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b에서 발터 벤야민의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심철민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고전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나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고전을 소개하는 도서출판 b의 ‘b판고전’ 시리즈의 한 권이다.
전 세계적으로 ‘벤야민 르네상스’ 현상을 가져온 그의 가장 핵심 논저가 이번에 전면 새롭고도 친절한 번역으로 나왔다. 이 책은 본문이 100여 쪽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에게도 이젠 일상어가 된 ‘아우라(Aura)’ 개념을 비롯, 이 아우라에 의거한 예술의 자율성이 붕괴되어 있는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성격 문제, 그리고 사진, 음악, 영화가 오늘날 대중의 지각양식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는지 등의 진단과 전망을 담고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정신집중과 관조의 태도로 임하는 전통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정신을 분산시키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유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집단적 수용 매체이다. 그러나 예술작품의 이 같은 대중적 수용 흐름이 마냥 낙관적이고 민주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현상은 자칫 파시즘의 세력권 하에 놓일 수 있으며, 이 경우 정치를 미화하는 정점인 전쟁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이 논저의 말미를 이렇게 매듭짓는다. “파시즘이 행하는 정치의 미화란 이러한 것이다. 이 파시즘에 맞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로써 대답한다.”
벤야민의 이 논저는 같은 제목 하에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집필한 총 다섯 개의 판본(초고본, 세 차례의 개고본, 그리고 프랑스어본)이 존재하지만, 본 역서는 세 차례의 개고본 각각을 1판, 2판, 3판이라 칭하고 이 중 가장 마지막 판본인 3판(1939년)을 번역 저본으로 삼았다. 3판이 통상 정본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그 이전의 모든 판본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벤야민 자신이 망명 도중 생을 마감한 해(1940)의 일 년 전까지도 이 텍스트의 교정 작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판을 저본으로 삼되, 그러나 1판, 2판과 3판 간의 내용적 변화 추이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끔, 본서에서는 별도로 ‘부록’을 두어 ‘판별 내용대조’가 가능하도록 했다.
기술적 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
1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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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창
4.0
1) ‘기술복제의 등장으로 예술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예술작품이 기술적으로 복제 가능하게 된 시대에 힘을 잃어가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 여기서 아우라란, 그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원본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분위기다. 복제 기술은 복제품을 많이 만들어냄으로써, 복제의 대상이 되는 것을 대량으로 출현시킨다. 이전까지 그림은 그림이 걸려 있던 장소가 지닌 독자성의 한 부분이었다. 때로는 그림을 다른 데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그 그림을 두 장소에서 동시에 볼 수는 없었다. 카메라가 어떤 그림을 복제하면, 그 이미지의 독자성은 파괴된다. 그 결과 이미지의 의미는 변화한다. 이러한 점은 그림이 텔레비전 스크린을 통해 보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림은 관람객의 집 속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서 벽지, 가구와 여러 가지 물건들에 에워싸인다. 그림의 의미에 그 가정의 의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수많은 다른 집으로도 들어간다. 각각의 집에서 각기 다른 맥락 속에서 보이는 것이다. 카메라에 의해, 관람객이 그림을 향해 가기보다는 그림이 관람객에게 온다. 벤야민은 단 하나뿐인 원본에 깃들어 있던 아우라가 위축되는 현상을 나쁘게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새롭게 등장한 복제의 기술이 예술을 제의적인 것에 기생적으로 존재했던 상태로부터 최초로 해방시킨다고 주장했다. 이제까지의 관례적 태도가 새로운 대중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즉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대폭적인 증대는 참여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복제품의 대량 출현은 오늘날의 대중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데, 이 점을 가장 강력하게 대변하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는 누구든 간에 영화의 엑스트라가 되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에게나 가능한 요구이다. 벤야민은 이 요구를 가장 명료하게 알려주는 것으로 책 출간의 역사를 예로 든다. 수 세기 동안 문필과 책의 세계에서는 소수의 집필자들이 수천 배가 넘는 독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이 보급되면서 큰 변화가 생겼다. 신문이 끊임없이 새로운 정치적, 종교적, 학술적, 지역적 독자들을 장악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독자들이 집필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리하여 작가와 대중이 그 근본적인 차이를 상실하게 되었다. 