5.0
작년 교양시간에 들은 철학 수업이 생각난다. 첫 시간에 교수님은 칠판에 신, 인간, 동물 세 글자를 적으셨다. “우리 인간은 신(물론 기독교의 신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고 뒤에 덧붙이셨다.)을 갈망하는 존재지만 동물적 한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신과 가깝게 보느냐 동물과 가깝게 보느냐가 철학의 주요 물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식으로 하자면, 신, 카라마조프, 동물이다. 거의 동물(악)에 가까운 표도르, 드미트리, 이반과 대조되는 알렉세이. 그 외에도 신에 가까운 인간들은 조지마 장로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신과 동물 사이에서 방황하고 번민하는 존재가 다름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러시아소설이라는 특수성에 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표도르 카라마조프와 그 아들들은 러시아의 각 특징들을 의인화한 것으로, 알렉세이의 그 신심함은 러시아 정교회, 이반의 냉소는 자유주의와 유물론,무신론의 물결, 드미트리의 방탕은 현재에 충실함과 그에 수반하는 허무주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성취하고, 수많은 인물들의 개별묘사를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을 탐구한 이 희대의 걸작은 인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생각이 늘어서 몇구절 추가 커트 보네것은 이 소설을 두고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과연 그렇다. 신앙과 무신론(알렉세이와 이반), 희망과 절망(결말과 드미트리), 이 소설은 연애소설이기도, 범죄소설, 추리소설이기도, 종교소설이기도, 놀랍게도 단편소설이기도하다(대심문관). 도스토예프스키는 일찍 죽은 막내아들을 생각하며 알렉세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한다. 죽은 막내아들을 사랑으로 가득찬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알렉세이로 되살린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기쁨, 그 슬픔. 진심이 들어간 창작물만이 걸작이 될 수 있다는 걸 다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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