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섭5.0<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소설 혁명을 일으킨 모더니즘 걸작. 이전 시대의 소설이 근대사회의 등장 속에서 세계와 길항하는 인간을 핍진하게 그렸다면, 프루스트는 인간 내면의 고유한 형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복원하고자 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을 새롭게 구현하는 방식이었고, 미지의 문학 영토를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전통 소설은 발단에서 대단원에 이르는 극적 구성을 따랐고,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이야기에 종속되었다. 반면 프루스트는 등장인물들을 고정된 존재가 아닌 정황과 지각에 의해 점차로 드러나고, 거듭 형성되는 유동적인 존재로 그렸다. 이로써 전통적인 플롯과 성격 창조는 복잡하고 세밀한 개인의 정체성 폭로, 즉 일생 동안의 인간관계와 잊어버린 경험의 발견 과정으로 대체되었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일부러 떠올리는 "의지적 기억" 너머에 있는, 나 자신도 완전히 망각하고 있던 "비의지적 기억"(심정의 간헐)이 펼쳐지는 프루스트 현상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을 포착하게 된다. "나는 마들렌느 부스러기 하나가 잠겨 풀어진 차 한 술을 기계적으로 나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마들렌느 부스러기 섞인 차 한 모금이 나의 입 천장에 닿는 순간, 내가 소스라치면서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잔뜩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였고 나를 고립시켰으나, 그 원인의 관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희열이, 마치 사랑의 작용처럼, 나를 귀한 진수로 가득 채우면서, 생의 영고성쇠가 나와 무관하고, 나의 생에 닥칠 온갖 재앙이 무해하며, 생의 덧없음이 환상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숙모님께서 보리수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의 맛을 내가 알아차리자마자, 숙모님의 침실이 있던 그리고 길에 면해 있던 낡은 회색 건물이 즉시, 극장 무대의 배경처럼, 그 뒤 정원 쪽에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지은 작은 별채에 와서 잇대어졌다. 그리고 그 건물과 함께, 도시 전체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시각들, 모든 날씨, 점심 전에 가서 놀라고 어른들이 나를 보내시곤 하던 광장, 내가 심부름하러 가던 길들, 날씨가 좋을 때면 우리가 따라 걷던 산책로 등 그 작은 별채에 잇대어졌다. 우리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댁 정원의 꽃들, 비본느 시냇물의 수련들, 교회당, 꽁브레 전체와 그 주변 등, 그 모든 것들이 형체와 견고함을 얻어, 즉 도시와 정원들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기억(꿈을 포함한)을 통해 짜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에게 사랑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주체를 광기와 혼미로 몰고 가지만, 마비된 우리 영혼을 일깨워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삶의 진실에 보다 근접하게도 해준다. 그것은 운명이나 필연이 아니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 힘의 산물(우발적)이기에 그렇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은 내 안의 고유한 내면의 책을 발굴하는 것, 즉 문학예술 활동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랑과 예술(문학, 음악, 그림)을 양 축으로 삼아, 한 시대(벨 에포크)를 관통하고, 사교계라는 창조적 동물원(모든 유행의 진원)을 체험한 후, 결국 작가 되기를 결심하는 한 소년의 성장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음과 삶의 총체적 모습을 담아내는 기념비적 미학 소설이다.좋아요20댓글2
