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

김진경
44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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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의 기원인 고대 그리스의 역사. 2005년 작고한 저자가 30년 동안 강의한 내용을 학문의 깊이와 이야기를 읽는 재미를 고려하여 “헤로도토스의 설화성과 투키디데스의 역사성을 겸비한 글이 되기를” 시도한 저작이다. 청동기 시대 미케네문명부터 고전기까지 에게해 주변의 도시국가들과 페르시아 그리고 마케도니아간의 전쟁과 정치세력다툼을 중심으로 엮었다. 그리스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저자의 통찰력과 서양정신의 기원이 된 그리스 고전에 대한 해석이 돋보이는 책. 저자는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디오도로스 외 다수의 당대 저술들을 넘나들며 인용하고 비교하기도 하며 저자 나름의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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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次

1.그리스의 태동 아름다운 나라 그리스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형성된 고대그리스 슐리만, 그리스 청동기 시대를 깨우다 신화의 섬 크레테를 발굴한 에반스 미노아 문자를 해독하다 미노아 왕국은 해상왕국이었을까 미노아 문명의 파괴와 전설의 섬, 아틀란티스 트로이 전쟁은 역사적 사실일까? 미케네 문명의 몰락과 바다의 민족 철기와 알파벳사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잉태한 암흑시대 2.역사 시대의 개막 폴리스 폴리스 폴리스 정복전쟁과 노예제도의 스파르타 개혁으로 스파르타의 기틀을 마련한 입법가 리쿠르고스 테세우스의 전설과 아테네의 성립 킬론의 반란과 피로 쓴 드라콘의 성문법 조정자 솔론, 민주정의 기초를 닦다 신화적 황금시대의 모범적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 도편추방을 시행한 민주적 개혁가 클레이스테네스 3.페르시아 전쟁과 아테네의 약진 친 페르시아냐, 반 페르시아냐 마라톤 전투의 수수께끼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의 결정과 제국의 운명 아테네, 강력한 해군 국가로 거듭나다 스파르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패하다 아테네, 살라미스해전에서 페르시아를 물리치다 플라타이아 전투로 30년 동안의 페르시아전쟁을 끝내다 스파르타를 누른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 아테네 두 영웅의 종말 권력투쟁의 희생자, 에피알데스의 과격 민주정시대 아테네, 제국의 길로 민주정 시대의 독재자 페리클레스 아테네 영광과 번영의 시대 4.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스파르타의 제국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충돌 시켈리아 전투 패배의 원인, 아테네의 대중 민주정 불안한 정국을 틈 탄 두 차례 과두파의 혁명 아테네의 당파 싸움과 스파르타왕의 중재 대중민주주의가 낳은 비극,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네의 명장 크세노폰의 리더십 <아나바시스> 제국화한 스파르타의 몰락 5.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변방의 새로운 세력 마케도니아의 등장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의 적인가 동지인가 페르시아 원정을 결정한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그리스를 평정한 새로운 패자 알렉산드로스 경제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동방원정을 떠나다 끝없이 승리를 추구한 전쟁마니아, 알렉산드로스의 요절 6.서양정신의 기원 그리스 고전 호메로스와 호메리다이 <일리아스>는 그리스인의 성서이다 그리스 최초의 농민사상가, 헤시오도스 신이 아닌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 서정시들 제례와 잔치에서 함께 부르던 가요, 합창시 민중의 예술, 민주정의 산물, 그리스 비극 인류보편의 비극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시아인> 그리스 비극의 대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왕> 전통에 반대한 새로운 사조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 현실풍자로 언론의 역할을 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역사의 탄생 전쟁을 중심 주제로 다룬 최초의 역사가 헤로도토스 한 편의 비극으로 쓰인 투키디데스의 <역사>