양자의 구별은 단지 기능상의 차이에 불과하고 독자는 언제든 집필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진과 영상은 이전까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새롭게 보도록 만들어주기도 했다. 클로즈업이나 슬로우모션 같은 다양한 촬영 기술은 평소 인간의 시선에서는 볼 수 없었던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이런 특징을 두고 벤야민은 우리가 의식을 통해서만 보던 공간에 무의식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의식적인 경험과 달리 사진이나 영상은 의식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미처 모르고 지나쳤던 현실의 다양한 측면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 벤야민의 시대 이후로 사진과 영상은 완전히 우리 삶을 잠식한 매체가 되었다. 우리는 벤야민이 말했던 해방적인 기능을 발견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 안에서 또 다른 종교를 만들고 거기서 아우라를 찾고 있을까? 사람들이 여전히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경험하러 갈 때 뭔가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는 이유는, 작품 안에 깃든 아우라를 찾으려 하는 전통이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복제본의 저작권 문제, 미술 매체와 출판사의 소유권 문제,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정책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신비화의 과정이 다시 개입한다. 그동안 원작의 의미는 그것이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점에서 나왔다. 오늘날의 문화에서 원작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어떻게 평가되고 정의될까? 원작의 가치는 그것의 희소성에 따라 정의된다. 이러한 가치는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에 의해 확인되고 평가된다. 그러나, 예술은 상업보다는 더 위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시장가격은 정신적인 가치의 반영으로 간주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미술관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 신비감이란 사실 헤아릴 수 없는 '부'이다. 미술계는 돈 있는 사람들만 작품을 가질 수 있고 그들만을 위한 향유라는 인식이 있다. 예술계에서 작품성이 돈으로만 평가되는 현실을 비판했던 뱅크시의 작품은 이를 특히 잘 보여준다. “우리에게 실제로 피해를 끼치는 것은 그래피티도, 불법 예술작품도 아닌 ‘기업의 광고’” (뱅크시) 우리는 현재 매일 수백 가지의 광고 이미지들을 보면서 산다. 광고만큼 우리와 자주 맞부딪치는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현대의 기술이 우리에게 제공한 혜택은 셀 수 없고, 과학의 발명이 가져온 생산력은 매우 풍요롭다. 더 행복하고, 더 자유롭고, 더 완벽하고자 인간이 만든 창작품들은 가히 경이롭다. 하지만, 새로운 삶이라는 샘은 이를 좇는 사람들의 목마른 입술에는 아득히 멀다. 이제 대중들도 복제 기술 덕분에 한때 소수들만 누릴 수 있었던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지만, 복제 수단은 여전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환상을 끊임없이 선전한다. 광고는 겉보기에 전과 딴판으로 변화된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고, 변화의 결과로 그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남을 사로잡는 매력이란 곧 선망의 대상이 되는 데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광고는 바로 이러한 매력을 제조해 내는 과정이다. 우리의 현재 상태가 아닌, 그보다 더 나은 다른 상태를 제시하는 것이다. 광고는 오늘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광고가 참조하고 인용하는 것들은 넓은 영역에 걸쳐 있는 반면, 광고가 제공하는 것은 좁은 범위 안에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흭득할 수 있는 능력 이외에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모든 인간의 기능이나 필요성은 이 능력에 비해 다소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모든 희망이 한데 모이고, 동질화되고, 단순화된다. 동일한 이미지와 동일한 가치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이 바람직한 것이고 무엇이 바람직하지 않은가에 기준을 잘 판단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세상에 너무나 만연해있어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는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 그 틀을 깰 수 있는 사람이 정해진 이미지의 가치가 아니라, 그 대상을 봤을 때 주관적인 자신의 느낌을 묘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애솔킴
4.0
벤야민은 기술적 복제가 가능한 조건에서 탄생한 새로운 예술(=영화)가 감상자로 하여금 작품에 집중하는 방식이 아닌 분산하는 방식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향유하는 태도를 바꾸었고, 이를 통해 감상자가 작품 속에 침잠/매몰 되는 것이 아닌, 작품이 감상자의 삶에 수용/용해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를 통해 예술 자체를 정치화하여 파시즘에 맞서길 기대했다. 하지만 벤야민의 기대는 무참히 꺽여버렸지만, 예상은 적중하여, 지금의 우리는 대중예술의 경박함을 우리 삶에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스스로 점점 더 빈곤하고 척박하게 만드는 시대에 살고 있다.
유아람+
5.0
80년이 넘었는데, 벤야민의 눈을 넘는 사람이 있었나. 그 동안 세상은 몇 번이고 바뀌었는데.
