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go Jay3.5서울아트시네마 '시네바캉스'에서 강현주 피아니스트 연주 상영으로 감상.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에 의하면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 보다 앞선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영화라고 하는데 해석과 연주가 잘 어우러졌다. 연륜이 쌓인 피아니스트의 여유로움과 테크닉이 느껴졌다. 특히 상영 후 들려준 뉴에이지 뮤직 'Midnight Rainbow'는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 앨범에 수록된 곡이라고 한다. 영화는 기대했던 것에 못미쳤다. 3.5/5 강현주 피아니스트는 이전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버스터 키튼 특별전, 시네바캉스에서 연주 상영으로 만났다. '2015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인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1931) 엔딩에서, <모던 타임즈> (1936) 마지막 씬에 흘렀던 'Smile'을 연주하기도 했다. 201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으로 킹 비더 감독의 <쇼 피플>(1928) 연주 상영을 할 때는 익숙한 라흐마니노프나 거쉰 등의 음악을 차용해서 도리어 20년대 무성영화 분위기에 몰입을 어렵게 했었다. 일본의 무성영화 전문 연주인 야나시테 미에와 비교되어 아쉬웠다. 그래서 2017년 시네바캉스 개막작이었던 빅터 쇠스트롬의 <바람>도 패스했었다. 이번이 3년 반 만에 만난 것. 이번 연주는 100% 만족!いいね9コメント0
김아무개2.0ㅋㅋㅋ아조씨 뛰는 거랑 음악 왜이렇게 귀여움...미침.. 그냥 마약 틀어놓는듯한 느낌. 만약에 지금 성직자의 억압된 성적욕망을 표현해볼래? 했을때. 아방가르드하고 초현실주인면에서 이 영화를 능가하는 사람이 나올수 있을까?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독창적임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영화적 연출들을 통해서 매우 뛰어나게 그 사변적 느낌들을 구체화해냄. 예를 들면, 초점이 흐려졌다가 맞는다거나, 상징물들이 변화한다거나, 비논리적이고 비서사적인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각 씬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너무 잘 느껴진다는 점이나. 더치앵글을 사용한다거나, 리플이펙트도 너무 몽환적이고 근데 이 리플 효과 보면서 필름시대에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함. 디졸브는 기본이고, 비네팅, 프레임속의 프레임, 그리고 그냥 얼굴을 반으로 자르는걸 특수효과말고 편집기법적으로 그냥 절반 나누거나, 여자의 목과 조르는 손을 디졸브시킨다던가. 아니 이런 모든 표현방식들을 어떻게 생각해낸건지 진짜 개천재고 진짜 몽환적이고 너무 목적성에 부합해서 더 천재적임.いいね5コメント1
Sleep away5.0비슷한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경우 그럼에도 선형적인 스토리를 진행 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물론 일반적인 드라마투르기 영화들에 비하면 해석의 허용범위가 굉장히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객입장에서는 이 해석들을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정리해야할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받게 되는데 이미지의 연결에서 보이는 연속성과 수미쌍관의 느낌? 일종의 순환구조 같은 부분들을 못본척 하고 넘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제일 처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건 이것이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미지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세 명의 주요인물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신부, 좀 더 나이든 각지고 완고한 얼굴의 중년 남자, 그리고 젊은 여자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미지만 놓고 관습적으로 생각하면 이 각진 얼굴의 중년남자가 일종의 사회적인 아버지상, 권위적인 가부장의 모습일 것 같다. 신부가 젊은 여성에게 끌리는 걸 혼내고 억압하는 역할 일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재미있는 건 배우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이 영화속에서 가장 기묘하고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심지어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다름아닌 그 라는 점이다. 이때문에 이 영화를 그냥 관습적인 구도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사실 영화속에서 이 남자가 하는 역할도 혼내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다. 신부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약올리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장난꾸러기 요정 같기도 하다. 하지만 중간 중간 모습을 바꾸어가며 등장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근엄한 군인등의 모습등으로 나타나는 점이 재미있다. 사실 이 영화의 재미 혹은 매력의 상당부분은 이 중년의 남자 요정이 가지고 있는 입체적이고 유머러스하고 그로테스한 매력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근엄한 가부장의 얼굴을 한 장난꾸러기 요정이랄까? 신부가 젊은 여자 캐릭터에게 갖는 감정도 입체적인데 어떨 때는 대상으로서 욕망하는 것 같다가도 어떨 때는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반부에 신부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 보면 트랜스젠더적인 욕망인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오브젝트인 조개 또한 신부의 브레지어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추측은 더욱 더 강해진다. 