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혜원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평균 3.6
ㅣㅣㅣㅣㅣㅣㅣ 마르크스가 그랬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그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는다고. 자본주의가 개별 자본가의 선의와 악의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도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는 ‘어머니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았다. 능력이든 랜덤이든 운명이든 여성 일부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겠으나 전체로서 여성은 가부장 질서와 규범에 이미 속해 있다는 얘기다. ㅣㅣㅣㅣㅣㅣㅣㅣ “대통령이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까지 돌았다. 기사에 달린 댓글로만 보다가 나는 얼마 전에 직접 듣게 되었다. 하필 애를 안 낳아본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여성이 대뜸 말했다. 박근혜가 엄마가 되어보지 못해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세월호 문제가 미궁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조마조마했지만 모두가 무안해질까봐 어물쩍 넘어갔다. 다시 생각해도 참 무심한 논리다. 한 사람의 지적·정서적 무능이 출산 경험의 부재에서 왔다는 발상. 다산할수록 성불한다는 말인지 뭔지 모르겠다. 그건 애 낳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집단적 모독이고, 애 낳은 여자들에 대한 편의적 망상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형성은 ‘출산’ 유무와 상관이 없다. 남자의 성숙이 ‘군필’ 유무와 무관한 것과 같은 이치다. ㅣㅣㅣㅣㅣㅣㅣㅣ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 그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통의 자산화가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애 키우고 먹고사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여성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ㅣㅣㅣㅣㅣㅣㅣㅣ 그날 모임에서 나는 김제동의 말을 들려줬다. 개념 있는 연예인의 말이니까,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말은 익숙하니까, 처음엔 다들 맞다며 동조한다. 그러나 한번 ‘왜?’ 하고 의심하고 토론하기 시작하면 각성이 일어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던데 내가 좀 더 현명하게 남자를 이끌었으면 평등한 부부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자책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게 알아간다. 사회 문제에 개입하고 약자 편에서 발언하는 미더운 방송인도, 좋은 삶을 위해 공부하는 여성 자신들도 가부장제 언어를 내면화하고 산다는 사실을. 내면화는 일상화라는 것을 . ㅣㅣㅣㅣㅣㅣㅣ 무조건 남자를 보살피며 살지 않겠다는 여자들이 나타나고 있듯, 무조건 여자 말만 듣고 살아도 되던 남자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여성이 상위 종족”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말이다. 노동자를 산업의 역군이라 명명하고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모든 사건과 사물의 질서를 정의하고 정리하고 판단하고 명령하는 마이크 권력이 줄어들고, 왜 맨날 나인가 회의하는 물음, 화장실 좀 맘 편히 가자는 일상의 억압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흘러넘치길 바란다. 그럴 때만 남성의 조화로운 인격 형성을 방해하고 여성의 평화로운 일상 활동을 가로막는 가부장제 언어는 무력해질 것이다. ㅣㅣㅣㅣㅣㅣㅣ 만약 아들한테 엄마 피곤하니까 네가 대충 차려 먹으라고 말했으면 충분히 그랬을 텐데, 괜히 내가 알아서 해줘놓고 뒷북이다. 자식들 밥에 목숨 걸고 자동으로 기능하는 내가 한심한데, 그런 나를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 원망의 화살을 아들한테 돌리고는, 이 시추에이션이, 고작 먹고 싸는 일에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야 하는 삶이 분해서 씩씩거렸다.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 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 하던 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ㅣㅣㅣㅣㅣㅣㅣ 부모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불안. 성인이 되어 자기 한 몸 챙길 때까지는 이 세상 모든 아동들은 자기 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지. 그러니 안쓰러운 어린 것에게 잘해주어야 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자주 힘에 부친다. 내심 잔인해진다. 이 분열적인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사는 일은 쓸쓸하고 서러웁다. ㅣㅣㅣㅣㅣㅣㅣ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이틀째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데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남편. 