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일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평균 3.9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소설 혁명을 일으킨 모더니즘 걸작. 이전 시대의 소설이 근대사회의 등장 속에서 세계와 길항하는 인간을 핍진하게 그렸다면, 프루스트는 인간 내면의 고유한 형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복원하고자 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을 새롭게 구현하는 방식이었고, 미지의 문학 영토를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전통 소설은 발단에서 대단원에 이르는 극적 구성을 따랐고,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이야기에 종속되었다. 반면 프루스트는 등장인물들을 고정된 존재가 아닌 정황과 지각에 의해 점차로 드러나고, 거듭 형성되는 유동적인 존재로 그렸다. 이로써 전통적인 플롯과 성격 창조는 복잡하고 세밀한 개인의 정체성 폭로, 즉 일생 동안의 인간관계와 잊어버린 경험의 발견 과정으로 대체되었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일부러 떠올리는 "의지적 기억" 너머에 있는, 나 자신도 완전히 망각하고 있던 "비의지적 기억"(심정의 간헐)이 펼쳐지는 프루스트 현상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을 포착하게 된다. "나는 마들렌느 부스러기 하나가 잠겨 풀어진 차 한 술을 기계적으로 나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마들렌느 부스러기 섞인 차 한 모금이 나의 입 천장에 닿는 순간, 내가 소스라치면서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잔뜩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였고 나를 고립시켰으나, 그 원인의 관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희열이, 마치 사랑의 작용처럼, 나를 귀한 진수로 가득 채우면서, 생의 영고성쇠가 나와 무관하고, 나의 생에 닥칠 온갖 재앙이 무해하며, 생의 덧없음이 환상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숙모님께서 보리수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의 맛을 내가 알아차리자마자, 숙모님의 침실이 있던 그리고 길에 면해 있던 낡은 회색 건물이 즉시, 극장 무대의 배경처럼, 그 뒤 정원 쪽에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지은 작은 별채에 와서 잇대어졌다. 그리고 그 건물과 함께, 도시 전체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시각들, 모든 날씨, 점심 전에 가서 놀라고 어른들이 나를 보내시곤 하던 광장, 내가 심부름하러 가던 길들, 날씨가 좋을 때면 우리가 따라 걷던 산책로 등 그 작은 별채에 잇대어졌다. 우리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댁 정원의 꽃들, 비본느 시냇물의 수련들, 교회당, 꽁브레 전체와 그 주변 등, 그 모든 것들이 형체와 견고함을 얻어, 즉 도시와 정원들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기억(꿈을 포함한)을 통해 짜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에게 사랑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주체를 광기와 혼미로 몰고 가지만, 마비된 우리 영혼을 일깨워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삶의 진실에 보다 근접하게도 해준다. 그것은 운명이나 필연이 아니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 힘의 산물(우발적)이기에 그렇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은 내 안의 고유한 내면의 책을 발굴하는 것, 즉 문학예술 활동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랑과 예술(문학, 음악, 그림)을 양 축으로 삼아, 한 시대(벨 에포크)를 관통하고, 사교계라는 창조적 동물원(모든 유행의 진원)을 체험한 후, 결국 작가 되기를 결심하는 한 소년의 성장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음과 삶의 총체적 모습을 담아내는 기념비적 미학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