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언어 안에서도 번역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영화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번역가이자
‘세상’을 번역하는 황석희 번역가가 바라본
일상에서 일어나는 오역, 오해, 그 말에 대하여…
영화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보헤미안 랩소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는 공통점이 있다. 정답으로 ‘메가 히트작’을 떠올렸다면 그것도 맞다. 하지만 다른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이 영화들의 한국어 자막이 모두 같은 번역가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것이다. 예상했겠지만 바로 황석희 번역가다. 대중에게 친근하게 와 닿는 재기발랄한 번역으로 잘 알려진 그가 이번에는 영화가 아닌 현실 세계를 번역한다. 흔히 번역이라고 하면 영어에서 한국어, 한국어에서 프랑스어와 같이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의 번역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럼 같은 한국어끼리는 어떨까. 오늘날 우리는 서로의 말을 문제없이 이해하며 소통하고 있을까. 황석희 번역가의 신간 《오역하는 말들》은 번역가의 시선에서 조금 더 예민하게 바라본 일과 일상 속 오역들에 대한 이야기다.
20년간 번역 일을 해 왔지만 “계속 나를 단속하지 않으면 별 생각 없이 번역체를 쓰고 넘어가 버린다.”라며 익숙한 문장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으려 애쓰는 그는 같은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우리끼리는 좀 더 애정을 쏟아 서로의 원문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소중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누굴 욕하든 궁지에 몰든 몰아붙이든 그 사람이 숨이라도 한번 크게 쉬도록 그의 남은 땅은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며 언제부턴가 서로 지적하기에 급급한 사회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우리는 주변만 오역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나의 진의조차 오역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치일 때일수록 자신의 여정을 오역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도 잊지 않는다. 드라마 <파친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을 번역할 때의 비하인드는 번역에 관심 있거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로울 에피소드다.
일상에서 오가는 무수한 말들은 결국 각자의 언어로 번역된다. 하지만 “삶은 이토록 모순적이고 불가해하다. 감히 번역해 낼 수 없을 만큼”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보듯 삶에서 마주하는 순간들은 때때로 그 어떤 난해한 대사보다 더 번역하기 어렵다. 자막이라는 한정된 글자 수 안에 원문의 의미를 해치지 않고 온전히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어쩌면 우리도 서로의 말을 한정된 용량 안에 너무 서둘러 담느라 오역하고 있는 건 아닐까. 책 속에 남긴 작가의 메시지처럼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한 번역가”가 될 수 있길 바라본다.
<데드풀>처럼 거침없고 <플로리다 프로젝트>처럼 다정하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처럼 엉뚱하다
일상에서 오가는 무수한 말들,
20년 차 번역가의 시선으로 본 하루
원문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번역하면 직역, 전체의 뜻을 살려 번역하면 의역이라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오가는 말들은 소리든 글자든 상대방에 의해 필수불가결하게 번역된다. 그 과정에서 화자의 의도대로 정역되기도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오역되기도 한다. 오역을 발견한 화자가 뒤늦게 내 말은 그게 아니었어, 라고 각주를 달더라도 이 또한 읽히지 못하면 결국 소거된다. 오늘 나는 어떤 번역을 하고, 또 내 말은 어떻게 번역됐을까? 한 직업군에 오랜 기간 몸담고 있다 보면 직업병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20년 차 번역가 황석희는 오가는 말들에 조금 예민하다. 다소 까칠해 보일 만큼.
《오역하는 말들》은 ‘번역가 황석희’가 아닌 ‘작가 황석희’로서의 두 번째 책이다. <데드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플로리다 프로젝트>, <보헤미안 랩소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의 기억에 오래 남는 특색 있는 작품들을 번역해서일까. 그의 글은 무엇보다 다채롭다. 시선은 다정한데 표현은 거침없고,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새벽부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쳇바퀴를 은유한 각 장은 ‘일’, ‘나’, ‘가족’, ‘사회’로 자연스레 주제와 관심이 전환된다. 드라마 <파친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뮤지컬 <원스> 등을 번역하면서의 에피소드에서는 번역가의 고충을 담고 있음에도 일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고, 번역가로 자리 잡기 전까지 지난했던 과거에 대한 상기는 자기 위안보다는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세대들에게 건네는 용기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의 말을 더 귀담아들어야 하는 게 논리적으로도 옳다. 정작 중요한 의견들은 일방적인 애정이 섞였으니 무가치하다 여기고 내 인생에 지분 한 톨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는 경청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이런 완벽한 오역이 있나.”(89~90쪽)
가족을 통해 장착한 인류애는 사회로 자연스레 옮아간다. 가장 편하고 가깝기에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가족들의 언어를 가만히 듣다 보니 그는 언제부턴가 말로 상처 주고, 극한으로 몰아가는 사회가 안타깝게 느껴진다. 우리 좀 더 다정해질 수 없을까?
인간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다분히 사회적인 동물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회적 동물에게 있어 말이란 단순한 정보 교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같은 말도 전달하는 사람, 전달받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오역되지 않게 말하고, 상대를 오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오역되고 그로 인해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결과를 얻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로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좀 더 다정한 번역가가 되자고 이야기한다.
“다정한 사람이 훨씬 많다. 다정한 사람이 훨씬 많다. 다정한 사람이 훨씬 많다. 주문처럼 중얼대곤 소보로빵을 한입 베어 문다. 정말이지 눈물 나게 다정한 맛이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은 영화보다 현실에 잘 어울린다.”(253쪽)
그의 시선이 까칠하다고 느낀 건 완전히 오역이었다. 원문을 예민하게 파고든 데는 관객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길 바라는 진심이 있었고, 주변과 사회에서 오가는 말들을 날카롭게 바라본 데는 조금 더 다정한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었다. 그가 골라낸 오역하는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오늘 하루도 생각하게 된다. 나는 오늘 어떤 번역을 했을까, 나는 다정한 번역가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