결혼 전에 아빠를 볼 때면 좀 궁금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 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ㅣㅣㅣㅣㅣㅣㅣㅣ 아침밥 안 먹고 자란 아이는 전문가들의 경고대로 학습력이 저하될지언정 아침에 해가 뜨듯 밥이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적어도 알지 않을까 싶다. 이걸 모르는 어른이 의외로 많다 ㅣㅣㅣㅣㅣㅣㅣㅣ 나에게 밥은 집밥이냐 외식이냐, 레시피가 간단하냐 복잡하냐, 맛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 ㅣㅣㅣㅣㅣㅣㅣㅣ 전 남자친구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성적 책임감이나 고통 감수성이 희박할 개연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절박감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딸의 배가 불러오는 사실을 한집에 사는 부모는 모를 수 있다. 한국에서 가족은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엄마, 아빠, 딸, 아들의 역할로 각자 바삐 산다. 일주일에 밥 한 끼 얼굴 보고 먹지 못하는 가족이 부지기수다. 여자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주고 배려하도록 키워진다. 문제를 터뜨려서 해결하는 분란보다 나 하나만 참으면 유지되는 평화가 익숙하다. 그렇게 신생아 유기범이 된다 ㅣㅣㅣㅣㅣㅣㅣㅣ 갓난아기는 신성한 생명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신성함은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규정되는가. 왜 생물학적 아버지인 남자 친구나 부모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서’ 한 생명체를 쏟아내듯 낳고 치우듯 버려야만 했을까. 왜 미혼모로 살아가는 일이 제 몸 아파 낳은 아기를 죽게 내버리는 일보다 더 공포스럽게 되었을까. 미혼모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교에 유아원을 두는 독일 같은 나라도 있다는데, 왜 우리 사회는 미혼모가 사회 안에 섞여 살아가지 못하고 양육의 짐을 몽땅 떠맡아야 할까 ㅣㅣㅣㅣㅣㅣㅣ 콘돔 사용법부터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시 대처법,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논의할 수 있는 상담 기관과의 연락법 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교육이 절실하다. 하루걸러 뉴스에 오르는 신생아 유기 사건을 보지 않으려면, 우리가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 사람’으로 살지 않으려면 말이다 ㅣㅣㅣㅣㅣㅣㅣ 거리의 아이들을 보면 나 혼자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했다. 아빠가 알콜중독이고 엄마는 가출했거나 식당에서 일하고. 밤이면 집안에서는 칼로 살 베는 전쟁이 일어난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이는 미치거나 뛰쳐나오거나. 언제부턴가 시나리오가 하나 더 늘었다. 아빠나 오빠에게 시달리는 꼬마 소녀들. 자기 욕망을 알기도 전에 타자의 욕망의 도구화된 육체로 긴 밤을 지나야 하고 그 몸뚱이 추슬러 긴 생을 살아야 한다. ㅣㅣㅣㅣㅣㅣㅣ 여자로 태어나서 ㅁㅊ년으로 진화한다는 말은 여자의 연대기에 관한 핵심적 진술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가 밑줄 그었던 부분. “미ㅊㄴ 널뛴다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ㅊㄴ을 미치게 만든 ㅁㅊ놈들의 존재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새삼 궁금했다. 그 길고 오랜 세월 동안 ㅁㅊ놈들의 존재는 어떻게 생략이 가능했을까. ㅣㅣㅣㅣㅣㅣㅣ 남편의 입장을 내면화한 말들, 결혼한 여자의 행실을 제약하는 발언이 여전히 아무 때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러자 C가 질문하는 여성들을 변호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살아보지 못해서 그럴 거라고, 자기도 스스로 가둔 여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ㅣㅣㅣㅣㅣㅣㅣ 그 우편물은 안도감보다 불쾌감만 키웠다. “이웃을 조심(의심)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이런 행정 조처는 변죽만 울리는 꼴이다. 골목길에 나타난 범죄자라는 편견을 강화해 집안이나 사무실에 ‘상주’하는 가해자를 못 보게 한다. 중략. . .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ㅣㅣㅣㅣㅣㅣㅣ 신문이 조종하는 대로 사고하고, 광고에 나오는 대로 욕망하는 엄마, 사회적 모성으로서의 엄마. 어떤 개념을 걸어도 ‘엄마’는 문화적 산물이고,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더 이상 엄마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나부터 아프지 않고 울지 않는 엄마가 되는 일이 남았다. 자식이 울까봐 미리 우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웃어서 자식도 웃게 하는 그런 행복한 엄마들이 많아지는 세상.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숙제다. ㅣㅣㅣㅣㅣㅣㅣㅣ 지나가는 말로라도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고학력자들이었다.