상맹
5.0
여전히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벤야민의 글. 내용은 풍화가 되었을 지 몰라도, 태도와 사고의 방향은 여전히 날카롭다. 1. 내용 - 복제가 진짜 보다 나은 점 1. 더 큰 독자성(실재보다 더 실재를 포착) 2. 모사를 공간의 제한없이 가져올 수 있음. 또한 복제품을 쉽게 접하게 함으로써 복제품을 현재화함. 그래서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내 전유하는 방식. -예술이 의식에 바탕을 두었었는데, 이제 예술은 다른 실천, 즉 정치에 바탕을 두게 된다. 복제의 기술로 인한 : 제의가치(숭고-엄격함-자연의 지배)-> 전시가치(유희-비구속성-자연과 인류의 어울림) - 개선능력을 가지고 있음. 영원한 가치를 극단적으로 포기하는 것. 관중은 카메라가 되어 배우를 테스트하니, 이 것은 제의가 아니다. - 무대에서 영화로 바뀌면서, 다중인격이 되어야함. 역할에 완전 동일시는 안 됨. 그리고 이 아우라를 대체하기 위해 '스타'를 만듦. - 대중이 컨트롤할 권력을 가지고 전문가가 되고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가짐. 필자와 독자와의 경계 허물어짐. - 현실은 영화에 의해 캐치하지 못한 것들을 포착하면서 지각, 즉 시각적 무의식의 영역이 심화된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도 허물어짐.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가짜. 거리를 두어야하는 미술과는 다르게 깊이 들어와서 현실로 느끼게끔 한다. 지금은? 지금은 다중인격. 거리를 오히려 두지 않나. - 정신분산(오락-예술이 대중으로 감싸는 것)과 정신집중(예술-개인이 예술로 빠져드는 것). 그리고 영화의 촉각적 성격. 사고할 시간 없이 받아들여짐. -영화는 정신분산 속의 수용. 촉각적 수용의 주도하에 익숙함과 습관을 통해 극복되는 것. 그리고 그 흐름은 정치적 변혁기의 태도를 습관화 시킴. 관중은 시험관인데,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이다. 즉 영화로 대중을 표현하게 끔 만들어서 정치의 심미화를 만듬. 반대로 공산주의는 예술의 정치화. -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예술 지각의 확장을 상부구조는 따라가지 못해, 전쟁이라는 기술의 페스티벌로 인간재료를 넣음으로서 전쟁을 예술화해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춘다. 정치의 심미화의 상황이다. 2. 결론 벤야민의 태도 : '매체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성격 전체가 바뀐 것' 그리고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3. 비판과 질문거리들. 1) 지금은 복제기술에서도 아우라는 여전히 존재한다는 입장. 물질적인 것을 떠나 이미 디지털화가 되었기 때문에 그걸 수용함. 그럼 그 복제의 아우라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 내용과 연출일텐데. 극장이 주는 현실감을 느끼고 싶으니까? 그 몰입감. 2) 회화의 개인적 수용 -> 영화의 집단적 수용 -> 개인적 수용으로의 회귀 다시 정신집중으로 가는 것인가. 또한 개인적 수용으로 바뀌면서, 단순히 정신산만한 시험관이 아니라 개인적인 의례로 바뀜도 허용하고 있음. : 아우라가 있는 것들은 극장에서 보고 싶어하는 느낌. 그리고 단순한 감상의 기능 이상의 것들을 바랄 때 극장. 3) 게임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온, 예술 매체의 변환과 대중의 사고방식과 존재방식의 변환과 태도. : 상호작용적이라는 것이 가장 크겠지. 몰입감을 너무 주기에 그리고 그만큼 힘들기도 함, 다중인격을 가속화? 세계관을 '체험'하는 방식이니. 4) 마지막 파시즘의 예술화에 대해서는 예술과 기술이 확장시켜놓은 세계관을 따라가는 모습 그리고 굳이 현실에 대입하지 않는 모습과 해리시키는 모습이 현대의 모습이지 않을까. 4. 최근의 흐름들 - 기술적예술과 상호작용성. - 관객의 관객이 되는 것. 상호작용이 가진 물성때문에 - 상호작용적 수동적 수용자. 장치의 체험이 더 중요시 되는. - 체험위주의 예술에서 다방면의 예술이 있지만 비판적인 예술의 기능. - 강의의 게임화는 어떨까?
왓챠정리몬함
4.5
순수예술의 허구성을 함축된 문장으로. 더 길게도 안말하고.
minnn
4.0
언제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틀을 깨는 사람은 가치있다.