出版社による書籍紹介

1. 트로이 전쟁을 실제 있었던 일일까? 슐리만의 발굴 이전에는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발굴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내용이 트로이 전쟁의 전모를 사실대로 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하지만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더라도 호메로스가 그린 대로 헬레나라 는 여자 한 명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입장들이 제기된다. 예컨대 리프F.X.Rief는 무역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즉 트로이는 지리적으로 교통의요지에 위치했으므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무역상인 들에게 시장세와 통과세를 부과해 번영했고,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 인은 관세장벽을 제거하고 흑해와의 금속무역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원정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조금 다른 입장으로 미틀러는 트로이가 교통의 요지였다는 이른바 지협이론으로 이 전쟁을 설명한다. 즉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바다의 물살이 급해 미케네 시대의 항해술로는 선박을 항해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상인들은 이 해협을 건너지 않고 지협의 입구에 위치한 트로이시장에서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주장은 미케네 시대에 활발한 무역활동이 존재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와 다르게 당시의 활발한 상업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학자도 있다. 닐슨M.P.Nilsson에 따르면 트로이 원정은 무역 전쟁이 아니며 중세의 바이킹처럼 재물을 약탈하기 위한 영웅들의 해적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또 트로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소진되어 해적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왕과 가신 간의 관계가 이완되고 이로 말미암아 왕권이 쇠퇴했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 원정을 왕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습격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며, 금속원료 등 왕국의 필수물자를 획득하기 위한 조직적인 활동으로 생각했다. 버묄E.Vermeule은 호메로스가 전하는 대로 파리스가 헬레네와 재물을 약탈한 것이 전쟁을 유발했다고 본다. 원정은 연해민족이 왕권지배에서 자립하여 해상활동(약탈)을 시작한 것이며, 그것은 그 후 큰 규모의 해상 민족활동의 서곡이 된다고 주장했다. 요즘 각광을 받는 것은 페이지D.Page의 이론이다. 그는 트로이 제7시가 화재 때문에 파괴된 점, 미케네 시대의 점토판에 영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점, 함선표가 당시 각국의 세력을 반영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전쟁의 실재성을 논증한다. 그리고 이어서 소아시아 서부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던 히타이트 제국이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미케네와 대립하며 세력의 균형을 유지했으나 제국의 동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전력을 기울임으로써 서부에서 정치적 공백이 생겼고, 이 틈을 타 미케네가 진출함으로써 전쟁이 발발했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트로이 전쟁의 실재를 논증하려는 입장과 달리 슐리만의 발굴 후에도 트로이 전쟁을 호메로스의 문학적 허구로 취급하거나 아니면 미케네 인 아닌 다른 민족의 침입이 와전되었다는 식으로 전쟁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여전히 많다. 2. 마라톤 전투의 수수께끼-삼류 도시국가였던 아테네가 강대국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거대한 페르시아에 맞서 싸웠다. 두 차례의 페르시아 전쟁에서 아테네의 활약에 힘입어 페르시아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전투는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이다. 마라톤의 신화를 낳은 마라톤전투 승리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그리하여 약 1만 명의 중장보병이 출동하여 마라톤 평야 서쪽 끝에 진을 쳤으며, 그 후 6일 간 양군은 대치한다. 아테네 군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오랫동안 대기했는지, 또한 마라톤에서 양군이 어떻게 포진했으며 싸움의 경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헤로도토스의 기술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테네 군은 병력의 열세를 깨닫고 스파르타 군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 아닐까? 그러면 페르시아 군은 왜 멈칫했을까? 페르시아 군이 마라톤에 상륙한 전략적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페르시아의 주력 부대인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평야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의 기술에는 기병대의 말이 상륙했다는 표현은 있지만 기병대의 동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테네 군의 중장보병의 밀집대는 적의 보병이나 궁수에 대해서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기동성이 뛰어난 기병이 측면이나 배후에서 공격해 오면 대열이 쉽게 무너져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병대는 어떻게 되었을까? 10세기의 수우다 사전에는 기병대가 마라톤에서 철수하자 그때까지 페르시아 군에 속해 있던 이오니아 병 사가 나무에 올라가 아테네 군을 향해 기병대가 떠났다는 신호를 보냈고, 다음에야 비로소 밀티아데스는 공격을 해서 승리했다는 기술이 있다. 페르시아의 기병대가 있는 한 밀티아데스는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기에 스파르타 군을 기다리며 6일이나 대기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기병대는 왜 싸우지도 않고 철수했을까? 페르시아 군이 상륙한 해변 바로 전면에 큰 늪지대가 있어 예상과는 달리 기병대가 활동하기 불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테네 시내가 무방비 상태인 것을 알고 기병대를 급속히 팔레론 만에 상륙시켜 아테네 시내로 진격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마도 후자였을 가능성이 컸겠지만, 두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페르시아 군도 첩자를 통해 그리스 군의 동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어서 스파르타 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테네로 진격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페르시아 군으로서도 기병대 철수로 병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에 작전이 변경되고 지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밀티아데스는 더 이상 스파르타 군을 기다리지 않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재빨리 공격했을 것이다 3. 소크라테스가 죽은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 최고의 지성인 소크라테스는 독신죄로 고발되어 처형당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아마추어리즘의 대중 민주주의와 정치보복 그리고 소크라테스 자신의 오기가 빚은 아테네의 비극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 재판에 대한 기록으로는 그의 제자들이 쓴 스승에 대한‘변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고발도 매우 훌륭하고 설득력이 있어 소크라테스 자신도 자기가 유죄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하나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화되고 성화聖化된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만 남아 있을 뿐, 재판의 진상은 알 길이 없다. 민주파들은 민주정의 약점을 규탄하고 민주파에게 악담을 서슴지 않던 오만불손한 소크라테스를 견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로 말미암은 소란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그를 고소했을 것이다. 민주파 내에서도 과격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지만 아무튼 고소 후 사태는 예상치 않게 악화되어 버린다. 1차 투표에서 유죄가 결정된 후 어느 정도의 형량을 받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국가유공자로서 종신연금을 요구했다. 예상치 못한 이 말에 가벼운 형량으로 사태를 마무리 지으려던 온건파들마저 반감을 품게 되었고, 원고의 요구대로 사형을 확정짓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원치 않은 민주파들은 그가 보이오티아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제의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제의를 거절한다. 제자들이 눈물로 탄원을 해도 그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왜 죽음을 고집했을까? 그의 죽음은 결국 그의 오기와 대중민주주의 경망함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회피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굳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죽음에 관해 여러 가지 말을 남겼다.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은 마지막에 남긴 말이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 여러분은 삶을 향하여. 나는 죽음을 향하여. 우리들 가운데 누가 보다 좋은 운명을 향하여 가는가는 신만이 알 것이다.”하지만 이런 말을 통해서도 죽음을 고집한 그의 진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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