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학벌 중심 사회를 공고화했고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를 내면화했고 자기 자식을 명문대 보내려고 애썼고, 자신이 어느 대학 몇 학번인지를 자연스레 노출했고 그로 인한 실리를 살뜰히 챙겼다 ㅣㅣㅣㅣㅣㅣㅣ 작년에 모 대학 특강을 갔을 때는 강사료 지급 기준에 석박사 학력 기준은 있어도 고졸 학력 기준은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단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ㅣㅣㅣㅣㅣㅣㅣ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것과 관련해 꽤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잊고 살아도 세상은 잊지 않으므로 ‘그것’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ㅣㅣㅣㅣㅣㅣㅣㅣㅣ 아버지–남편–아들–지인–영화–문학을 접하면서 어설프게나마 남자라는 종의 연구로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관계–과정보다 목표–성과 위주로 사고하는 남자들의 감각과 욕망. 내가 남자 동료들과 관계 맺으며 절망하는 지점도 항상 같은 자리다.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주저앉은 적이 없는 그 남성성의 지대. 그곳 아닌 어디에 몸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서성인다. 남자들의 변화를 기다리느니 바위가 살로 변하는 걸 바라자. 남자는 술과 같아서 맹목적으로 관계했다가는 몰락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데, 그렇게 그들을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싶으니 문득 쓸쓸한 일이다. ㅣㅣㅣㅣㅣㅣㅣ 명문대 졸업, 전문직 종사자로 표상되는 소위 정상적 삶의 서사는 매스컴으로 구전으로 맹렬히 유통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수록 삶의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장애여성 강사처럼 자기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말할 기회가 드물고, 겨우 말한다 해도 오해나 동정을 산다. 그런데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 위치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ㅣㅣㅣㅣㅣㅣㅣㅣㅣ 세상에는 무수한 삶이 있다. 이 말은 세상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다는 뜻이다.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래서 보고도 모르는. ㅣㅣㅣㅣㅣㅣㅣ 아마도 사람을 단정하는 내 ‘꾸준한 고집’으로 눈앞에서 놓쳐버린 무수한 타인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듣기를 시도한다. 저마다 처지와 형편과 고민을 말하고 듣고 상상하는 동안 서로의 존재 정착을 도우리라 . ㅣㅣㅣㅣㅣㅣㅣㅣ 《몸에 갇힌 사람들》의 저자 수지 오바크는 말한다. “언어들이 사라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다양한 신체 종류들과 표현들이 사라지고 있다. 다양성과 차이라는 강점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몸을 개조하기를 원하고, 미용 산업에는 떼돈을 벌어다주면서 스스로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안긴다.” ㅣㅣㅣㅣㅣㅣㅣ 이 세상 여자들이 (마담 보바리)엠마처럼 살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엠마처럼 살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커다란 착각이다. 사랑에 투신하는 용기, 삶을 지탱시키는 열기는 아무나 갖고 있지 못하다. 계산적으로 사느라 용쓰는 동안 본래적 열정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ㅣㅣㅣㅣㅣㅣㅣ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참지 못할 일과 참을 일을 분간하는 기능이 퇴화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대기업 상무의 승무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사례들을 보면, 그간 노동자들이 참 무던히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먹고사니즘 때문에. ㅣㅣㅣㅣㅣㅣㅣㅣ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ㅣㅣㅣㅣㅣㅣㅣㅣㅣ 장르는 갈래다. 장르 자체가 작품의 고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권력에 빌붙어 합리적 생존성만 따지는 의사나 법조인이 있고, 약자에게 다정한 폭력을 휘두르는 문인과 교수가 있다. 특정 직업에 덧씌워진 환상을 벗겨내고, 그 일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다른 존재를 억압하진 않는지, 어떤 관점을 내포하는지 해부학적으로 따져야 한다. ㅣㅣㅣㅣㅣㅣ “그런 일 하고도 먹고살 수 있어요?” 그 말은 그 옛날 아버지의 말씀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의 리메이크처럼 들린다.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서 이해하기 위한 말 건넴이 아니라 바깥에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 위한 말 던짐이다. 달갑지 않다. 먹고살 수 없으면 생활비 대줄 거냐고 따지고 싶은 심술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그들은 왜 질문하는 자리에 있고 나는 왜 쩔쩔매며 답하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 저 질문의 형식을 띤 모욕하는 자리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ㅣㅣㅣㅣㅣㅣㅣ 학위와 등단과 취직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서, 그냥 글 쓰고 싶은 삶이어서 나는 긴 세월 난감했다.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