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3 months ago

5.0


content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영화 ・ 2025

평균 4.1

밥 퍼거슨 같은 사람을 많이 봤다. 빗질을 마지막으로 한 게 16년 전인 것 같은, 길이가 애매한 체크 남방을 입은, 3km 떨어져서 봐도 성격 안 좋은 사람. 총체적으로 너저분한 사람. 탄핵 시위에도 퀴어 퍼레이드에도 팔레스타인 시위에도 그런 사람이 꼭 있다. 노란 봉투 법도, 중대 재해 처벌 법도, 각종 파업과 그로 인한 지정 휴일도 그런 분들에게 빚진다. 자세히 보면 그들의 외모 전성기가 얼핏 보이기도 하는데, 정작 본인들은 남의 시선 따위 넘어선 지 오래다. 그래서 꽃미남 시절이 잘 알려진 배우가 그 역할을 맡은 게 중요하다. 폭싹 속을 애순이가 아이유여야만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시장 바닥에서 오징어 파는 사장님 안에 팝스타가 한 명쯤 살아 있고, 한물간 좌파 혁명가 안에 그 잘생긴 청년이 남아있다는 것. 그런 게 왜인지 소중하다. 윌라의 엄마 퍼비디아가 온 세상의 팬티를 다 벗길 수 있는 섹시한 생명체인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그녀의 혁명 시퀀스들은 비욘세 뮤직비디오 버금가게 관능적이다. 법치가 틀렸을 때 정치를 외치는 일이 섹시함일 수 있는 시대에 대한 경배다. 동시에 이 영화는 혁명에서 한 발 뺀 사람들, “자기야 혁명 잘해,” 하면서 애 밥 챙기느라 바빴던 사람들을 향해서도 절을 올린다. 열여섯이 된 윌라의 등장에서 나는 밥의 선택을 통째로 납득했다. 카메라가 내시경도 아닌데 윌라의 팔다리 안에서 뛰는 맥박이 보이는 것만도 같았다. 아빠는 암구호를 까먹어서 집결지를 못 듣고, 체력이 안 따라줘서 엉뚱하게 잡히지만. 세월이야말로 혁명의 적인가 싶을 때쯤. 윌라의 존재로 세월은 그 모든 짓궂음을 보상해준다. 암구호를 이어받을 딸이 저렇게 크고 있다면 세월은 우리 편이다. 시간은 결코 모른 척하지 않는다. 무전기가 고물이 아닐 거라고 믿어준다면. 마침내 음악이 흐른다. 학교나 직장에서 헛소리에 말대답하는 것도 이민국에 쳐들어가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혁명이다. 돈 잘 버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에 그건 아니라고 소심하게 딴지를 걸기까지 필요한 마음가짐은 복면 쓰고 은행을 터는 일에 필요한 작정만큼이나 무겁다. 자본주의에 대항하겠다는 크나큰 의지. 그러므로 혁명 분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밥 퍼거슨이 다 끝난 줄 알았던 순간에 낯선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는 모습은 꽤나 현실적인 그림이다. 마약과 술에 절여져 있는 사람이 과거에 뭘 했는지 잊지 않고 존중하는 게 이 영화 속 연대다. 밥 같은 사람들 덕분에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순간들에 대한 의리만큼 끈질긴 건 이 세상에 없다. 윌라가 도복을 입고 사부님 밑에서 가라테를 배워야 하는 건 아빠의 거창한 교육적 비전 때문이 아니라 그 사부님이 그저 동네 아군이라서였을 것이다. 끼리끼리 도우며 살아야 하니까 이쪽 가게에서 무언가를 사주고 저쪽 가서 또 하나 팔아주고 뭐 그러는 거다. 그 연쇄가 테이큰급 블록버스터일 수 있다는 게 이 영화의 유머다. 악당들에게 잡힌 딸을 구해낸 아빠 이야기가 더는 세상에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옆으로 꺾지 않고 아래위로 꺾어버린 추격전이라면 당연히 세상에 필요하다. 코사인 함수처럼 생긴 길에서라면 더 빠른 사람이 이기지 않는다. 시야를 이용하는 사람이 이긴다. 자신이 지나온 길과 앞에 놓인 길이 똑같을 것이라고 상정하는 사람이 진다. 치킨 너겟을 만드는 이민자들을 구속한 스티븐 J. 록조는 누가 프랜차이즈를 소유하는지 몰라서 망했다. 하던 대로 했다가 낭패 보는 건 누구인가. 브레이크 없이 직진하는 차를 이기는 건 미리 멈춘 차다.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모든 존재, 하던 대로 하자는 사장님부터 성별은 두 가지 뿐이라는 정치인까지. 멈춰서 사유하지 않는다면 끝없는 전투에 참전하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다. 흥분해서 글을 쓰는 동안 내 손가락은 PTA를 향한 사랑을 뜬금없이 발사하지 않도록 참느라 힘들었다. 미친 듯이 존경한다, 폴 토마토 앤더슨.


본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왓챠피디아의 자산이며, 사전 동의 없이 복제, 전재, 재배포, 인용, 크롤링, AI학습, 데이터 수집 등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 주식회사 왓챠
  • 대표 박태훈
  • 서울특별시 서초구 강남대로 343 신덕빌딩 3층
  • 사업자 등록 번호 211-88-66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