하지만 조금 뒤에는 곧바로 그 욕망을 부정하는 듯한 장면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자신의 욕망을 부정한다고해서 그 욕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쉽사리 어떠한 이미지로 정착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듯한 의지는 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모든 욕망들이 뭉뚱 그려진듯한 자기 얼굴이 담긴 조갯물을 들이킬 때에는 자동적으로 첫 장면이 연상되는데. 첫장면에서 신부는 다름아닌 자신의 손으로 조갯물을 담은 유리병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갯물을 들이킨 신부의 운명 또한 그러하리라는 예감을 할 수밖에 없게끔 영화가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부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자체의 운명이기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신부가 들이킨 조갯물속에 담긴 스스로의 얼굴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준 모든 모험의 끝에 만들어진 어떤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운명은 아마도 첫장면에서 보여진 조갯물이 담긴 유리병의 운명과 같지 않을까? 즉, 떨어지고 깨어져 파편들의 무더기로 이루어진 쓰레기 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분명히 해석의 허용범위는 넓지만 특정한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고 있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생각까지도 하도록 유도하고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생각을 확정하려고 할 때 마다 영화가 도망가 버리고 또 도망가는 영화를 쫓아가다 보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는 구조랄까? 물론 이런 구조를 취하고 있는 영화가 이 영화 하나인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아름답고 그 연결의 방식들이 독창적이며 우아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시 안달루시아의 개와 비교를 한다면 결정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점까지는 안달루시아의 개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특정한 지점까지는 들어오도록 유혹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두 영화의 방식에 우열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취향에는 그래도 유혹하여 참여하도록 유도한 다음에 함정에 빠지게 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 좀 더 재미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いいね5コメント0
윤경아 한 편을 봐도 잘 봐야지3.5포토 로망으로 만들어도 괜찮을뻔 했다. 필수불가결의 장르 '결정'이 아닌 장르 '선택'에 의해 탄생한 작품 중에 명작은 드물다. 영화사적으로 지닌 가치는 다른 문제다.いいね4コメント0
이형주
3.5
흥미로운 이미지들의 나열
Indigo Jay
3.5
서울아트시네마 '시네바캉스'에서 강현주 피아니스트 연주 상영으로 감상. 김성욱 프로그램 디렉터에 의하면 루이스 부뉴엘 감독의 <안달루시아의 개>(1929) 보다 앞선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영화라고 하는데 해석과 연주가 잘 어우러졌다. 연륜이 쌓인 피아니스트의 여유로움과 테크닉이 느껴졌다. 특히 상영 후 들려준 뉴에이지 뮤직 'Midnight Rainbow'는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 앨범에 수록된 곡이라고 한다. 영화는 기대했던 것에 못미쳤다. 3.5/5 강현주 피아니스트는 이전에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버스터 키튼 특별전, 시네바캉스에서 연주 상영으로 만났다. '2015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인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1931) 엔딩에서, <모던 타임즈> (1936) 마지막 씬에 흘렀던 'Smile'을 연주하기도 했다. 201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개막작으로 킹 비더 감독의 <쇼 피플>(1928) 연주 상영을 할 때는 익숙한 라흐마니노프나 거쉰 등의 음악을 차용해서 도리어 20년대 무성영화 분위기에 몰입을 어렵게 했었다. 일본의 무성영화 전문 연주인 야나시테 미에와 비교되어 아쉬웠다. 그래서 2017년 시네바캉스 개막작이었던 빅터 쇠스트롬의 <바람>도 패스했었다. 이번이 3년 반 만에 만난 것. 이번 연주는 100% 만족!
DU
3.5
영화의 눈과 영화의 귀만이 감각할 수 있는 고요와 정서.
프로낮잠러
4.0
이럴 거면 clergy 말지
김아무개
2.0
ㅋㅋㅋ아조씨 뛰는 거랑 음악 왜이렇게 귀여움...미침.. 그냥 마약 틀어놓는듯한 느낌. 만약에 지금 성직자의 억압된 성적욕망을 표현해볼래? 했을때. 아방가르드하고 초현실주인면에서 이 영화를 능가하는 사람이 나올수 있을까?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독창적임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영화적 연출들을 통해서 매우 뛰어나게 그 사변적 느낌들을 구체화해냄. 예를 들면, 초점이 흐려졌다가 맞는다거나, 상징물들이 변화한다거나, 비논리적이고 비서사적인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각 씬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너무 잘 느껴진다는 점이나. 더치앵글을 사용한다거나, 리플이펙트도 너무 몽환적이고 근데 이 리플 효과 보면서 필름시대에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생각함. 디졸브는 기본이고, 비네팅, 프레임속의 프레임, 그리고 그냥 얼굴을 반으로 자르는걸 특수효과말고 편집기법적으로 그냥 절반 나누거나, 여자의 목과 조르는 손을 디졸브시킨다던가. 아니 이런 모든 표현방식들을 어떻게 생각해낸건지 진짜 개천재고 진짜 몽환적이고 너무 목적성에 부합해서 더 천재적임.
