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최고 이야기꾼이 탄생했다.
뒤늦게 발견한 한국 문학의 축복이다!”
― 소설가 구효서
▣ 최명희의 『혼불』의 품격이 부활한 듯한 고아한 역사소설
이화경 장편역사소설 『꾼』(부제: 이야기 하나로 세상을 희롱한 조선의 책 읽어주는 남자)이 문학에디션 뿔에서 출간되었다. 1997년에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꾼』은 이야기꾼이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자유를 얻고, 사랑을 얻고자 했던 한 사내의 뜨겁고도 아름다웠던 시절에 관한 가슴 절절한 이야기이자, 이야기 하나로 신분과 경계를 뛰어넘어 조선 팔도를 제 세상으로 취해 보려던, 그래서 조선의 이야기 왕이 되고자 꿈꾼 한 인간의 본질적 욕망에 관한 장편 서사이다.
조선 정조 시대를 무대로 펼쳐진 『꾼』은 작가의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인간 욕망과 자유의 본질에 대한 섬세한 문학적 탐구를 통해 그 시대 언어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육화해 냈으며, 흔들리기 쉬운 가녀린 인간 내면의 본질을 세밀하게 꿰뚫는다.
우리네 삶이 보여 주는 다채로운 빛깔의 풍경을 진지한 관찰과 예리한 인식 안에서 ‘혀’ 하나로 새롭게 재구성하여 현실 안 또 다른 세계를 창조하고, 세상 밖의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시대 아름다운 청년 ‘김흑’의 고뇌와 방황이 톱니바퀴가 물리듯 작가의 치열한 세계 인식과 함께 형형색색의 지도를 그려나간다.
♣ 정조시대의 책 읽어주는 남자, 전기수(傳奇?) 이야기는 ‘메타픽션’이라는 역사소설의 새로운 개성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작품은 근대부터 현대를 관통하는 문학의 존재 가치를 탐구하고 반성하는 문제적 좌표를 제시한다. 근대의 풍속에 대한 철저한 고증과 그것을 육화해 내는 이화경의 고아(古雅)한 문체는 최명희의 『혼불』을 계승할 만한 역사소설의 품격을 성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 이경호(문학평론가)
♣ 문체가 이념을, 사회를, 체제를 전복시킨다? 조선 후기 문학 작품들에 부쩍 많아진 것 중 하나가 소소한 일상에 대한 묘사들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되묻고 싶을 만큼 ‘경박하고, 섬약하고, 경솔하고, 감상적이고, 시시콜콜한’ 묘사들로 점철된 글들이 그 시대를 풍미했다.
나라님이 그토록 싫어하는 글을 쓰는 작가들은 바로 그 글 때문에 세상과 단절되고도, 분노와 좌절과 자기비하와 연민과 외로움을 붙잡은 채, 여전히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써댔다. 그들의 꿈과 욕망은 광대들의 그림자놀이, 수많은 연인들의 그림자 사랑처럼 덧없다.
덧없어서 아프고, 덧없으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욕망은 각자의 생을 끌고 가는 동인으로 연결된다. 작가 이화경은 이루고 싶은 세상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책을 읽는 인물들을 소설 속에서 촘촘하고도 끈덕지게 엮어내고 형상화한다. - 정순희(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조선의 왕과 조선 최고 이야기꾼 사내의 세상을 건 한판!
돈을 꾸어다 마시는 술을 좋아했고, 아무도 없는 객점의 빈방에서 술에 취하는 것을 좋아했다. 시정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고, 절름발이와 귀머거리를 좋아했다.