상맹5.0길고 긴 민음사의 13권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 후 강신주 박사님의 프루스트 읽기 강의를 들으면서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료했다. 처음에는 읽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건 프루스트의 단독성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긴 시간 동안 짧은 식견으로 이 고전에 대해 느낀 것은 만연체다 이런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는 삶의 편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서사로 보면 정말 특정한 프랑스 사교계의 별 볼일 없는 사랑 이야기 같지만, 이런 곳에서도 프루스트는 인간의 군상들과 삶의 본질과 지혜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에서 느낀 감정들을 집요하게 붙잡고 본질의 깊이까지 탐구하고 사유한다. 오히려 13권인 것이 너무 짧을 정도로. 아니 근데 하나만 전달해주셔도 감사한데 ㅠㅠ 이렇게 많이 주시면 배탈나요. 창작을 위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편에서 글을 쓰고 예술을 한다. 아래는 강의 복습과 장마다 느꼈던 것들의 정리 1. 스완의 사랑 사랑의 본질은 대상이 아니라 상황과 어떤 조건일 수 있다는 것. 뱅퇴유의 음악이 아니었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오데트에 대한 스완의 사랑. 바로 그 무의식적 기억, 잃어버린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자아를 잃어버리케하는 기쁨의 고양감. 이해받고 싶은 것은 사랑받고 싶어서이고, 사랑받고 싶은 것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소돔과 고모라 사랑의 본질은 알고 싶어하는 것. 사랑하는 자아를 탄생하기 위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앎이 필요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자아와 기억을 탄생시키는 과정. 그래서 알베르틴의 동성애성은 화자에게 절대의 미지의 영역이기에 사랑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됨. 젠더 이분법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고 각기 다른 그런 자아들이 있음.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자아들이 나오는 것. 사랑에 있어서의 젠더는 사랑 이후에 자각되는 것. 인간의 본질은 관념명사가 아닌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에서 오는 것. 3. 갇힌 여인 금기는 욕망의 원천인 것처럼, 불안한 화자의 알베르틴 가두기. 하지만 가두면 가둘 수록 사라지는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의 날개를 직접 달아주는 것이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 다른 자아를 탄생시키는 연인과 그 자아들로 인해 더 알고 싶고 궁금해하게 하는 사랑. 4. 사라진 알베르틴 사랑의 깊이는 고통에서 측정된다. 사랑에 빠진 자아가 상실되었을 때 불쑥 튀어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삶을 영위하게하는 다른 자아들. 사랑의 편집증적 힘은 사랑의 자아가 다른 자아들에게 애도를 요구하는 것에 있을 수도 있다. 사랑의 자아들처럼 과거에 쌓인 지층들로 만들어진 많은 자아들을 만들고 각각 인정하게 하는 과정. 이 낯선 힘들. 이 비자발적 기억으로 인한 자아들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잃어버린 시간과 자아들. 사랑하는 수많은 나들. 사랑의 경험은 단독적인 자아를 탄생시키는 경험이고, 이로 인해 나를 깊게 알아가는 경험이다. 사실 사랑의 조건은 대상이 아니라 내가 가진 욕망의 특성들의 집합체일 수도 있다. 5. 되찾은 시간 사랑을 통해 깨달은 삶의 불완전성. 오히려 완전한 행복은 과거의 문득 튀어나오는 비자발적 기억에 있을 수 있다. 그런 기쁨은 나 자신이 빠져나오는 무아의 느낌이고 죽음과 희열의 경험이다. 어쩌다가 주어진 이러한 기쁨들. 비자발적 기억에 담겨진 수많은 편린들과 되돌아 봤을 때 느껴지는 어떠한 본질들. 삶은 이러한 강렬한 기억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자아를 넘어서게 하는 그러한 기억들. 현재의 자아를 시시때때로 비자발적으로 전복하는 그런 과거의 경험들과 자아들. 예술의 고유성은 이러한 기억들을 붙잡아 놓는 것에 있는 것이다. 