Sleep away
5.0
비슷한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와 비교하면 이 영화의 경우 그럼에도 선형적인 스토리를 진행 시키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물론 일반적인 드라마투르기 영화들에 비하면 해석의 허용범위가 굉장히 높다. 하지만 그럼에도 관객입장에서는 이 해석들을 하나의 스토리라인으로 정리해야할 것 같은 느낌을 계속 받게 되는데 이미지의 연결에서 보이는 연속성과 수미쌍관의 느낌? 일종의 순환구조 같은 부분들을 못본척 하고 넘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제일 처음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건 이것이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미지들인 것 같다는 느낌이다. 세 명의 주요인물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신부, 좀 더 나이든 각지고 완고한 얼굴의 중년 남자, 그리고 젊은 여자이다. 등장인물들의 이미지만 놓고 관습적으로 생각하면 이 각진 얼굴의 중년남자가 일종의 사회적인 아버지상, 권위적인 가부장의 모습일 것 같다. 신부가 젊은 여성에게 끌리는 걸 혼내고 억압하는 역할 일 것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재미있는 건 배우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의 이미지와는 반대로 이 영화속에서 가장 기묘하고 이상하고 그로테스크하고 심지어 유머러스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다름아닌 그 라는 점이다. 이때문에 이 영화를 그냥 관습적인 구도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사실 영화속에서 이 남자가 하는 역할도 혼내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인 것이다. 신부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약올리는 것이다. 어떻게보면 장난꾸러기 요정 같기도 하다. 하지만 중간 중간 모습을 바꾸어가며 등장할 때의 모습을 보면 근엄한 군인등의 모습등으로 나타나는 점이 재미있다. 사실 이 영화의 재미 혹은 매력의 상당부분은 이 중년의 남자 요정이 가지고 있는 입체적이고 유머러스하고 그로테스한 매력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근엄한 가부장의 얼굴을 한 장난꾸러기 요정이랄까? 신부가 젊은 여자 캐릭터에게 갖는 감정도 입체적인데 어떨 때는 대상으로서 욕망하는 것 같다가도 어떨 때는 질투하고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반부에 신부가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 보면 트랜스젠더적인 욕망인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오브젝트인 조개 또한 신부의 브레지어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추측은 더욱 더 강해진다. 하지만 조금 뒤에는 곧바로 그 욕망을 부정하는 듯한 장면전환이 이루어지기도 하고(자신의 욕망을 부정한다고해서 그 욕망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쉽사리 어떠한 이미지로 정착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듯한 의지는 이 영화 내내 이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모든 욕망들이 뭉뚱 그려진듯한 자기 얼굴이 담긴 조갯물을 들이킬 때에는 자동적으로 첫 장면이 연상되는데. 첫장면에서 신부는 다름아닌 자신의 손으로 조갯물을 담은 유리병을 떨어뜨려 깨뜨리는 행위를 무한히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조갯물을 들이킨 신부의 운명 또한 그러하리라는 예감을 할 수밖에 없게끔 영화가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부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자체의 운명이기도 한 것처럼 보이는데, 신부가 들이킨 조갯물속에 담긴 스스로의 얼굴이야말로 이 영화가 보여준 모든 모험의 끝에 만들어진 어떤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의 운명은 아마도 첫장면에서 보여진 조갯물이 담긴 유리병의 운명과 같지 않을까? 즉, 떨어지고 깨어져 파편들의 무더기로 이루어진 쓰레기 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분명히 해석의 허용범위는 넓지만 특정한 스토리라인을 만들어 내도록 유도하고 있고, 특정한 주제에 대한 생각까지도 하도록 유도하고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그 생각을 확정하려고 할 때 마다 영화가 도망가 버리고 또 도망가는 영화를 쫓아가다 보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게끔 설계되어 있는 구조랄까? 물론 이런 구조를 취하고 있는 영화가 이 영화 하나인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아름답고 그 연결의 방식들이 독창적이며 우아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시 안달루시아의 개와 비교를 한다면 결정적인 해석을 거부한다는 점까지는 안달루시아의 개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특정한 지점까지는 들어오도록 유혹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물론 두 영화의 방식에 우열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취향에는 그래도 유혹하여 참여하도록 유도한 다음에 함정에 빠지게 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 좀 더 재미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윤경아 한 편을 봐도 잘 봐야지
3.5
포토 로망으로 만들어도 괜찮을뻔 했다. 필수불가결의 장르 '결정'이 아닌 장르 '선택'에 의해 탄생한 작품 중에 명작은 드물다. 영화사적으로 지닌 가치는 다른 문제다.
조성호
3.0
초현실주의가 지독한 사랑을 만났을 때 일어나는 화학작용. 완전한 무성영화로 만나다. 시네바캉스2019
さらに多くのコメントを見るには、ログインして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