포도와 벼룩과 거미를 좋아했고, 저잣거리의 사람들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노래를 좋아했고, 거칠고 사나운 욕설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말과 화려한 불빛을 좋아했고, 가물거리는 불빛 아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슬픔을 좋아했고, 서러움을 좋아했고, 고독을 좋아했다. 아름다운 사랑을 좋아했고, 슬픈 시를 좋아했고, 무엇보다 불행하게도 소설을 좋아했다. 차와 술에 빠졌고, 책 속에 파묻히는 것을 좋아하였고, 시 짓는 일과 소설 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공(公)은 부귀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빈천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 수도 있고, 바보 같은 책벌레라 할 수도 있다. (P.10)
작품의 배경은 조선의 가을, 정조가 정학(正學)을 널리 독려하고,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명예를 복권하고자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던 시절이었다. 정조의 문체반정 역사 속에서 당시 유례없이 널리 읽힌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마저도 패관소품이 되어버렸고, 조선 팔도의 백성들이 남 몰래 탐독하기 시작한 언문소설(이야기책)들을 경박하고 감상적이며 시시콜콜한 글일 뿐이라며, 그러한 소설체를 쓰는 선비들과 백성들, 관료들을 교화하고 단속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때에 성균관 계집종의 아비 없는 아들로 태어나, 성균관에서 잔신부름을 하며 성장한 김흑은 바꿀 수 없는 신분의 귀천에서 해방되어 조선 팔도에서, 세상 밖에서 자유롭고자, 흰 손을 가진 남자들이 주인인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강한 놈이 되어 어느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는 센 사내가 되리라는 꿈을 지니고 혈혈단신 어머니 곁을 떠난다.
어느새 길 위에서 청년이 된 김흑은, 반듯한 이마에 코뼈가 우뚝하고 무성한 숲처럼 검게 자란 수염을 비집고 나온 입술은 빨갛고 치아는 상아처럼 튼튼하고 고운 데다가, 얼음처럼 투명하고 하얀 낯빛과 머루처럼 까맣고 구슬처럼 동그란 눈동자가 깊게 빛나, 계집은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사내들의 마음도 녹일 듯 수려한 용모의 사내가 되었다.
어린 시절 성균관에서 유독 자신을 귀여워해 준 이결 선생이 밤늦게까지 들려주던, 마음을 흔들어놓던 옛이야기들을 가슴에 품은 채, 어떤 것에도 젖지 않고 매이지도 않으면서 “물 위를 활주하는 소금쟁이”처럼 조선의 땅 위를 재재거리며 걸어가고 싶었던 김흑은, 길 위에서 만난 여러 인생들의 구구절절한 진짜 사연들이야말로 책에 없는 진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길 위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세상에 팔며 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다.
세상에 사연 없는 인생은 없었다. 인생의 사연 속에는 너무도 기이하고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고단한 길 위에서, 주막에서, 그 인생들은 휘황찬란한 글속은 없어도 절절한 사연들을 맛나게도 풀어냈다. 쓰고 달고 시고 짠 인생의 맛이 그들의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다. 때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마른 볼을 적시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면서 풀어내는 인생들의 사연들을 들으면서 김흑은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PP.53~54)
장돌뱅이들 사이에서 소문난 술막에 묵게 된 김흑은 왕년에 기생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소문난 주모에게 자신의 밥값으로 이야기를 해준다며 내기를 건다.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재미있다 싶은 부분이 있으면 걸치고 있는 것을 하나씩 벗는 거예요.
만약에 다 들었는데도 제 이야기가 재미없으면 제가 옷을 다 벗을게요.”
겨울밤, 김흑이 술막 주모에게 들려준 중국 금릉 땅의 곱디곱던 기생의 사랑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주모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마음을 위무해 준다. 삶은 한바탕 꿈이라던 그녀의 마음에 소리 없이 첫눈이 내리고 김흑과 주모는 하룻밤 서로의 체온을 뜨겁게 나눈다.
저잣거리의 장꾼들 사이에서부터 사대부가 마님들의 마음과 치맛속을 뒤흔들어 놓으며, 나라님의 침소에까지 김흑의 상서로운 외모와 그 외모만큼 아름답고 두려운 이야기를 짓는 재주에 대해 무성한 소문이 휘몰아치며, 사람 마음 빼앗는 ‘불온한 놈’에 대하여 나라님께 상소가 올라오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자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항간에는 검은 놈으로 불린다고 하옵니다. (중략) 외출할 때마다 소매 가득 여러 빛깔의 수염을 넣고 다니면서 몇 발자국 뗄 때마다 바꿔 다는 게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능가하는 놈이라 하옵니다. 말이 쇠못을 씹듯이 패관잡기 한 글자도 백 번 갈아 연마하여 놈의 이야기를 들으면 첫눈에 넋이 나간다고 하옵니다. 창기와 벗하기를 일삼고, 권문세가의 부녀를 희롱하길 즐기고, 성적 노략질을 감행하는데도 놈이 떠나면 연인과 이별하듯이 두레박줄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린다 하옵니다.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