스완의 뱅퇴유 음악, 프루스트의 발베크와 콩브레처럼. “모든 인상은 두 겹이라고, 절반은 대상에 싸여 있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만이 알아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까지 이어져 있다” 결국 어떤 사물과 대상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나만의 기억과 내면이 담긴 언어들 그리고 예술들을 만들어내어 단독성을 획득하는 것. 결국 세계를 풍요로케하는 건 수많은 차이들과 시선들이기에. 헤겔이 말했듯 결국 타자는 자신을 이해하게 하기에. 예술가들은 모두에게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내면의 어떤 기억들을 붙잡아 끈질기게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들. 사랑의 경험도 마찬가지일 것. 내 단독성과 네 단독성으로 단독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서로에게 단독적인 자아를 만들어 주는 것. 진정으로 나를 이해받고 너를 이해해주는 세계를 만드는 것.좋아요16댓글0
lilin🪽읽고싶어요프루스트의 만연체는 삶의 조그마한 숨결에도, 아니 숨결에 그 모든 기쁨과 슬픔이, 고통과 성장이, 사랑과 증오가, 기억과 추억과 기록이. 차오르는 아스라한 시간 속에 각인 / 됨을, 돼었음을, 될 것임을 독자의 감각으로부터 증명해낸다.좋아요10댓글0
태연4.5현재까지 민음사에서 새로 펴내고 있는 시리즈로는 게르망트까지 구매해 읽어보았다. 솔직히 프루스트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귀족들의 생활상, 지루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강렬한 질베르트와의 시간들, 시같은 문장들. 잠시 책을 놓게는 해도 포기하지않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ㆍ 우리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을 맞아들일 준비가 될 때면, 그 사람은 오지않고 우리에게 죽은 존재가 되지만, 우리는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안에 갇혀산다.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359p좋아요9댓글0
최원재
4.5
프루스트의 의식을 따라가며 모더니즘이라는 교향곡을 듣는다.
이규민
5.0
만연체로 유명하지만, 이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삶의 밀도를 한줌 흘릴 새 없이 공들여 묘사했다는 것에 있다
최일섭
5.0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소설 혁명을 일으킨 모더니즘 걸작. 이전 시대의 소설이 근대사회의 등장 속에서 세계와 길항하는 인간을 핍진하게 그렸다면, 프루스트는 인간 내면의 고유한 형상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복원하고자 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을 새롭게 구현하는 방식이었고, 미지의 문학 영토를 확장하는 작업이었다. 전통 소설은 발단에서 대단원에 이르는 극적 구성을 따랐고, 소설 속 인물의 행동은 이야기에 종속되었다. 반면 프루스트는 등장인물들을 고정된 존재가 아닌 정황과 지각에 의해 점차로 드러나고, 거듭 형성되는 유동적인 존재로 그렸다. 이로써 전통적인 플롯과 성격 창조는 복잡하고 세밀한 개인의 정체성 폭로, 즉 일생 동안의 인간관계와 잊어버린 경험의 발견 과정으로 대체되었다. "진정한 삶, 마침내 발견되고 밝혀진 삶,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체험하는 유일한 삶은 바로 문학이다." 일부러 떠올리는 "의지적 기억" 너머에 있는, 나 자신도 완전히 망각하고 있던 "비의지적 기억"(심정의 간헐)이 펼쳐지는 프루스트 현상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을 포착하게 된다. "나는 마들렌느 부스러기 하나가 잠겨 풀어진 차 한 술을 기계적으로 나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마들렌느 부스러기 섞인 차 한 모금이 나의 입 천장에 닿는 순간, 내가 소스라치면서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에 잔뜩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감미로운 희열이 나를 엄습하였고 나를 고립시켰으나, 그 원인의 관념조차 어른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희열이, 마치 사랑의 작용처럼, 나를 귀한 진수로 가득 채우면서, 생의 영고성쇠가 나와 무관하고, 나의 생에 닥칠 온갖 재앙이 무해하며, 생의 덧없음이 환상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숙모님께서 보리수차에 담갔다가 나에게 주시던 마들렌느 과자 부스러기의 맛을 내가 알아차리자마자, 숙모님의 침실이 있던 그리고 길에 면해 있던 낡은 회색 건물이 즉시, 극장 무대의 배경처럼, 그 뒤 정원 쪽에 나의 부모님을 위하여 지은 작은 별채에 와서 잇대어졌다. 