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영
4.0

엑시스텐즈
영화 ・ 1999
평균 3.4
<엑시스텐즈>는 점점 환상이 현실을 대체해가는 현대의 흐름과 세기말의 감성이 절묘하게 뒤섞인 영화다. 무엇보다 엑시스텐즈라는 가상 현실 게임 속 생경한 풍경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엑시스텐즈를 둘러싼 현실주의자와 환상주의자 사이의 결투를 그리는데, 이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예술사의 거대한 두 축의 대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엑시스텐즈>는 환상을 옹호하는 쪽이다. 환상주의자처럼 보였던 주인공들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현실주의자로 밝혀지지만, 그 반전이 폭로되는 시공간조차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결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조명한다. 말하자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한번 강을 건너면 다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 구조가 <엑시스텐즈>에서는 영화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환경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셈이다. 크로넨버그는 환상이 현실을 교란한다고 여기는 자에게 이렇게 비아냥대는 것 같다. "넌 이미 환상 속에 있는걸?" 요컨대 인간성의 상실을 우려해 환상을 없애려 했던 현실주의자의 노력은 크로넨버그에겐 퇴행적인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는 인간이 왜 현실에만 붙박여 있어야 하는지 반문하며, 인간성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환상 속에 살면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이 질문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현재, 그리고 갈수록 그 경향이 짙어질 미래에 더욱 유효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엑시스텐즈>는 시대적 현상에 관한 예언적인 영화가 될 것 같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감각은 촉각이다. 이는 대개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영화 매체의 특성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탯줄처럼 생긴 바이오 포트와 인간의 척추에 박힌 배꼽 모양의 플러그가 연결되는 것을 게임기의 전원을 켜는 행위로 설정하는데, 두 장치가 연결될 때 고무 재질 특유의 말랑한 촉감과 슬라임을 주무르는 것 같은 끈적한 사운드는 마치 4DX 영화를 보는 듯한 실감을 자아낸다. 특히, 수정된 양서류의 알에 합성 DNA를 넣어 성장시킨 동물로 묘사되는 바이오 포트는 그 유기체적인 성질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은 장기처럼도 보이고, 거대한 라텍스 재질의 콘돔처럼도 보인다. 이 괴상한 생명체를 인간의 척추에 박혀 있는 플러그에 삽입하는 행위는, 그래서 무엇보다 통각적이면서 동시에 섹슈얼하다. 무척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감각은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환상으로 들어가 그 괴이한 것을 주무르고 몸에 삽입하는 추체험을 가능토록 만든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들을 엑시스텐즈 게임에 접속시키는 신비한 마력을 선보인다. 이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악한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