모까모까
4.5
*주의 메모 겸 후기라 딱히 결론은 없습니다. 1. 기술적 복제에 의한 예술의 가치변화를 설명하는듯 하지만, 조금 더 쉽고 정확하게는 "왜 사람들은 이젠 감상적으로 보는가?" 예술적, 혹은 미학적으로 바라보는게 아닌 감상적으로 보는 이유. 벤야민이 말하는 복제는 짭이 아닌, 진본이 여러개인 경우를 말한다. 진본이 하나(이자 최초)일때는 진본이 가지는 근본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하다. 미학 사조 같은 것들 말이다. 왜냐면 유일한 것이기에 이곳과 이것을 보고있는 지금이 아니면 느낄수 없다. 따라서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 중요해진다. 히치콕이 처음 등장했을때 그의 테크닉은 센세이셔널 그 자체였다. 허나, 그가 만든 효과들이 후대에 접어들어 그의 테크닉을 사용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 호평의 근본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것처럼 말이다. (기술적으로 모범적이란 평은 있을 수 있겠지만) 즉, 아무도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때, 전에 없는 새로운 혹은 유일한 생각을 결과로 만드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벤야민이 말하고 싶은 '제의적 가치'일것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물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면? 어디에나 존재한 결과물이 어디에서든 새롭게 평가되고 감상된다면? 우리는 굳이 유일한 이것을 세세하게 파헤치고 논리적/철학적/예술적 사유들을 들며 그 창작배경에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어디에서나 재생산되고, 재소비될수 있는 요건이 충족된다. 수도 없이 많아진다. 중절모에 고급 양복을 입어야만 누릴수 있던 소수의 감상이 아닌, 누구나 접할수 있는 것들에 대해 본인들의 지성을 뽑내며 분석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을까? 이제는 분석해야할 대상이 너무 많아졌고 그렇기에, 더 이상 그런 세세한 의의를 분석할 여유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벤야민이 그 원인으로 제시한 '전시적 가치'의 증대는 이런 배경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이 지성이 아닌 유희의 영역에 들어가는 순간, 모더니즘 지식인들은 현타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그럴듯하고 도발적인(혹은 치명적인) 영화들이 나오면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좋은 예시일듯하다.) 어떻게든 예술적으로 평하려들지만, Av작품들에 있어 세세한 의의를 들이밀며 평하진 않으니까. 벤야민에 따르면 관객은 예술이 던지는 과제(아마 해석이 아닐까한다)를 수행하는걸 거부한다. 그래서 예술은 이러한 걸 할수밖에 없도록 사람을 특정 장소에 몰아넣는데, 이 장소를 영화라 언급한다. 영화관을 염두에 두고 영화라고 한건지, 이후 라캉처럼 영화를 또다른 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그런 사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개인적으론 후자라 생각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전술한 제의적 가치보다 전시적 가치가 우선되기 때문이라 말한다. 왜냐면 영화를 즉흥적으로 보고 난 후에는 감상적인 평이 나올수 밖에 없으니까. 2. 정치적인 영화에 대해 단편적으로 논하는데, 그 부분 역시 흥미롭다. 이 책이 나온건 1935년이고, 그럼 저런 배경을 1920-35년 사이로 봐야한다. 이 시기면 몽타주 영화가 판치는 시기이고, 몽타주의 가장 큰 함의는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그 속에는 일관된 생각으로 유도한다는 함의가 숨어있다. 물론, 벤야민은 선전영화라 퉁치고, 앞서 언급한 전시적 가치의 증대, 거기에 있는 영화산업의 특성과 자본의 영향을 이어 설명하기 위해 유성영화를 가져오지만 말이다. 3. 액조티즘의 천연색 영화와 르포르타주의 자연스런 진화(?)관계를 첨언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카메라 매개함으로 진실로 온전치 못한 연기를 논하는 부분이나 편집을 예시로 든 불연속성(?)같은 부분들은 훗날 미쟝센이 발전하게 되는 영화사조의 한 부분의 근간이 된다. 이러한 논쟁이 점화되는건 내가 아는 한에서는 아마 전후에 르누아르의 작품들이 재발견되거나 안토니오니나 웰즈의 작품이 부상하면서지만 말이다. 이미 그 시절에 그 가능성의 근간을 논한다는 점에서 근본이라 생각했다가 출간 시기를 보고 천재라 느꼈다. 4. 서문이랑 부록에 프롤로테리아가 많이 나와서 공산주의잔가? 했는데 진짜였다.ㄷㄷ
DY
3.5
분명 읽었는데 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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