그리고 그 건물과 함께, 도시 전체와,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시각들, 모든 날씨, 점심 전에 가서 놀라고 어른들이 나를 보내시곤 하던 광장, 내가 심부름하러 가던 길들, 날씨가 좋을 때면 우리가 따라 걷던 산책로 등 그 작은 별채에 잇대어졌다. 우리 정원의 꽃들과 스완 씨 댁 정원의 꽃들, 비본느 시냇물의 수련들, 교회당, 꽁브레 전체와 그 주변 등, 그 모든 것들이 형체와 견고함을 얻어, 즉 도시와 정원들이, 나의 찻잔에서 나왔다." 어쩌면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실제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기억(꿈을 포함한)을 통해 짜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에게 사랑은 '그 사람을 소유하려는 고통스럽고도 미친 욕망'으로 주체를 광기와 혼미로 몰고 가지만, 마비된 우리 영혼을 일깨워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삶의 진실에 보다 근접하게도 해준다. 그것은 운명이나 필연이 아니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적 힘의 산물(우발적)이기에 그렇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은 내 안의 고유한 내면의 책을 발굴하는 것, 즉 문학예술 활동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사랑과 예술(문학, 음악, 그림)을 양 축으로 삼아, 한 시대(벨 에포크)를 관통하고, 사교계라는 창조적 동물원(모든 유행의 진원)을 체험한 후, 결국 작가 되기를 결심하는 한 소년의 성장을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음과 삶의 총체적 모습을 담아내는 기념비적 미학 소설이다.
상맹
5.0
길고 긴 민음사의 13권짜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완독 후 강신주 박사님의 프루스트 읽기 강의를 들으면서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를 완료했다. 처음에는 읽기가 너무 힘들었지만 그건 프루스트의 단독성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경험하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긴 시간 동안 짧은 식견으로 이 고전에 대해 느낀 것은 만연체다 이런 것이 아니라 프루스트는 삶의 편에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서사로 보면 정말 특정한 프랑스 사교계의 별 볼일 없는 사랑 이야기 같지만, 이런 곳에서도 프루스트는 인간의 군상들과 삶의 본질과 지혜들을 서술한다. 그리고 그 평범한 삶에서 느낀 감정들을 집요하게 붙잡고 본질의 깊이까지 탐구하고 사유한다. 오히려 13권인 것이 너무 짧을 정도로. 아니 근데 하나만 전달해주셔도 감사한데 ㅠㅠ 이렇게 많이 주시면 배탈나요. 창작을 위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의 편에서 글을 쓰고 예술을 한다. 아래는 강의 복습과 장마다 느꼈던 것들의 정리 1. 스완의 사랑 사랑의 본질은 대상이 아니라 상황과 어떤 조건일 수 있다는 것. 뱅퇴유의 음악이 아니었다면 사랑하지 않았을 오데트에 대한 스완의 사랑. 바로 그 무의식적 기억, 잃어버린 기억이 불러일으키는 자아를 잃어버리케하는 기쁨의 고양감. 이해받고 싶은 것은 사랑받고 싶어서이고, 사랑받고 싶은 것은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소돔과 고모라 사랑의 본질은 알고 싶어하는 것. 사랑하는 자아를 탄생하기 위해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앎이 필요하고 그에 맞게 새로운 자아와 기억을 탄생시키는 과정. 그래서 알베르틴의 동성애성은 화자에게 절대의 미지의 영역이기에 사랑을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가 됨. 젠더 이분법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고 각기 다른 그런 자아들이 있음.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른 자아들이 나오는 것. 사랑에 있어서의 젠더는 사랑 이후에 자각되는 것. 인간의 본질은 관념명사가 아닌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느냐에서 오는 것. 3. 갇힌 여인 금기는 욕망의 원천인 것처럼, 불안한 화자의 알베르틴 가두기. 하지만 가두면 가둘 수록 사라지는 알베르틴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의 날개를 직접 달아주는 것이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는 힘. 다른 자아를 탄생시키는 연인과 그 자아들로 인해 더 알고 싶고 궁금해하게 하는 사랑. 4. 사라진 알베르틴 사랑의 깊이는 고통에서 측정된다. 사랑에 빠진 자아가 상실되었을 때 불쑥 튀어나와서 아무렇지 않게 삶을 영위하게하는 다른 자아들. 사랑의 편집증적 힘은 사랑의 자아가 다른 자아들에게 애도를 요구하는 것에 있을 수도 있다. 사랑의 자아들처럼 과거에 쌓인 지층들로 만들어진 많은 자아들을 만들고 각각 인정하게 하는 과정. 이 낯선 힘들. 이 비자발적 기억으로 인한 자아들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드러나는 잃어버린 시간과 자아들. 사랑하는 수많은 나들. 사랑의 경험은 단독적인 자아를 탄생시키는 경험이고, 이로 인해 나를 깊게 알아가는 경험이다. 사실 사랑의 조건은 대상이 아니라 내가 가진 욕망의 특성들의 집합체일 수도 있다. 5. 되찾은 시간 사랑을 통해 깨달은 삶의 불완전성. 오히려 완전한 행복은 과거의 문득 튀어나오는 비자발적 기억에 있을 수 있다. 그런 기쁨은 나 자신이 빠져나오는 무아의 느낌이고 죽음과 희열의 경험이다. 어쩌다가 주어진 이러한 기쁨들. 비자발적 기억에 담겨진 수많은 편린들과 되돌아 봤을 때 느껴지는 어떠한 본질들. 삶은 이러한 강렬한 기억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기 위해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자아를 넘어서게 하는 그러한 기억들. 현재의 자아를 시시때때로 비자발적으로 전복하는 그런 과거의 경험들과 자아들. 예술의 고유성은 이러한 기억들을 붙잡아 놓는 것에 있는 것이다. 스완의 뱅퇴유 음악, 프루스트의 발베크와 콩브레처럼. “모든 인상은 두 겹이라고, 절반은 대상에 싸여 있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만이 알아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마음에까지 이어져 있다” 결국 어떤 사물과 대상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나만의 기억과 내면이 담긴 언어들 그리고 예술들을 만들어내어 단독성을 획득하는 것. 결국 세계를 풍요로케하는 건 수많은 차이들과 시선들이기에. 헤겔이 말했듯 결국 타자는 자신을 이해하게 하기에. 예술가들은 모두에게는 평범하게 느껴지는 내면의 어떤 기억들을 붙잡아 끈질기게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들. 사랑의 경험도 마찬가지일 것. 내 단독성과 네 단독성으로 단독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서로에게 단독적인 자아를 만들어 주는 것. 진정으로 나를 이해받고 너를 이해해주는 세계를 만드는 것.
lilin🪽
읽고싶어요
프루스트의 만연체는 삶의 조그마한 숨결에도, 아니 숨결에 그 모든 기쁨과 슬픔이, 고통과 성장이, 사랑과 증오가, 기억과 추억과 기록이. 차오르는 아스라한 시간 속에 각인 / 됨을, 돼었음을, 될 것임을 독자의 감각으로부터 증명해낸다.
태연
4.5
현재까지 민음사에서 새로 펴내고 있는 시리즈로는 게르망트까지 구매해 읽어보았다. 솔직히 프루스트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귀족들의 생활상, 지루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강렬한 질베르트와의 시간들, 시같은 문장들. 잠시 책을 놓게는 해도 포기하지않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ㆍ 우리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삶을 설계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람을 맞아들일 준비가 될 때면, 그 사람은 오지않고 우리에게 죽은 존재가 되지만, 우리는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 안에 갇혀산다.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359p
JackQKwag
4.5
문학만이 펼쳐보일 수 있는 한 인간의 삶
재혁짱
5.0
한 사람의 글이 누군가의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면 2025.01.15~202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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